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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봉덕 시인 / 고분을 먹다
지붕에 앉아 식사를 하는 중이다 그가 가꾸어 둔 푸성귀 반찬에 큰 잎사귀에 농담을 섞어 싱거운 국처럼 먹는다 담 넘은 낮달처럼 발소리 죽이지 않고 참으로 즐거운 저녁을 먹는다
집주인은 천년이 지나도록 달콤한 잠에 빠져있는 것이다 가끔 누군가 집 옆구리를 헐어 바람이나 달빛이 새어 들다가도 촘촘히 채워지는 어둠으로 긴 잠을 잔다
순환열차같이 벚꽃은 피었다지고 한 번씩 도굴당한 달은 다시 뜨고 집 위에 집이 포개지기도 한다
집 주위를 걸어가는 저 사람은 손자의 손자의 서른 번 째 후손 일찌도 모른다 그러니까 그가 지나가는 후손을 불러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이는 것이다 부풀어 오른 젖가슴 같은 소반에서 우린 그와 함께 밥을 먹었던 것이다
집들이 계획도 없이 세워지고 무너지듯 오래된 잠 곁으로 아파트가 자란다 그 층층의 집에서 우린 밥을 먹고 잠을 자고 그 무덤위로 수많은 계절이 천천히 지나갈 것이다
강봉덕 시인 / 바다도서관
동해바닷길, 국도 31번, 강동 산하해변 그곳엔 파도소리가 모래를 일으켜 세운 바다를 닮은 바다도서관이 있다
주상절리 같은 낡은 책들이 드문드문 꽂혀있고 파도소리가 전집으로 쌓여있는 곳 인근 분교 일학년만 몰려와도 만석이 되는 조그만 열람실 일찍 날아온 갈매기가 문 열었다가 수평선이 완전히 사라지면 사람들은 떠나지만 그제야 적막한 바다가 정박하는 곳
어두워지면 몽돌이 바다에게, 바다가 물고기에게 책 읽어 주는 소리 물결무늬로 번진다 매일 밤 이곳에 찾아 와 짜디 짠 귀 열어두는 강동바다가 더 맑고 푸른 이유는 책 읽는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난, 파랑주의보가 내리는 날이면 바다도서관으로 출근하여 폭죽처럼 터지는 바다를 열람한다
강봉덕 시인 / 고양이가 골목을 읽다
담장 위, 어둠처럼 천천히 밀려와 난간에 쪼그려 앉아 두꺼운 골목을 읽는다 골목은 어둠을 한 겹씩 쌓으며 자서전을 엮는다 두 손에 침 바르며 곰곰이 책을 읽는다 잔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땀 절은 작업복을 읽는다 거북이 등짝 같은 학생이 넘어지고 대리운전 차량이 황급히 떠나고 껌을 찍찍 씹는 하이힐이 어둠속으로 들어간다 발라진 생선같이 흐릿해지는 날이면 집나간 발자국이 불켜진 방을 들여다보곤한다 가끔 욕지거리 같은 찌그러진 냄비가 날아오는 것은 문간방 일용직 김씨가 독서를 방해하는 것이다 어둠을 배경으로 책이 한 뼘씩 자라면 그는 둥근 수염을 펼쳐 하루의 깊이를 가늠한다 어두워도 맑은 문장을 만날 수 있다는 듯 매일 밤 혀로 어둠을 닦는다 긴 하품을 하며 꼬리 같은 부록을? 읽을 즈음 눈 밝은 청소부는 먹다남긴 간식을 수거해 가고 눈 어두운 하나님은 책을 읽기위해 둥근 램프를 골목에 걸어둔다
강봉덕 시인 / 실비도*
파도소리가 들린 후, 난 귓속에 물고기를 키운다
백가지 이름을 가진 물고기들 소리가 아닌 모양으로 말한다 입과 입이 서로 엇갈리고
날카로운 파도가 높아질 때마다 오른쪽과 왼편의 깊이가 다른 바다를 풀어 놓고
둥근 식탁에 앉아 사라진 내 귀를 먹어 치운다
파도소리 잦아들면 귓속을 빠져나가는 물고기들
한 무리의 물고기가 수평으로 건너간 후 기억이 지워진 채, 뼈만 남은 내 입이 바닥을 뒹군다
