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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증식 시인 / 구지뽕차
차의 재료가 구지뽕이란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뽕나무란다
당뇨 든 형을 위해 한 곽 샀다
어릴 적 누에방에 누워 듣던 뽕잎 갉아먹는 소리 우수수, 어머니 한숨에 실려오던 그리운 빗소리 같은
더러는 옷에 붙어 학교까지 따라오기도 했던 누에
당뇨에 특효가 있다니 착착 비단 실꾸리 풀어 외풍없는 집 한 채 지어라 고단한 우리 형 몸에
고증식 시인 / 달처럼
마음에 비 내린다고 어디 달빛 없으랴
사막을 건너는 늙은 낙타의 등에도 달빛
기울면 기우는 대로 차오르면 차오르는 대로
고증식 시인 / 어느새
오늘도 화제는 결국 그리로 돌아갔다. 대학에서 독신으로 늙어온 선배가 평생 홀어머니 모시고 산 얘기를 한다 아흔 넘어 이젠 치매까지 수십 년 간병으로 일흔을 바라보는 선배 어느 날은 똥 묻은 기저귀 숨기는 엄마 자기도 모르게 그 머리통 쥐어박고는 밤새 잠 못 들고 울었다는 사슴 같은 눈망울 금세 또 물드는 그녀 갑자기 엄마 정신줄 반짝 돌아와 '너무 그러지 마라고, 나름 내 너한테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지 아냐고' 그 말 듣고 밤새 또 가슴 쳐댔다는 그녀 그때 누군가 불쑥 그건 그래도 낫다고 구십 넘긴 우리 양친 너무도 정정하여 세금 끝다리까지 일일이 따지고 산다고 같이 늙어가는 아들 며느리 제쳐두고 얼마나 고역인 줄 아냐고, 살다 살다 세상에 나 같은 혈혈단신이 부럽단 소릴 다 들어보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창밖엔 밤하늘 내리고 어느새 한 발 한 발 우리 그 자리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만 어둠 속에 또렷이 빛날 뿐
고증식 시인 / 밤길
당신 살아계실 때 제게 늘 이르셨지요 바람 센 골목 어귀에서나 노가리 몇 마리로 소주병 때려눕힐 적에도 온몸을 던져 사랑하는 일이며 사람으로 살고 사람으로 죽는 일이며 밤새는 줄 모르셨지요
아쉬운 술잔 앞에 두고 불효자는 웁니다로 마지막 목메시더니 차마 돌아서는 발걸음이 안 떨어져 몇 번씩이나 바래다주마 서로의 집을 오가곤 하셨지요
이제 당신도 떠나고 혼자 취해 걷는 어두운 들길에서 아무리 고쳐 생각해 봐도 그게 사람 사는 길이었지요
-시집 [환한 저녁] (2000)
고증식 시인 / 내 귀에 복면을 씌우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데 부엌에 있던 아내가 쪼르르 달려와 들어보라고, 내 귀에 갖다댄 불 담긴 쌀바가지 속, 쌀 붙는 소리는 들릴 듯 말 듯 잘 들리지 않았네
안 들려요? 안 들려. 안 들린단 말예요? 안들려. ・아,아, 들려, 조금씩 들려 짜글짜글 뽀글뽀글 무려 30년이 넘도록 쌀을 불렸지만 처음 들어본다는 그 소리...............
그래, 그 방면의 전문가가 30년 만에 들었다면 난 거의 공짜로 들은 셈인데 아예 들은 체도 알은 체도 말아야지..... 마른 쌀 붇는 저 세미한 소리 우리 식구들 살리는 소리 아닌가 첫아이 임신했을 때 아내 뱃속에서 들릴 듯 말듯 들리던 태동처럼!
하여간 당신 덕분에 안복(眼福)을 누렸으니 이젠 세상의 모든 큰소리들을 거절하리. (대개 큰 소리들은 생명을 죽이는 소리이니!) 그리고 큰 소리만 잘 듣던 내 귀에 복면을 씌우고, 들릴 듯 말 듯 세미한 소리에 징검다리를 놓으리. : <물 담긴 쌀바가지 속, 쌀 붇는 소리> 들어본 적이 있는가? 밥짓는 솥에 쌀 앉히기 전, 마른 쌀을 불에 담가 촉촉하게 불리는데, 그 쌀들이 불어나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그 작은 소리, 생명을 살리는 소리에 귀기울이기 위해 <내 귀에 복면을 씌우고>이면, '복귀'라는가?
고증식 시인 / 불현듯
소나기 쏟아져 내린다 엉거주춤 빗길 나서려는데 불쑥 다가와 우산을 받쳐주는 손 똥그래진 눈으로 돌아보자 배시시 반달눈 하나 곁에 떠 있다 도착해보니 그의 한쪽 어깨도 젖어 있다 말 한마디 없이 우리 서로 빗줄기 나눠 맞은 날
고증식 시인 / 그때 그대로
스무 해 훌쩍 지나 시장통 걷는다 그때 그 할머니 지금도 할머니인 채 그때 그 술잔 내놓는다 그때처럼 주문하면 바로 시장 봐다가 파전 부치고 생선 굽는다 메뉴판도 인정도 그때 그대로 하긴 뭐 이십 년 세월쯤이야 저기 저 밀양상회 할매 어물전 오십 년 저기 저 시장식당 할매국밥집 사십 년 여기저기 더하면 천 년도 훌쩍이라지 허기진 가슴들이여 이리로 오시라 먼저 가신 어매아배 장마당 나와 있고 흘러간 그때 그대로가 여기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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