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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경효 시인 / 문 밖에서
현관문을 열다 말고 멈칫거린다 반쯤 열린 문 안쪽 세상이 낯설다 가만히 집 안을 들여다본다 닫혀 있던 공간이 만들어내는 내밀한 무늬들이 수런거리며 일어선다 익숙한 일상의 뒷모습이 또 하나의 세계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으니 보이는 것을 향해 손을 내밀었는데 허공이 먼저 다가온다 익숙하다는 것은 아무런 경계가 없다는 것 덫에 걸린 짐승처럼 마음이 자꾸만 바스락거린다 내 속의 오래된 나를 돌아본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의 내가 나에게 물어올지도 모른다 아직 그쪽의 풍경은 괜찮은가 문을 열다 말고 문 밖에서 잠시 또 다른 세상과 겨루고 있는 사이 또 누군가 나를 열어놓고 사라진다 -시집 『사랑에 대한 반성』에서
곽경효 시인 / 가끔은
늦은 저녁 준비를 하다 바빠진 마음 탓인가 무디어진 칼날 때문인가 손갈가을 베었다 칼갈이에다 칼을 쓱쓱 문지르며 생각한다 스스로 일어서는 저항은 얼마나 쓸쓸한 것인가
살아서 부끄러운 날들에 날선 칼을 들이댄다
가끔은 악! 소리나게
곽경효 시인 / 상수리나무 여인숙
그 숲에는 상수리나무 여인숙이 있다 한때 저마다의 방에 불을 밝히고 끊임없이 속살거리며 사랑이 묵어가던 곳
이제 아무도 머물지 않는다 그저 바람에 찢긴 이파리를 깃발처럼 매달고 제 발등에 패인 굵은 주름만 바라보고 있다 한낮의 햇살이 또르르 이마 위를 굴러가면 나무는 길게 하품을 한다 유일한 손님인 다람쥐들이 하늘로 난 창을 열고 저희끼리 웃는다 새 몇 마리가 굽은 등 위에 날아와 앉는다
가끔 물소리에 온몸이 젖기도 한다 그런 날에는 공연히 눈시울이 붉어져 물 속 깊이만큼의 그리움을 가만히 발밑에 묻는다
저녁 해가 그림자를 끌고 가는 소리에 새들은 엉덩이를 툭툭 털어내며 길 떠날 채비를 한다
그 숲, 상수리나무 가지 위에 밤마다 별들이 다녀간다
곽경효 시인 / 동행
하루 첫 생각 중에서 나에게 건네는 말 마음에게 지지 마 저녁에 잠자리 들기 전 나에게 묻는 말 오늘 몇 번이나 흔들렸니? 다시는 마음에게 지지 말자 흔들리지도 말자 다짐하지만 자꾸 넘어지고 또 흔들린다 지나간 시간은 그래도 견딜 만했다 모든 순간 네가 있었으니
곽경효 시인 / 꽃의 뒷면
지난 봄 눈부시게 환하던 꽃나무들 제 이파리 다 내주고 빈손으로 서 있다 잊고 있던 이름 하나 눈썹 끝에 매달린다 한때 마음이 춥고 쓸쓸했던 것은 바람 탓이라고 생각했다 나 혼자만 아픈 것이라고 철없이 들썩거렸다 누군가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은 참 오래된 일이다 등 뒤에서 제 살 썩히고 베어내며 슬픔을 대신 울어준 사람아 눈멀어 있던 날들을 내려놓는다 캄캄한 날 홀로 저물 수 있겠다
곽경효 시인 / 밀물
나는 너무 무거워졌다 얼마나 많은 물이 내 몸속을 다녀갔을까 단단한 등뼈 사이에 두 손을 집어넣고 휘저으면 해초처럼 풀죽은 생애가 걸려 나올지도 모른다 심심하고 물컹한 바람이
침묵 속에 나를 감추어두고 오르지 못할 단애 하나를 세운다
시간이 갈수록 발목을 적시는 물, 물결의 소리
곽경효 시인 / 보이지 않는 사랑
천 년만큼 견뎌본 후에 그때도 눈물이 나면 보고 싶다고 말을 해 볼까
아카시아 나뭇잎을 따서 점을 쳐 본다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한다
이파리 한 잎 한 잎 뜯어내며 잊는다 잊지 않는다 잊는다
그래도 못 잊어 다시 더 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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