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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향순 시인 / 착각이 도달하는 곳
차르르싸르르 빗소리 떠돌아다니는 음파를 모두 담아 고음의 채널로 퍼지고 있다 백 년 만의 폭우에 지친 귀가 달려간 천상의 주파수를 삭혀서 나온 매미 울음이었다
추운 겨울 벌벌 떨고 있는 붉은 장미꽃 한 송이를 만난 적 있다 그도 뜻밖의 계절을 만났다 꽃의 착각이었다
아파트 편의점에서 어스름을 굽고 있는 대학생 졸업만 하면 낮달을 맘껏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만 여전히 밤은 뜬눈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그는 정색을 하고 언제나 우리를 속인다 진심어린 표정으로
날개가 없는 나는 수시로 나를 착각한다 내일은 날개가 돋아 하늘을 날아갈 수 있을 거라고
-시집 『목요일에 비가 왔어요』에서
신향순 시인 / 부들2
비스듬한 공기의 어깨와 헐렁해진 허공을 쪼아 개개비는 부들의 숲에 신전을 앉힌다 기우는 것들이 모여들고 그들의 옆구리로부터 여유롭게 놀던 빛들이 흘러나온다
말랑하게 익어가는 오월의 살점이 풀잎에 꿰어진다 그들의 집은 신전 옆에 있다
신이 외출한 사이에 바람이 왔다 부들 90도 달빛 105도 별빛 350도 깜빡이는 밤을 건너고 있다
기울기는 달라도 오늘을 건너는 것들은 모두 온기로 뭉쳐 있다
숲이 일어서는 시간 기울어지지 않는 우리의 심장은 몇 그램일까?
개개개 개개비의 집에는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 무성하다
신향순 시인 / 목요일에 비가 왔어요
얼마나 먼 곳에서 오는 길인지 비의 걸음이 바빠요
듬성듬성 마른 가지가 보이고 조금씩 야위어가던 하늘이 가지 사이에 끼어 있지요
오월 볕에 웃자란 시간이 빛 바랜 장미넝쿨을 붙잡고
드디어 비가 와요 옹색했던 누군가는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고 메마른 수요일을 지우고 있어요
고층을 오르내리는 사다리차는 빗속에서 휘청거리며 짐을 나르고 있어요
담장 위 붉은 꽃잎이 빗소리에 흩어져 땅을 물들이고 있어요
늘어진 가지를 조심조심 빵끈으로 묶었어요
이제 낡고 닳은 나의 어느 지점에 탐스런 꽃이 필 것 같아요
신향순 시인 / 빨래집게
그에게 유일한 안식 바지랑대 치켜세운 허공에 거꾸로 매달려 햇볕에 낡아가는 것
숙이네 아배가 돌아가셨을 때도 옥상들마루를 가로지르는 빨랫줄에 별똥별을 매달았다
마당 드나드는 조문객들은 눈물을 몰래 빨랫줄에 집어두고 사라졌다
아배는 하늘로 올라가다가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삼베 조각 하나 걸어두고 갔다
밤이면 무수한 별들이 내려와 펄럭이는 옷자락을 어루만졌다
새벽을 배회하던 어떤 것들은 아침이 되어도 외줄 위를 함께 서성거렸다
신향순 시인 / 낡은 소파와 노파
더 이상 누구도 담을 수 없는 저녁 느슨해진 소파는 속절없이 문밖으로 밀려나갔다
마당 한편에서 매화꽃이 하얗게 폭죽을 쏘아 올리고 기억이 다 날아가 버린 노모의 둔부를 받아주던 그였다 한때는 넓은 가슴으로 지루한 하루를 품어주던 그가 경계 없이 기대던 그녀를 담 너머로 바라보며 매화꽃 속으로 지고 있었다
다시 봄이 오고 늘어지는 뱃가죽을 어찌할 수 없을 무렵 그녀는 안간힘으로 주먹을 꼭 쥐었던 손을 스르르 풀었다
붙박이처럼 매달려 해바라기 하던 그림자도 폭죽 속으로 날아올랐다 스며든 눈물자국엔 딱지가 앉았고 기분 좋은 날의 커피 지문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체취만 남겨놓고 그는 분리수거차에 실려 가고 있다
신향순 시인 / 임종
꽃이 피는 봄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숨소리가 점점 여려지고 입을 달싹이는 심장에 귀를 대도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한때 뜨거운 용광로였던 당신 이제 거의 사위어가는 연탄 한 장의 온기만 남았습니다 당신이 점점 지워지고 있습니다
나는 마지막 인사를 당신의 손에 쥐여 드립니다 잘 가세요 어머니
그 곱던 손이 뼈가 앙상하고 힘줄이 도드라진 손에는 실반지 하나 임종을 지키고 있습니다
신향순 시인 / 허공을 잡고 사는 것들
전봇대 허리춤 허공 한 줌 버무려 피튜니아가 매달려 있다
화려한 유화 한 점 덕지덕지 붙은 광고 전단지 테이프 자국 사이 전신주 동여매고 한 계절 아슬아슬하다
우리 아파트 높다란 바벨탑 옥상에서 늘어진 밧줄이 흔들릴 때마다 새롭게 채색되어 번져가는 벽면 가느다란 줄에 생의 푸른빛이 매달려 얼룩지고 있다
화려하지만 또, 화려하지 못해서 허공을 잡고 살아야 하는 것들의 공통점은 외줄에 매달려 있다는 것
그렇게라도 매달릴 내 생의 외줄이 아직 내게 있어 나는 지금도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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