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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노승은 시인 / 극한 오후​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4.
노승은 시인 / 극한 오후

노승은 시인 / 극한 오후

 

 

마주보지않았다

각각의빗소리

각각의무늬

함께있어도

각각의비가내리고

각각의슬픔은틈이없다

한때뜨거웠던것이무슨힘이된다고

몰아붙이는힘에

휩쓸리지않으려면

지붕을버리거나

이별로빠르게대피해야한다

그렇게길지않을거야

쏟아지는당황들

아주짧게치고빠진다

살짝공중부양도할수있을거야

새로운이름을갖는것이처음이라면

아주둔중하고고립된이름

방향은구름만알겠지

비비비비비비비

우리는각자

박쥐우산을펴거나접거나

 

 


 

 

노승은 시인 / 별일 없는

 

 

버스에서 손톱 깎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버스는 멈춘다

아니에요아니에요 거스러미예요

여자는 시침을 떼었지만

바닥에는 초승달 몇 개 흩어져 있다

 

초승달이 걸린 공원에는 한 방향으로 걷는 무리가 있고

붉은 달

다른 방향으로 주먹을 쥔다

 

커피를 기다리며 울음을 참는 사람은

주먹으로 두 눈을 꾹꾹 누르고 있다

커피는 아직이고 뜨겁고

나는 여전히 쓰고 당신은 작은 거짓말

 

한번 어긋난 약속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거짓말 위에 거짓말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악을 쓰지만

대개는 그럴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난다

 

사랑이 오래전에 끝났어도

헤어지는 일은 최근이다

물 위를 걸은 귓속말이 내게 오기 전 다정하게 가라앉는다

 

부표를 걷어낸다

가라앉은 말들은 떠오르지 않는다

지켜지지 않겠지만

별일 없는 다음이 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6월호 발표

 

 


 

 

노승은 시인 / 여름 투병

 

 

여름을 일주일 내내 듣는다

 

언젠가 들을 수 있는 귀가 생길 거야

 

CT실은 지하에 있었다

작은 소용돌이에 누우면

절대로 움직이지 마세요

뜨거워집니다

아랫도리가 캄캄하게 붉어졌다

 

23일째 두통은 열대야를 만들고

 

아직도 쫓기는 꿈

기차를 타야 하는데

늦겠다고, 미안하다고 전화해야 하는데

 

타이머가 고장 난 선풍기는 잠을 헤집고

째깍째깍

 

깊은 잠은 6분을 넘기지 못한다

조영제는 어디쯤에서부터 번지고 있는지

 

감은 눈과 생각 사이에 있는 흑백의 길

 

그림자가 없는데

나는 왜 자꾸 넘어지는 걸까

 

아무것도 모르면서

진료실 앞에 앉아 호명을 기다린다

수납이 먼저인지

진료가 먼저인지

여름이 먼저인지

 

 


 

 

노승은 시인 / 눈물의 색깔

오늘 꼭 읽어야 하는 구름을 펼쳐놓습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어젯밤 일입니다

어느 방향에서도 들이치지 않는 문장들을 읽어냅니다

당신의 소식은 어디에서 멈췄습니까

내 눈물의 색깔은 아무래도 파기破棄입니다

자세의 결함으로 오래도록 비가 내립니다

미리 새겨 두었던 마음이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습니다.

화창한 사거리에서 만나자고 했던 화요일입니다

 

 


 

 

노승은 시인 / 염천

 

숲에는 온통 모텔만 있었네

있었다고 기억하네

내 손목을 잡고 뛰어들고 싶어

당신 뒷덜미는 번들거렸네

한 번만 내 눈을 봐줬으면 한 번만 내 형편을 봐줬으면

당신의 맹목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바싹 타버린 장미 넝쿨 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싶었네

환한 그늘을 캐서 꽝꽝한 불볕을 가두고 싶었네

수포로 차오르는 손목을 자르고 싶었네

보채기만 하는 당신의 전전긍긍은 끝내 방을 찾지 못했네

꽃들의 이름과 왕국의 이름을 가진 방들은

두꺼운 커튼을 내리고 문을 닫아걸었네

무기력하게 주저앉은 눈물을 모른 척했네

여름이었고 한낮이었네 방을 찾지 못한 당신과

질질 끌려가던 나의 애원 중 어느 쪽이 더 비극적이었을까

지금도 알지 못하네

그날, 숲에 두고 온 손목 하나가 아직도 시큰하네

문고리를 잡고 흔들던 당신이

돌아서서 나를 보고 있네

 

 


 

 

노승은 시인 / 면역되지 않는

 

스타킹 한 짝이

대기실 의자에 허물어져 있다

자꾸 미끄러지는 몸을 세우는 여자

색채 없는 몽유 속에서도

꽃무늬 치마를 추스른다

침대에 누워

발끝에 모아지는 힘의 크기를 생각한다

긴장하지 마세요

무표정으로 모든 질문이 동의된다

친절은 초소형 렌즈를 따라

피어나는 종이꽃

바스락바스락 귀부터 후벼 판다

붉게 피어난 사진 한 장이 나를 대신한다

저는 자주 울어요

마취되지 않는 이름을

혀 밑으로 말아 넣는다

하나, 둘, 셋,

숫자를 따라가도

간추려지지 않는 긴장은 상상 속에서 멈춘다

골목마다 통행료를 내야만

당신에게 다다를 수 있다

임상을 끝내지 않은 처방전을 받는다

당신에게 키워지지 않는 비밀처럼, 나는

변형되고 변형되고 있다

 

 


 

 

노승은 시인 / 자작나무 숲

 

 

당신이 어디를 바라보든

나는 늙어갈 것이다

천천히,

 

바삭한 흰 뼈들이 가로무늬 옷을 찢는다

열어놓지 않은 길

방향 없는 발화점은

자작자작 끓고 있다

손등에 박힌 눈물주머니가 툭 터지듯

나비가 난다

반짝이는 손뼉들,

속삭이는 상승과 하강이 펼쳐진다

 

내 시작과 끝은 당신에게 슬어 있는 모든 것

딱딱한 겨울잠으로부터

무릎을 덮는 풀숲을 지나기까지

어깨를 짚어주던 온기

초록으로 출렁이는 이마

당신을 읽을 수 있는 날들이 있었다

당신이 펼쳐놓은 그늘

부서지고 반짝이고

몸이 먼저 끓는, 나무의 안쪽

자작자작

 

오래도록 옷을 벗는 사내를 알고 있다

 

 


 

 

노승은 시인 / 이칠 모텔

 

 

당신에게서 받은 주소는 위태롭다

개들이 뜯어내는 바람처럼

발바닥은 헐어서

빈곳마다 주저앉고 싶었다

 

차라리 구름을 받았다면

차라리 지붕을 받았다면

 

목이 부어서

근처를 지날 때마다 쇳소리가 났다

가볍게 매달린 꽃송이였으면 좋겠다

안을 들여다볼 수 없는 피곤이

목젖을 자꾸 건드렸다

 

당신은 대책 없이 써버린 시간,

가령 밤에만 자라는 발톱 같은 것

집중할수록 설득할 수 있는 말들을 잊어버렸다

 

여기는 자책의 시간

이명의 계절을 지난다

폐업된 바람이 젊은 여자들 파도 속에 감추고

끝내 얼버무리지 못했던

 

바다의 방향은 어디인가

얼마나 먼가

외곽의 어느날

 

-시집 『나는 구부정한 숫자예요』에서

 

 


 

노승은 시인

서울에서 출생, 2005년 《서정시학》으로 등단, 시집 『나는 구부정한 숫자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