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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영미 시인 / 극락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5.
정영미 시인 / 극락조

정영미 시인 / 극락조

 

 

꽃에도 날개가 있구나

 

목이 꺾이고

꽃대만 덩그러니 놓였던 자리

텅 빈 목울대의 울음을 들었는데,

 

언제 날아왔을까

새 한 마리 앉아있다

 

제 자리를 기억한다는 듯

딱 그 자리에서

보드랍고 화사한 꽃잎

날개 돋친 듯 꽃이 피었다

 

소낙비 쏟아지던 지난밤

젖은 날개를 폈다가 오므렸다가

바람에 흔들흔들

길 헤매지는 않았는지

 

꽃대 위에 소망을 얹어 놓으며

서로 사랑하며 살자고

상처도 꽃이 되었구나.

 

 


 

 

정영미 시인 / 곰팡이 꽃

 

 

축제처럼 꽃잎 터진다

슬픔도 생의 한 몫이라면

곰팡이 꽃이 피었다

아무리 벽지를 닦아내고 찢어내도

또 다시 나타나는 끈질긴 습성

처음에는 아주 여린 모습으로

스물 스물 기어 나오다가

야금야금 갉아먹듯 교묘히 나타나

전체를 잠식해 버리고 마는

꽃무늬 가득 번득이는 야생의 눈빛을 보라

곰팡이 포자의 가벼운 발이

날개를 단 듯 사뿐 사뿐 날아다닌다

저 발, 내 등에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젖은 발이 뿌리를 내린

유년의 다락방은 내 슬픈 아지트

아버지 고래고래 지르는 고함소리에

눈물 꽃 팡 팡 늘 만발했던 곳

바람과 햇볕 속에도 숨어있고

화려한 내 옷 속에도 숨어 있다 피는 꽃

온통 집을 허물어야만 사라지는 꽃.

 

-『미네르바』 2019-여름호 <신작 소시집>에서

 

 


 

 

정영미 시인 / 등의 울음소리

 

 

그의 등에는 우물이 있다

절망과 고통의 등줄기 그 곡선을 따라

천천히 등을 쓸어주면 울음이 찾아들었지

 

저 쓰러진 꽃잎 좀 봐

긴 머리카락에 파묻힌 얼굴

다나이드*의 등은

표정은 보이지 않아도

희고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

영혼의 울부짖음이 들리잖아

등에는 인생의 시가 담겨 있어

그가 걸어갈 때 뒷모습을 보면

앞에서 읽지 못하는 표정이 보이지

그 슬픔에 눈물이 떨어질 때면

골방에서 웅크리던 어깨가 보여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강물 소리가 들려.

 

*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상

 

-시집 『밥에도 표정이 있다』에서

 

 


 

 

정영미 시인 / 금시당 별곡

 

 

금시당 툇마루에 앉아

낡삭은 담장 밖

배롱나무를 바라보네

 

갓끈을 풀고 진경에 들었던 한 생이

보지 않았어도 지금 느껴지네

저 솔숲과 노을이 일렁이는 강물

오래 동안 바라보았을 그윽한 눈동자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나무 가지마다 낙관처럼 찍힌 문장이

밀양강 솨 솨 풀어내던 바람에 얹혀

한 말씀처럼 들릴 듯도 하네

 

황금빛 은행잎들은

작비, 계절마다 하염없이 떨어졌고

두고 간 당신의 몇 점 온기가

금시, 배롱나무 꽃잎을 물들이네

 

*금시당 : 금시당백곡재(今是堂栢谷齋. 문화재자료 제228호. 경남 밀양시 활성로 24-184(용활동)). 금시당(今是堂)은 이광진(今是堂 李光軫:1513~1566)이 만년에 은퇴하여 학문을 닦고, 수양을 하기 위해 명종 21년(1566년) 밀양강변에 창건한 별업(別業)이다. 금시당(今是堂)이란 명칭은 중국 당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의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라는 문장에서 취한 것이다.

 

 


 

 

정영미 시인 / 장별리에 내리는 비

 

 

비안개에 젖어드는 늦겨울 저녁

무릎이 다 녹아내려 앉은뱅이꽃 같던

작은이모의 부고를 받아든다

 

서른에 청상 되어

마음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아들 때문에

창문 덜컹이는 소리에도 심장이 철렁거렸다던

 

돈 되는 건 다 솎고 뜯고 데치고 말려

난전 귀퉁이에 풀어 놓고

도라지 껍질 벗기는 일로 한세상 건너갈 것 같아도

단 한 평, 생의 아랫목은 꿈도 꾼 적 없다던

손톱 밑이 새까맣던 작은이모

 

지금 막 전나무 숲 가지를 스쳐지나온

낮은 비구름에 생긴 상처들

그 사이로 아직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이모의 발자국 같은 비가 내린다

 

 


 

 

정영미 시인 / 수화

 

 

목련나무 아래서

소녀 둘이

손으로 봄을 이야기 한다

 

겨울에서 풀려난 꽃은

순백의 빛깔로

그 여린 손에서 다시 피어난다

 

찬바람이 헤적일 때

소리는 가라앉고

말들은 더 침묵하고,

 

다만 그 깊은 눈동자에 핀

하얀 봄날

 

목련꽃 몽글몽글 피어나듯 고요히

오래도록 그들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정영미 시인 / 산목련, 비밀을 듣다

 

 

그녀가 예고도 없이

단단히 뭉친 말씨를 뱉어냈다

 

그날 이후

누군가를 만날 때면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것처럼

다시 뱉어내고 싶은 게 있었다

 

내 의지와는 달리 삼켜버린 그 말씨가

입 밖으로 역주행할 것 같아

산목련 얼굴빛도 하얘졌다

 

오랫동안 그녀가 품고 있다가 흘린 것이

내 마음 어디쯤서 싹이 터 올라오는지

자꾸 목이 간지러웠다

 

산목련도 입이 가려운지

바람에 헛기침을 했다

 

그녀에게는 내가 깊은 산골짝

어쩌면 산목련 쯤으로 보였던 거다

저 홀로 피었다가

저 홀로 말없이 지는,

 

들은 비밀이 시시하고 싱거운지

보름달이 귀를 갖다 대면

산목련은 희죽희죽 웃으며 더 하얘졌다

 

 


 

정영미 시인

1963년 경북 문경 출생. 세종대학교 지리학과 졸업. 서울문화예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12년 《미네르바》 등단. 시집 <밥에도 표정이 있다>. 동서문학상 수상. 현재 문협, 미네르바작가회, 동서문학회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