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고광식 시인 / 나무가 사람에게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6.
고광식 시인 / 나무가 사람에게

고광식 시인 / 나무가 사람에게

 

 

믿고 싶지 않겠지만

흙에 발을 묻고 햇볕만 쬐고 있어도 나는 살아간다

이 얼마나 행복한 삶인가 스스로의 땅을 지키고

커 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평화로운가

내가 사는 마을에는 나뭇잎이 바람을 노래하고

바람은 새를 노래한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가을이면 저마다 나무들은 나무 가까이

뿌리로 삶의 터전을 만들고

온 산을 혈육의 가족 단위로 만들어 간다.

이 얼마나 풋풋한 환경인가

혈육끼리 동포끼리 힘 모아 숲을 만들고

산새와 산짐승들 모여들고

내가 사는 마을에는 스스로 사랑을 나눈다.

멧돼지와 토끼가 사랑하고 토끼는 꽃들을 사랑하고

우리 모두 한줌의 체온으로 사랑을 나눈다.

믿고 싶지 않겠지만

때로는 그대 마을의 시인이나 화가들이

노을과 바람을 훔쳐가기도 한다.

정말 믿고 싶지 않겠지만

그대들 죽어 자신의 마을을 떠날 때

왕이나 성인이라 불렸던 사람들도

한줌의 나의 영토에서 잠자고 있음을

그래서 숲의 어둠 속에서

나의 뿌리로 다시 살아나고 있음을,

 

- 내항문학 동인지 21호 2002

 

 


 

 

고광식 시인 / 가을 허수아비

 

 

날아들지 못하는 참새의 부리가

들꽃 이슬에 젖고 있다

 

누더기 뒤엉킨 넋들만

다리 하나로 버티는 가을

 

허공에 띄워 놓은 눈썹이여

해갈의 바람 부는 날갯짓으로

또 무엇을 쫓기 위해

빈 가슴을 통통거리는가

 

들판, 너스레 떠는 표정 아래

웅크린 벼들이 머리 숙여

막걸리 잔을 비우고 있다

 

눈뜨고 날아들지 못하는 새들과

손이 없는 허수아비의

등돌린 대립 ,

밀짚모자를 쓰고 있으면

가을은 참새의 혓바닥으로 기침을 한다

 

목울대가 손금을 긋는 밤마다

한 마장쯤 물러선 동구 밖에서

나는 떨어진 밀짚모자를 벗는다

 

들판의 눈썹을 걷는다

 

 


 

 

고광식 시인 / 녹슨 포경선

 

 

포경선이 녹슬지 않는 분노로 묶여 있다

포구 속에 숨어 있던 갈매기가

빛나는 작살 모양의 날개를 펴며 날아오른다

 

고래잡이가 금지된 항구길 따라 길게 늘어선 주점들

 

포경선은 고래가 흘린 질긴 울음소리 찾아

뱃머리의 포신을 수평선에 맞춘다

 

깃발은 고르고 판판한 갑판 위에서

조금씩 붉어지는 얼굴로 갸웃거리며 나부낀다

수면을 가르며 떠오를 고래의 등을 향해

포경선이 거친 숨소리를 간헐적으로 내뿜는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날을 원망하듯

뜨겁게 흘러가는 긴 하루의 해가

북해도로 향한 항구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흔든다

 

방파제를 때리며 파열음으로 부서지는

작살 움켜쥔 포수의 목표물들, 바닷속을 기어 나와

어느새, 장생포항 시린 갈비뼈로 구부러진다

 

파도가 앞다투어 망가지는 방파제 위

 

고래의 갈비뼈로 교문을 세워놓은 장생포초등학교

어부의 심장이 고래의 배 속에서 뛰기 시작한다

 

그날 이후, 복원하지 못한

어부의 꿈이 장생포항 방파제 따라 하염없이

고래의 거친 숨소리를 쫓는다

 

 


 

 

고광식 시인 / 닭장차

-감옥일지·14

 

 

볕 좋은 가을

김포 들녘을 달리다 만난

수백의 목숨, 차곡차곡 싣고 가는

닭장차 나보다 앞서 가고 있다

몸부림칠 때마다 날리는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깃털

차창에 와 닿는다

하얗게 질린 비명처럼

길가에 코스모스

만장으로 나부끼고

누릇누릇 알곡들 익어 가는

목숨들, 알고 있을까

떠나는 길의

이 황홀함을

 

