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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우남정 시인 / 오늘의 레퀴엠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5.
우남정 시인 / 오늘의 레퀴엠

우남정 시인 / 오늘의 레퀴엠

 

 

붉은 뿌리를 잘라내고

소금물에 데친 주검을 먹는다

등뼈에 칼집을 넣어 발라 회친 주검을 먹는다

가마솥에 고와낸 흐물거리는 주검을 먹는다

주검은 뜨겁고 달콤하고 비릿하다

 

꽃무늬 접시에 주검을 올린다

주검에 고명을 올린다

마트에서 순교한 죽음들을 세일하고 있다

신선한 주검을 고른다

누군가의 주검을 먹고 누군가의 죽음이 자라난다

 

무덤에 돋아나는 오랑캐꽃

사랑한 것들의 주검에 꽃이 핀다

죽음의 젖을 물고

푸른 상수리 나뭇잎에서 눈물이 반짝 빛난다

 

나는 배가 고프다

네 영혼의 마지막까지 갉아먹고 떠나려, 작정한 듯

 

-시집 『뱀파이어의 봄』 천년의시작, 2022

 

 


 

 

우남정 시인 / 마조히스트

 

나는 찢어지더라도 상자의 입을 봉할 겁니다

침묵이 생기겠지요

편지 봉투가 뜯어질까 나를 덧대는 당신의 버릇을 알아요

나는 투명하여 감쪽같기도 합니다

내 사랑은 편리하고 명랑해요

가성비 갑인 나는 저렴하기까지 해요

당신이 원하면,

악다구니를 감을 수도센티가 또 잘려 나갔어요

틀어막을 수도 있으니까요

가끔은 그런 라이트를 즐기기도 한답니다

상자의 길이보다 조금 더 길게

18센티가 또 잘려 나갔어요

통증을 즐기는 거, 불구적 사랑이라고 말하지 말아요

당신은 버번이 나의 시작을 찾지 못해 허둥대곤 하지요

손끝으로 천처히 나를 긁어 주세요

내 몸은 온통 맑은 성감대

나를 마조히스트라고 부르기를 즐기는 이들도 있지만

사용 설명서가 없는 것이 통례입니다

일회성이라고 불러도 어쩔 수 없지만

나를 뜯어낼 때 당신의 입술도 함게 뜯겨 나갈지 몰라요

우리의 비명은 치명적이죠

당신이 상자에 무엇을 담고 꺼내는지 몰라요

다 벗겨진 뒤에 나는 버려진다는 걸 알 뿐이죠

- 시집 <뱀파이어의 봄>, 천년의 시작, 2022.

 

 


 

 

우남정 시인 /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생각

 

 

 책꽂이를 또 하나 사야 할까

 표지를 보고 목차를 훑고, 책상 위에 책이 쌓여간다

 그 위에 또 그 위에

 해가 지고 저녁이 오고 나는 침침해졌다

 

 읽지도 버리지도 못하는 책을 책꽂이로 옮긴다 또 앃인다 읽다 만 책들이 늘어간다 다시 읽고 싶은 페이지에 포스트잇을 붙인다 행간의 어디쯤에서 길을 잃는다 접어놓은 모서리에 쥐가 난다 책 제목이 버킷 리스트처럼 줄지어 꽂혀있다 백년의 고독*을 다시 읽을 확률은 얼마일까 수십 년 한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은 매일 읽어도 어렵다 정독한 척하지만 대부분은 오독이다 시집 속에서 시인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시인의 이름에 포스트잇을 붙인다 수박은 없고 수박 겉핥기가 있다 빠르게 스쳐가는 것들, 눈 맞출 사이 없이 꽃이 진다

 

 책을 버릴 수 없다는 것은 굳어진 생각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저녁

 

 누구라도 제대로 사랑해 본 적 없는 것 같아, 밤이 쌓인다

 

 멀어져 가는

 그를 불러 세우고 보니 낯선 사람이 돌아본다

 

*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198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미당문학』 2023-상반기(15)호

 

 


 

 

우남정 시인 / 전성시대

 

 

내 이름은 옥자구요 동생은 월잡니다

동생은 늘 이렇게 말했죠

월자가 뭐야, 매월이나 월매라고 짓지

 

칠팔십 년대 드라마 속에는

작부나 식모 이름에 옥자라는 이름이 흔했어요

'옥자야! 먹물 따고 한 접시!'

