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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양문규 시인 / 아버지의 감나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6.
양문규 시인 / 아버지의 감나무

양문규 시인 / 아버지의 감나무

 

 

비탈진 밭둑가에 감나무를 심는다

뿌리가 실한, 등이 반질반질한

올곧은 놈들 골라 심는다

아버지는 그 감나무에 기대 걸으며

남은 생을 마칠 것이다

 

감나무는 자라 바람에 흔들리면서

말동무가 되어주기도 하고,

맑은 햇살에 잎을 반짝이며

다디단 가을 선사할 것이다

그러나 채 꽃을 피워 열매 맺기도 전

아버지 고단한 육신 내려놓을지 모른다

 

흙과 더불어 일생을 살아온

일흔두 살의아버지 감나무를 묻는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몸은 가난했으나 한없는 마음으로

자식인 양 눈물 주며 감나무를 키울 것이다

 

돌아가는 길 하늘이 아니라

감나무로 다시 태어난다는 걸

오래전부터 온몸으로 알고있던아버지

가을날 굵고 실한 열매로 남고 싶은 것이다

바람에도 곧잘 부러지는 여린 잔가지

태연히 끌어안고 하늘을 떠받치는,

아버지 낡은 뼛속에는 감나무가 자란다

 

-시집 <식량주의자>에서

 

 


 

 

양문규 시인 / 개망초

 

우리는 왜 별들을 헤아려

사랑이라 노래하지 못하는걸까

오늘 밤도 그 핏기 없는 몸을 별빛속에 사르지 못하고

왜 죄인처럼 고개만 떨구고 사나

우리는 왜 오늘을 헤아려

거짓이라 노래하지 못하는걸까

거리 거리 무표정한 얼굴 진실아래 사르지 못하고

왜 하늘 한 번 우러러보지 못하나

모질고 모진 세상 헤치며

봄 날에 꽃잎 피우고

버릴 수 없는 꿈과 희망을 함께한

참 눈물이면서

우리는 왜 별들을 헤아려

사랑이라 노래하지 못하는걸까

 

 


 

 

양문규 시인 /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산과 산 사이로 구름이 낮게 흘러가고

바람 속을 종소리 대신

소똥 묻은 새가 울고 간다

 

스님은 심장을 드러내고 계곡물 소리를 듣는다

서로 가는 것을 묻지 않고

길이 끝나는 곳으로부터

소리들이 되돌아와 발 디디는 곳마다

종을 울린다

 

물은 흘러가는 것을 묻지 않고 계속 흐른다

 

마음 속의 觀音

종소리 아닌 종이 운다

 

절 밖

아름드리 은행나무,

큰 울음

나뭇등걸 속에 내장한 채

하늘을 떠받들고 서 있다

 

-『딩아돌하』 2022-여름(63)호

 

 


 

 

양문규 시인 / 애기똥풀

 

 

산동네 돌담길 따라가다

꽃보다 먼저 사랑을 꿈꾸었으리

뒤척이는 몸 일렁일 때마다

사립문 금줄 타고 달빛에 젖었으리

옛날도 그 옛날도 그러했으리

 

해와 달 바뀌고

별이 바뀌었어도

노오란 꽃, 애기똥풀꽃

 

 


 

 

양문규 시인 / 옛주막에서

 

 

산둥성이 휘감아 골짜기를 굽이돌아,

풍양 삼강 둑방 아래 옛주막집,

거동이 불편한팔십 넘은 노파 홀로 살고 있다.

강과 집 사이 벽이 높아 강은 보이지 않는다.

 

강을 따라 4차선으로 뚫린 낯선 풍경으로 쌩쌩

달리는 시간 속에 정지된 옛주막.

술동이에 고인 빗물을 바가지로 퍼서 가지밭에 흩뿌린다.

 

무논에서는 개구리들이 울고,

길을 묻는 떠돌이에게 술대신 물을 권하며

간간이 옛날을 떠올린다.

잊어야 할 것들은 하나씩 잊어야산다.

 

탁주 한잔에 시름을 덜었던 가난한 세월을 밟고

살았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북적이던 사람들 대신, 평상에는 벼랑 끝 늙은 회화나무

그늘만 가득하다.

 

물과 물이 엉기며 흘러들어 바닥의 중심을 이루었던 옛나루터, 회화나무는 길 속으로 사라지는 오래된 풍경을 제살붙이처럼

내려다보고있다.

 

 


 

 

양문규 시인 / 이별초

 

 

처서 지나고

모깃소리 들릴락 말락 할 즈음

이별초 폈냐?

엄니 전화하신다

이별초라니,

여든 살 넘어도 이별은 늘 그리움이려니

무른 살과 아픈 뼈 마디마디 바쳐

여여산방 마당 귀퉁이

노란 상사화 핀다

한마음 잊을만하면

저녁노을 저 너머

젊은 엄니 홀로 서 있다

 

 


 

 

양문규 시인 / 그곳으로 가고 싶다

 

 

그곳으로 가고 싶다

추수가 끝난 마른 옥수수밭 뒤로

그녀는 개울 건너 메밀꽃 피는 밭둑 걷고 있을 것이다

산과 들에는

쑥부쟁이 구절초 왕고들빼기 참취 고마리 쇠무릎

금강아지풀 개미취 물봉선화 산비장이 여뀌

굽이굽이 강물 흐르듯 두마 지나 벌곡

대둔산 태고사 저수지 멀리 금산이나 운주까지

귀뚜리미 울음 속으로 꽃들이 환하게 핀

들길 그녀는 가고 있을 것이다

가진 것이라곤 사방연속꽃무늬

물소리 찰찰 넘치는

물 속 나라보다 깨끗한 세상 없을 거라며

내게 나지막이 귀엣말 주고

수줍은 듯 물 위 미끄러져 아주 멀리 사라져간 여자

파아란 하늘 꽃살문 너머

세상 어디에선가 별밭 일구고 있을 것이다

가을 깊으면 천태산 너머 흑석리

개울 건너 붉은 수수밭 아래

메밀꽃 얼기설기 햇빛 좇아 하얗게 피어 있는

그곳으로 가고 싶다

 

-시집 『집으로 가는 길』에서

 

 


 

양문규 시인

1960년 충북 영동에서 출생. 청주대학 국문과 졸업.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학위 취득. 1989년 《한국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벙어리 연가』 『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 『집으로 가는 길』 『식량주의자』. 산문집 『너무도 큰 당신』. 평론집 『풍요로운 언어의 내력』. 논저 『백석 시의 창작방법 연구』 등. 현재 계간 『시에』 편집주간, 천태산은행나무를사랑하는사람들 대표. 대전대, 명지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