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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명춘 시인 / 고해성사
태어나
말을 배우고 난 뒤부터
저는
사실대로
진실대로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것이 태어나
말을 배운 뒤
처음으로
사실대로
진실대로
말한 것입니다
함명춘 시인 / 둑길
또 갈 곳 잃어떠도는 나뭇잎이랑, 꼭 다문어둠의 입속에 있다 한숨처럼쏟아져 나오는 바람이랑, 상처에서 상처로뿌리를 내리다 갈대밭이 되어버린적막이랑, 지나는 구름의 손결만 닿아도 와락 눈물을쏟을 것 같은 별이랑, 어느새잔뿌리부터 하염없이 젖기 시작하는풀잎이랑, 한 줌의 흙 한 그루의 나무 없인 잠시도 살 수 없는 듯 어느 결에 맨발로 내려와 둑길을걷는 달빛이랑
함명춘 시인 / 누구나 죽으면 王이 된다
살아서 한 획을 그었던 그가 흙바닥에 몸을 눕히자 세상이 숨을 죽이고 비로소 글자가 완성되었다
함명춘 시인 / 보름달이 뜨기 전에*
총이 필요하다 보름달이 뜨기 전에 총이 필요하다
보다 진전된 민주주의와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총이 필요하다
보름달이 뜨기 이틀 전 늦어도 내일까지는 총이 필요하다
보름달이 뜨는 날 세상 모든 악의 근원을 파묻을 구덩이를 파놓았다
총이 필요하다 땅속 깊이 폭력을 파묻고 그 위에 굳건히 평화의 탑을 세울
총이 필요하다 지구상의 철기시대를 종식시킬 총이 필요하다
*이 글은 영화 〈총을 든 스님〉을 보고 쓴 것이다
함명춘 시인 / 전생
새는, 나무가 아니었을까 뿌리만 땅을 움켜쥐고 있을 뿐 가지와 줄기와 잎들이 날아오르기 위해 쉼 없이 날갯짓하는
저 팥배나무가 아니었을까
함명춘 시인 / 햇볕의 그림자
햇볕이 나무의 몸을 빌려 그림자를 만드네요 그림자 속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네요 햇볕이 흘린 땀방울 같아요, 눈물 같아요
어쩌면 햇볕에게 이 지구는 고단한 허리를 두드리며 아버지가 몰래 소리 없이 눈물을 쏟고 잠시 쉬었다 가곤 하던 뒤꼍의 헛간 같은 건지도 몰라요
나뭇잎과 새들의 몸을 빌려 햇볕이 또 그림자를 만드네요
-시집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천년의시작, 2020
함명춘 시인 / 정선국수
누군가 흘리고 간 눈물 같다 떨어져 소금은 커녕 한 줌 흙조차 되지 못하고 바람 속으로 사라지지도 못하고 국수가 되어버린 하얀 몸 단맛 쓴맛 매운맛이 다 나는 걸 보면 그 눈물의 주인은 아픔의 산전수전 다 겪어본 사람이라 고춧가루만 뿌려도 금세 빨갛게 동화가 되는 걸 보면 아마 마음도 따뜻한 사람이라 뚝뚝 힘없이 면발이 끊어지는 걸 보면 하나라도 더 주려고 태어난 사람이라 사랑이든 돈이든 누구나 한 번쯤은 다 잃어본사람끼리 모여 우걱우걱 먹어대는 강원도 정선 어느 산골 허름한 국숫집, 그 주인 할멈의 손 같은 사발 속에 가득 담겨 있는 뼛속까지 하얀 몸
함명춘 시인 / 백일홍 수녀
백일홍 곱게 피어 있었지요 광안리 바다 물결 같은 적막이 일렁이는 수녀원 가을비 머금은 두 뺨부터 보였지요 태어나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미소로 맞아주었지요 지난봄부터 상추같이 잘 씻어 놓은 바람 소리, 새소리 잘 깎아서 내놓아주었지요 체하지 말라고 고요 한 잔도 따라 주었지요 고요 한 모금 위에 닿기도 전에 하늘의 구름떡 뚝 떼어서 내 손에 쥐어주었지요 더 주고 싶어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나뭇가지 삼랑진역 지나 대전역 쯤 기차가 쉴 때 쪽잠에서 깨어나서야 비로소 꿈속의 백일홍이 서너 시간 전 뵙고 왔던 수녀님이란 걸 알게 되었지요 기도 속에 나를 담아 두 손 모아 빌어주시던 광안리 바다 물결 같은 적막이 일렁이는 수녀원 아직도 백일홍은 곱게 피어 있겠지요 내 마음속까지 핀 꽃잎들이 함박웃음 지으며 언제라도 날 맞아주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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