저녁을 준비하는 나를 향해 이렇게

이죽거리는 남편에게

영자와 순자의 전성시대를 모르나

친절한 금자씨*의 전성시대도 있었어

맞받아치곤 했죠

옥자의 전성시대도 곧 올 거라고 말이예요

 

유학까지 다녀오신 할아버지께서

손녀의 이름을 고심하시다가

귀하게 되라고 지어주신 구슬 玉 아들 子

자 돌림 시대를 증언하는 아픈 이름 옥자입니다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냐구요

오랑캐꽃 애기똥풀 여우오줌 며느리밑씻개

모두모두 순하고 향기로운 이 땅의 풀꽃들이잖아요

 

봉제공장 미싱 앞에, 시장 난전에, 저문 들녘에

억척스레 피어난

지금 이 땅은 말자 숙자 경자 미자 춘자의 정성시대랍니다

 

*영화의 제목

 

- 계간 《시마(詩魔)》 제9호 (2021.9) 가을 신작시'에서-

 

 


 

 

우남정 시인 / 나비처럼 잠들다

 

 

겨울이 한걸음 빨라졌습니다

그 걸음에 맞춰 옷가지들을 정리합니다.

 

재킷과 블라우스, 몇 개의 스커트와 바지

한철을 연출한 가난한 소품들

곤곤함이 배어든

유행과 거리가 먼 그럼 옷들입니다

 

해를 넘기며 더러는 허리를 늘리고

단추를 옮겨 달고

어울리지 않을 것들과 섞여

시간을 견딘 것들

몇 가지는 솎아 내고 갈무리합니다

 

다시는 입을 것 같지 않은데

끝내 버리지 못하는 오랜 슬픔이 있습니다

올해도 우두커니 옷장에 서 있었어요

만지작거리자, 손끝에서 온기가 피어납니다

 

소매 끝에서 가만히 번져오는 모과 향기

사드락사드락 첫눈 내리는 소리

손발 시린 쓸쓸함도

곱게 접어 상자에 넣었습니다

 

두 소매를 가지런히 앞으로 모은 채

허리를 반으로 접은 보랏빛 재킷 한 장이

나비처럼 잠들었습니다

 

-『세계일보/박미산의 마음을 여는 시』2022.12.05.

 

 


 

 

우남정 시인 / 줌(Zoom)

 

 

횡단보도 저쪽에서 걸어오는 한 남자, 낯익다

나를 지나쳐 빠르게 카운트 다운하는 신호등을 바라본다

어디서 스친 적이 있나

끌어당긴 그의 잔상을 인파에 놓쳐버렸다

 

다가온 것이 흔들리다 또렷해질 때

나비의 발자국이 머문 꽃술, 꽃받침의 솜털까지

소름 돋는 섬세한 표정

한 장의 세밀화에 음영陰影이 깊어지는, 숨 막히는 매혹이다

 

찰칵! 꽃 하나

사각의 프레임 속에 갇히고, 그예

끌려간 탄력만큼 천천히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눈동자

한 발짝 한 발짝 초점 흔들리며 꽃이 번진다

 

내게 왔던 것들은 그렇게 멀어져 갔다

 

내 안의 수많은 뷰파인더를 뒤적거리다

희미해지는 그림자를 오래 지켜보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쯤

흐린 배경을 뒤로하고 홀연 도드라져 빛나는 피사체

진경은 적막한 심상에 맺히는지

나는 서둘러 그 순간을 박제하는 것이다

 

행성들이 운행을 계속하며 다가왔다 멀어져 가고

누군가는 천년을 돌다 부딪쳐 불꽃처럼 사라지기도 한다

나는 아득한 거리에서 오고 있는 풍경을 기다리며

가뭇하게 지평선 끝으로 사라지는 너를

막 배웅하는 중이다.

 

 


 

 

우남정 시인 /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마디에 마디를 잇는다

마디의 옆구리에서 길을 꺼낸다

그 끝에 빨간 페디큐어를 칠한 발가락이 달렸다

 

게발선인장 마디를 따서 흙에 꽂았다

잘린 자리에 생장점이 있다니

뿌리 내린다는 말이 어찌나 깜깜한지

 

모래밭에 부화한 새끼 거북이

온힘을 다해 바다로 기어가다, 멈춘 듯했다

 

고작 내가 한 일이라곤

등 터지도록 물 먹이

소금 뿌린 듯 따가운 볕에 말리는 것이었다

 

서툰 주술도 주글거렸다

뿌리 내린다는 말이 얼마나 막막한지

한 조각이 죽은 듯 엎드린 시간

 

마디에서 마디가 나고 마디가 다시 마디를 내밀어 마디를 이어가고

그 마디 끝에 붉은 꽃 한 송이 매달 때까지,

사막에 뿌리내리는 일

 

햇볕에 빛나는 것은 파편(破片)의 모서리

 

상처에서 흰 마디를 꺼낼 때까지

가마우지 떼의 먹이가 되지 않고 바다에 이를 때까지

 

*구지가

 

-반년간 《시인하우스> 2024 상반기

 

 


 

우남정 시인

1953년 충남 서천 출생. (본명 우옥자). 경희사이버대학 미디어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8년 『다시올文學』 신인상 수상, 2018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시집  『구겨진 것은 공간을 품는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저녁이 오고 있다』 『뱀파이어의 봄』. 제16회 김포문학상 대상 수상. 《매일신문》 시니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