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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함명춘 시인 / 고해성사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5.
함명춘 시인 / 고해성사

함명춘 시인 / 고해성사

 

 

태어나

 

말을 배우고 난 뒤부터

 

저는

 

사실대로

 

진실대로

 

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이것이 태어나

 

말을 배운 뒤

 

처음으로

 

사실대로

 

진실대로

 

말한 것입니다

 

 


 

 

함명춘 시인 / 둑길

 

 

또 갈 곳 잃어떠도는

나뭇잎이랑,

꼭 다문어둠의 입속에 있다

한숨처럼쏟아져 나오는 바람이랑,

상처에서 상처로뿌리를 내리다

갈대밭이 되어버린적막이랑,

지나는 구름의

손결만 닿아도

와락 눈물을쏟을 것 같은 별이랑,

어느새잔뿌리부터

하염없이 젖기 시작하는풀잎이랑,

한 줌의 흙 한 그루의 나무 없인

잠시도 살 수 없는 듯

어느 결에

맨발로 내려와

둑길을걷는 달빛이랑

 

 


 

 

함명춘 시인 / 누구나 죽으면 王이 된다

 

 

살아서 한 획을 그었던

그가 흙바닥에 몸을 눕히자

세상이 숨을 죽이고

비로소 글자가 완성되었다

 

 


 

 

함명춘 시인 / 보름달이 뜨기 전에*

 

 

총이 필요하다

보름달이 뜨기 전에

총이 필요하다

 

보다 진전된 민주주의와

평화로운 세상을 위해

총이 필요하다

 

보름달이 뜨기 이틀 전

늦어도 내일까지는

총이 필요하다

 

보름달이 뜨는 날

세상 모든 악의 근원을

파묻을 구덩이를 파놓았다

 

총이 필요하다

땅속 깊이 폭력을 파묻고

그 위에 굳건히 평화의 탑을 세울

 

총이 필요하다

지구상의 철기시대를 종식시킬

총이 필요하다

 

*이 글은 영화 〈총을 든 스님〉을 보고 쓴 것이다

 

 


 

 

함명춘 시인 / 전생

 

 

새는, 나무가 아니었을까

뿌리만 땅을 움켜쥐고 있을 뿐

가지와 줄기와 잎들이

날아오르기 위해

쉼 없이 날갯짓하는

 

저 팥배나무가 아니었을까

 

 


 

 

함명춘 시인 / 햇볕의 그림자

 

 

햇볕이 나무의 몸을 빌려

그림자를 만드네요

그림자 속에 들어가 나올 생각을 하지 않네요

햇볕이 흘린 땀방울 같아요, 눈물 같아요

 

어쩌면 햇볕에게 이 지구는

고단한 허리를 두드리며

아버지가 몰래 소리 없이 눈물을 쏟고

잠시 쉬었다 가곤 하던

뒤꼍의 헛간 같은 건지도 몰라요

 

나뭇잎과 새들의 몸을 빌려

햇볕이 또 그림자를 만드네요

 

-시집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천년의시작, 2020

 

 


 

 

함명춘 시인 / 정선국수

 

 

누군가 흘리고 간 눈물 같다

떨어져 소금은 커녕 한 줌 흙조차 되지 못하고

바람 속으로 사라지지도 못하고

국수가 되어버린 하얀 몸

단맛 쓴맛 매운맛이 다 나는 걸 보면

그 눈물의 주인은 아픔의 산전수전 다 겪어본 사람이라

고춧가루만 뿌려도 금세 빨갛게 동화가 되는 걸 보면

아마 마음도 따뜻한 사람이라

뚝뚝 힘없이 면발이 끊어지는 걸 보면

하나라도 더 주려고 태어난 사람이라

사랑이든 돈이든 누구나 한 번쯤은

다 잃어본사람끼리 모여 우걱우걱 먹어대는

강원도 정선 어느 산골 허름한 국숫집,

그 주인 할멈의 손 같은 사발 속에

가득 담겨 있는 뼛속까지 하얀 몸

 

 


 

 

함명춘 시인 / 백일홍 수녀

 

 

백일홍 곱게 피어 있었지요

광안리 바다 물결 같은 적막이 일렁이는 수녀원

가을비 머금은 두 뺨부터 보였지요

태어나 한 번도 져본 적 없는 미소로 맞아주었지요

지난봄부터 상추같이 잘 씻어 놓은

바람 소리, 새소리 잘 깎아서 내놓아주었지요

체하지 말라고 고요 한 잔도 따라 주었지요

고요 한 모금 위에 닿기도 전에

하늘의 구름떡 뚝 떼어서 내 손에 쥐어주었지요

더 주고 싶어 가만히 있지 못하는 나뭇가지

삼랑진역 지나 대전역 쯤 기차가 쉴 때

쪽잠에서 깨어나서야 비로소 꿈속의 백일홍이

서너 시간 전 뵙고 왔던 수녀님이란 걸 알게 되었지요

기도 속에 나를 담아 두 손 모아 빌어주시던

광안리 바다 물결 같은 적막이 일렁이는 수녀원

아직도 백일홍은 곱게 피어 있겠지요

내 마음속까지 핀 꽃잎들이 함박웃음 지으며

언제라도 날 맞아주시겠지요

 

 


 

함명춘 시인

1966년 강원도 춘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활엽수림〉이 당선되어 문단 데뷔. 시집 『빛을 찾아 나선 나뭇가지』 『무명시인』 『지하철엔 해녀가 산다』. 편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