 


 

 

고광식 시인 / 어머님 율사리 선영에 모시던 날

- 감옥일지·9

 

 

산빛 푸르른 날

죄 벗고

누워서 가시는 어머님 곁에서

영원한 출소를 생각했습니다

피고 지는 일 같다고

산자락 마중 나온 쑥부쟁이도

지척이며 이승의 발길 붙잡는

이름 모를 풀벌레 소리도

허둥지둥 꽃상여 뒤따르던 가울볕도

슬픔이었습니다

생전의 마음자리마다

도려낼 수없이 아쉬움의 굳은살이 차 오르고

뿌리 뽑힌 나무처럼

자꾸 중심이 기울었습니다

길이 끝나는 그 산자락에

어머님 모셔놓고

언젠가는 우리도 와야 할 그 길

그 길을 되돌아 내려오는 길에

산 그림자 길게 끌고 앞서 내려온

노을이 울컥 붉어졌습니다

한 생애가 저무는 시간을 밟고

터져 나오는 울음처럼

 

 


 

 

고광식 시인 / 우렁각시

―가사도우미 J의 하루

 

 

 그녀는 남자가 나간 뒤에 출근한다 텅 빈 집 안은 금세 멸치볶음 냄새로 따뜻해진다 거리의 은행나무는 보낼 수 없는 편지를 바람 불 때마다 부친다 그녀는 정성껏 된장찌개를 끓인다 가난은 파출부의 꿈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지만 단단한 은행알로 여물기 시작한다 는개 같은 눈물이 양념으로 식탁에 놓인다 그녀는 마음을 쓸듯 집 안 구석구석 청소를 한다 허물어질 수 없는 삶을 곧추세운다

 

 그녀는 남자가 오기 전에 퇴근한다 은행잎 몇 장이 바람 위에 앉아 있다가 해 뜨는 쪽으로 날아간다 단칸방에서 어린 딸과 함께 뒹구는 은행잎, 딸의 눈으로 푸른 하늘이 흘러들어 간다 햇살을 받으며 은행알이 여물고 있다 그녀와 마주치는 딸의 눈, 애틋한 웃음이 번진다 퇴근한 그 남자 그녀의 밥상을 받아놓고 사랑할 누군가를 그리워하겠지 아마 우렁각시 같은 사랑을 매일매일

 

 


 

 

고광식 시인 / 마루타 알바

 

간호사가 A7 조끼를 입고 있는

내 팔에서

피를 뽑는다 빨아먹는 쭈쭈바 같다

주사기가 B7 조끼를 입은 여학생의

피를 빨아먹는다

운동회 때 백군과 청군으로 나뉜 것처럼

간호사의 신호에 우리는 경쟁하듯

약을 먹는다

잠이 쏟아져도 눕지 못한다

아홉 번의 채혈 끝에 발 디딘 건물이 출렁거렸고

오리지널 약과 대조 약이 몸속에서

충돌한다

731부대의 마루타들은

마취를 시키지 않은 채

해부되었다고 한다

임신한 여자의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낸 뒤 폐기하였다고 한다

아버지, 나를 교문으로 밀어 넣고 스스로 마루타가 되어

모든 장기를 적출당했다

어머니, 실험대에 올라

나를 낳은 뒤 폐기되었다 간호사가

드세요, 외치면 내가 속한 A조가

대조 약을 먹고

B조는 오리지널 약을 먹는다 열대어처럼

대기실 틈마다 쪼그리고 앉아 있는

알바생들

벽에 머리를 박고 지느러미를 떤다

끼룩끼룩 바다 갈매기처럼 허공에 대고

개혁 퍼포먼스를 하던 학생들

누가 다쳤는지

간헐적 외마디 소리가 병원 문을 민다

 

 


 

고광식 시인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학예술학과를 졸업. 1990년 《민족과 문학》 신인상을 통해 시인으로, 201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 추계예술대 출강, 시집으로 『외계 행성 사과밭』 등이 있음. 1991년 <청구문화제> 시부문 대상. 2018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열린시학> 편집위원. 추계예술대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