난, 밤새 흩어진 내 귀를 줍고 있다
* '휘파람 소리'라는 뜻을 가진 스페인어
-시집 『화분 사이의 식사』(실천시선, 2018)
강봉덕 시인 / 꿈은 붉은빛이다
꿈과 붉은빛은 근친이다 절실한 꿈일수록 붉은빛에 가깝다 태초 하늘이 처음 눈 떴다, 감을 때 온통 붉은빛으로 물든 세상 붉게 물든다는 건 꿈을 키운다는 것이다 길은 몸을 열려고 붉은빛 허공에 걸어둔다 지구를 향해 끝없이 추락하는 둥근중력 화살촉에 제 가슴을 내어준 사과의 눈빛, 모두 붉은빛이었다는 사실. 눈 밝아지려 태초의 여자가 훔친 것도 과일이 아니라 붉은빛이다 어느 날 아침 딸아이의 몸에 붉은빛 비친다고 축하해 주라며 활짝 열린 아내의 입술이 붉다 빛이 갈라지면서 꿈도 흩어진다 흩어졌다고 타오르지 않은 꿈 없다 창백하게 걸린 저 초승달도 한땐 붉게 타 올랐다고, 꿈을 기억한다고 뜨겁게 덴 가슴의 흔적 보인다 애초부터 붉은빛이 꿈이다
-시집 『화분 사이의 식사』(실천시선, 2018)에서
강봉덕 시인 / 흉터 마음을 뺏긴 최초의 일은 손의 일이었다 얼굴을 지우는 방법이 궁금했지만 이제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귓불 붉은 사람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도시의 숲에 혼자 갇혔다 숲을 뛰쳐나온 새들은 어디로 향할까 흉터가 흉터를 덮거나 엄지손가락이 집게손가락을 문지르는 일은 울음과 웃음의 반복과 무관했다 생각하는 자세로 생각하지 않는 여자 계속 빼도 계속 태어나는 생각 오랫동안 같은 곳을 바라보면 사라질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이 되돌아오는 것이 있다 귓볼이 붉어지는아이를 본다 베어낸 나무 주위에 나무가 돋아 숲이 된다 가장 짙은 그늘을 집게로 걷어내면 새의 얼굴이 된다 내가 만든 내 얼굴을 들여다본다 가끔 깨지지 않는 허공처럼 단단한 얼굴에 점을 그려 넣는다 기다리다 지친 것의 마지막 날엔 날개가 생긴다고 한다 가끔 수많은 흉터가 얼굴에 생긴다면 우린 다시 미로 같은 숲에 온전히 갇힐 수 있을까 나는 도착할 수 없는 목적지에서 이정표 지우는 일을 반복했다 -월간 『모던포엠』 (2023년 6월호)
강봉덕 시인 / 달려라, 기차
그는 달리는 종족이다 달리는 것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한 방식이 된다 오늘도 푸른행성의 길목을 질주한다 태어나고 죽는 것은 그가 달려가는 속도와 내가 걸어오는 시간이 먼 행성에서 우연히 겹쳐지듯 다가오는 것이다
안착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는 발이 없다 어느 행성에 슬쩍 멈추고 싶을 땐 길 위를 벗어나 평행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달리는 것이 숙명이라는 듯 꼬리를 자르고 도망친다 그때마다 그는 긴 울음만 한 번씩 들려줄 뿐, 어둠속을 질주하는 것은 독버섯 같은 이중성. 운명은 얼음처럼 뜨겁다
성운에서 태어나 성운으로 돌아가는 그와 난 유연관계다 나는 가끔 그에게 접붙이고 싶다 질주하는 그에게 올라타고 싶어질 때가 있는 것이다 우주 안에 들어 있던 별똥별이 힘껏 내달린다, 되돌릴 수 없는 시간
지금 먼 행성을 달려가는 그가 탈선하려는지 기웃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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