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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증식 시인 / 구지뽕차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4.
고증식 시인 / 구지뽕차

고증식 시인 / 구지뽕차

 

 

차의 재료가 구지뽕이란다

굳이 이름 붙이자면 뽕나무란다

 

당뇨 든 형을 위해 한 곽 샀다

 

어릴 적 누에방에 누워 듣던

뽕잎 갉아먹는 소리

우수수, 어머니 한숨에 실려오던

그리운 빗소리 같은

 

더러는 옷에 붙어 학교까지 따라오기도 했던

누에

 

당뇨에 특효가 있다니

착착 비단 실꾸리 풀어

외풍없는 집 한 채 지어라

고단한 우리 형 몸에

 

 


 

 

고증식 시인 / 달처럼

 

 

마음에 비 내린다고 어디

달빛 없으랴

 

사막을 건너는

늙은 낙타의 등에도 달빛

 

기울면 기우는 대로

차오르면 차오르는 대로

 

 


 

 

고증식 시인 / 어느새

 

 

오늘도 화제는 결국 그리로 돌아갔다.

대학에서 독신으로 늙어온 선배가

평생 홀어머니 모시고 산 얘기를 한다

아흔 넘어 이젠 치매까지

수십 년 간병으로 일흔을 바라보는 선배

어느 날은 똥 묻은 기저귀 숨기는 엄마

자기도 모르게 그 머리통 쥐어박고는

밤새 잠 못 들고 울었다는

사슴 같은 눈망울 금세 또 물드는 그녀

갑자기 엄마 정신줄 반짝 돌아와

'너무 그러지 마라고, 나름 내 너한테

얼마나 최선을 다하는지 아냐고'

그 말 듣고 밤새 또 가슴 쳐댔다는 그녀

그때 누군가 불쑥

그건 그래도 낫다고

구십 넘긴 우리 양친 너무도 정정하여

세금 끝다리까지 일일이 따지고 산다고

같이 늙어가는 아들 며느리 제쳐두고

얼마나 고역인 줄 아냐고,

살다 살다 세상에 나 같은 혈혈단신이

부럽단 소릴 다 들어보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창밖엔 밤하늘 내리고

어느새 한 발 한 발

우리 그 자리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만

어둠 속에 또렷이 빛날 뿐

 

 


 

 

고증식 시인 / 밤길

 

 

당신 살아계실 때

제게 늘 이르셨지요

바람 센 골목 어귀에서나

노가리 몇 마리로

소주병 때려눕힐 적에도

온몸을 던져 사랑하는 일이며

사람으로 살고 사람으로 죽는 일이며

밤새는 줄 모르셨지요

 

아쉬운 술잔 앞에 두고

불효자는 웁니다로

마지막 목메시더니

차마 돌아서는 발걸음이 안 떨어져

몇 번씩이나 바래다주마

서로의 집을 오가곤 하셨지요

 

이제 당신도 떠나고

혼자 취해 걷는 어두운 들길에서

아무리 고쳐 생각해 봐도

그게 사람 사는 길이었지요

 

-시집 [환한 저녁] (2000)

 

 


 

 

고증식 시인 / 내 귀에 복면을 씌우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있는데

 부엌에 있던 아내가 쪼르르 달려와 들어보라고, 내 귀에 갖다댄 불 담긴 쌀바가지 속, 쌀 붙는 소리는 들릴 듯 말 듯 잘 들리지 않았네

 

 안 들려요? 안 들려. 안 들린단 말예요?

 안들려. ・아,아, 들려, 조금씩 들려 짜글짜글 뽀글뽀글 무려 30년이 넘도록 쌀을 불렸지만 처음 들어본다는 그 소리...............

 

 그래, 그 방면의 전문가가 30년 만에 들었다면 난 거의 공짜로 들은 셈인데

 아예 들은 체도 알은 체도 말아야지..... 마른 쌀 붇는 저 세미한 소리 우리 식구들 살리는 소리 아닌가 첫아이 임신했을 때 아내 뱃속에서 들릴 듯 말듯 들리던 태동처럼!

 

 하여간 당신 덕분에 안복(眼福)을 누렸으니

 이젠 세상의 모든 큰소리들을 거절하리. (대개 큰 소리들은 생명을 죽이는 소리이니!) 그리고 큰 소리만 잘 듣던 내 귀에 복면을 씌우고, 들릴 듯 말 듯 세미한 소리에 징검다리를 놓으리.

:

 <물 담긴 쌀바가지 속, 쌀 붇는 소리> 들어본 적이 있는가?

 밥짓는 솥에 쌀 앉히기 전, 마른 쌀을 불에 담가 촉촉하게 불리는데,

 그 쌀들이 불어나는 소리가 난다는 것이다.

 그 작은 소리, 생명을 살리는 소리에 귀기울이기 위해

 <내 귀에 복면을 씌우고>이면, '복귀'라는가?

 

 


 

 

고증식 시인 / 불현듯

 

 

소나기 쏟아져 내린다

엉거주춤 빗길 나서려는데

불쑥 다가와 우산을 받쳐주는 손

똥그래진 눈으로 돌아보자

배시시 반달눈 하나 곁에 떠 있다

도착해보니

그의 한쪽 어깨도 젖어 있다

말 한마디 없이

우리 서로 빗줄기 나눠 맞은 날

 

 


 

 

고증식 시인 / 그때 그대로

 

 

스무 해 훌쩍 지나 시장통 걷는다

그때 그 할머니 지금도 할머니인 채

그때 그 술잔 내놓는다

그때처럼 주문하면 바로 시장 봐다가

파전 부치고 생선 굽는다

메뉴판도 인정도 그때 그대로

하긴 뭐 이십 년 세월쯤이야

저기 저 밀양상회 할매 어물전 오십 년

저기 저 시장식당 할매국밥집 사십 년

여기저기 더하면 천 년도 훌쩍이라지

허기진 가슴들이여 이리로 오시라

먼저 가신 어매아배 장마당 나와 있고

흘러간 그때 그대로가 여기 있으니

 

 


 

고증식 시인

1959년 강원도 횡성 출생. 충남대학교 국문과 졸업. 1994년 『한민족문학』 4집으로 시문단에 나옴. 시집 『환한 저녁』 『단절』 『하루만 더』 『얼떨결에』. 시평집 『아직도 처음이다』 등이 있음. 1988년에 밀성제일고 재직 중. 밀양문학회장, 한국작가회의 이사 등을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