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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미 시인 / 극락조
꽃에도 날개가 있구나
목이 꺾이고 꽃대만 덩그러니 놓였던 자리 텅 빈 목울대의 울음을 들었는데,
언제 날아왔을까 새 한 마리 앉아있다
제 자리를 기억한다는 듯 딱 그 자리에서 보드랍고 화사한 꽃잎 날개 돋친 듯 꽃이 피었다
소낙비 쏟아지던 지난밤 젖은 날개를 폈다가 오므렸다가 바람에 흔들흔들 길 헤매지는 않았는지
꽃대 위에 소망을 얹어 놓으며 서로 사랑하며 살자고 상처도 꽃이 되었구나.
정영미 시인 / 곰팡이 꽃
축제처럼 꽃잎 터진다 슬픔도 생의 한 몫이라면 곰팡이 꽃이 피었다 아무리 벽지를 닦아내고 찢어내도 또 다시 나타나는 끈질긴 습성 처음에는 아주 여린 모습으로 스물 스물 기어 나오다가 야금야금 갉아먹듯 교묘히 나타나 전체를 잠식해 버리고 마는 꽃무늬 가득 번득이는 야생의 눈빛을 보라 곰팡이 포자의 가벼운 발이 날개를 단 듯 사뿐 사뿐 날아다닌다 저 발, 내 등에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젖은 발이 뿌리를 내린 유년의 다락방은 내 슬픈 아지트 아버지 고래고래 지르는 고함소리에 눈물 꽃 팡 팡 늘 만발했던 곳 바람과 햇볕 속에도 숨어있고 화려한 내 옷 속에도 숨어 있다 피는 꽃 온통 집을 허물어야만 사라지는 꽃.
-『미네르바』 2019-여름호 <신작 소시집>에서
정영미 시인 / 등의 울음소리
그의 등에는 우물이 있다 절망과 고통의 등줄기 그 곡선을 따라 천천히 등을 쓸어주면 울음이 찾아들었지
저 쓰러진 꽃잎 좀 봐 긴 머리카락에 파묻힌 얼굴 다나이드*의 등은 표정은 보이지 않아도 희고도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워 영혼의 울부짖음이 들리잖아 등에는 인생의 시가 담겨 있어 그가 걸어갈 때 뒷모습을 보면 앞에서 읽지 못하는 표정이 보이지 그 슬픔에 눈물이 떨어질 때면 골방에서 웅크리던 어깨가 보여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강물 소리가 들려.
* 오귀스트 로댕의 조각상
-시집 『밥에도 표정이 있다』에서
정영미 시인 / 금시당 별곡
금시당 툇마루에 앉아 낡삭은 담장 밖 배롱나무를 바라보네
갓끈을 풀고 진경에 들었던 한 생이 보지 않았어도 지금 느껴지네 저 솔숲과 노을이 일렁이는 강물 오래 동안 바라보았을 그윽한 눈동자
覺今是而昨非 각금시이작비
나무 가지마다 낙관처럼 찍힌 문장이 밀양강 솨 솨 풀어내던 바람에 얹혀 한 말씀처럼 들릴 듯도 하네
황금빛 은행잎들은 작비, 계절마다 하염없이 떨어졌고 두고 간 당신의 몇 점 온기가 금시, 배롱나무 꽃잎을 물들이네
*금시당 : 금시당백곡재(今是堂栢谷齋. 문화재자료 제228호. 경남 밀양시 활성로 24-184(용활동)). 금시당(今是堂)은 이광진(今是堂 李光軫:1513~1566)이 만년에 은퇴하여 학문을 닦고, 수양을 하기 위해 명종 21년(1566년) 밀양강변에 창건한 별업(別業)이다. 금시당(今是堂)이란 명칭은 중국 당 시인 도연명의 ‘귀거래사(歸去來辭)’ 중의 “각금시이작비(覺今是而昨非)”라는 문장에서 취한 것이다.
정영미 시인 / 장별리에 내리는 비
비안개에 젖어드는 늦겨울 저녁 무릎이 다 녹아내려 앉은뱅이꽃 같던 작은이모의 부고를 받아든다
서른에 청상 되어 마음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아들 때문에 창문 덜컹이는 소리에도 심장이 철렁거렸다던
돈 되는 건 다 솎고 뜯고 데치고 말려 난전 귀퉁이에 풀어 놓고 도라지 껍질 벗기는 일로 한세상 건너갈 것 같아도 단 한 평, 생의 아랫목은 꿈도 꾼 적 없다던 손톱 밑이 새까맣던 작은이모
지금 막 전나무 숲 가지를 스쳐지나온 낮은 비구름에 생긴 상처들 그 사이로 아직 떠나지 못하고 서성이는 이모의 발자국 같은 비가 내린다
정영미 시인 / 수화
목련나무 아래서 소녀 둘이 손으로 봄을 이야기 한다
겨울에서 풀려난 꽃은 순백의 빛깔로 그 여린 손에서 다시 피어난다
찬바람이 헤적일 때 소리는 가라앉고 말들은 더 침묵하고,
다만 그 깊은 눈동자에 핀 하얀 봄날
목련꽃 몽글몽글 피어나듯 고요히 오래도록 그들의 이야기는 이어진다
정영미 시인 / 산목련, 비밀을 듣다
그녀가 예고도 없이 단단히 뭉친 말씨를 뱉어냈다
그날 이후 누군가를 만날 때면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은 것처럼 다시 뱉어내고 싶은 게 있었다
내 의지와는 달리 삼켜버린 그 말씨가 입 밖으로 역주행할 것 같아 산목련 얼굴빛도 하얘졌다
오랫동안 그녀가 품고 있다가 흘린 것이 내 마음 어디쯤서 싹이 터 올라오는지 자꾸 목이 간지러웠다
산목련도 입이 가려운지 바람에 헛기침을 했다
그녀에게는 내가 깊은 산골짝 어쩌면 산목련 쯤으로 보였던 거다 저 홀로 피었다가 저 홀로 말없이 지는,
들은 비밀이 시시하고 싱거운지 보름달이 귀를 갖다 대면 산목련은 희죽희죽 웃으며 더 하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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