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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수예 시인 / 바다와 밀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4.
김수예 시인 / 바다와 밀대

김수예 시인 / 바다와 밀대

 

 

바람이 물 위를 얼마나 달려왔는지

밀대는 안다

해변에서 밀대를 짚고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여자와

하품을 삼키며 뒤따르는 딸을 내려다본다

 

지팡이가 나서고

뒤처진 한 팔과 한 다리가 치맛자락 붙들 듯

처얼썩, 따라 붙는다

 

거품을 물고, 여자가 일생 벼려온 것들

 

물걸레로 바닥을 민다

먼지가 습한 무게를 업고 선명해져 줄줄이 밀려다닌다

 

무릎 꿇지 못해 서서 하는 걸레질

여자는 끝내 바닥에서 손을 떼지 못한 것

 

밀대가 찍히고 따라 나서는 발자국

남은 길을 지워간다

 

어미와 아이가 늙은 한 몸에 살고 있다

 

어미가 된 아이가

아이가 된 어미를 밀고 간다

 

파도의 등을 두드려

모래흙을 게워내는 바다

 

파도는 파도의 길을 밀고 온다

 

 


 

 

김수예 시인 / 기차의 배꼽

 

 

기차가 달린다

발밑이 차여 공중을 잠깐 들어 올린다

 

눈앞에 한 선을 누이고

마주 보는 침묵의 거리

선로는 나란하다

 

속살 속 사과 씨처럼

신이 똑같이 나누어준 반쪽

 

탯줄로 연결된 밀월을 끝내고

배꼽 떨어져 가랑이 사이로 구른다

 

철로 끝이 뻥, 차 올려

스윽 바지를 문지르며 달이 뜬다

 

대기를 격파하며 기차는 달린다

다가서는 만큼 물러서는 너를

 

쫓아 왔는지 얼마나 나는 쫓겨 왔는지

기적을 복기하며 기차가 달린다

 

가지런히 콧김을 뿜는

선의 마음을 연장하여

 

윙크하듯 소실점을 찍고

엇갈리어 나아간다

 

무게에 밀려 길이를 따라

달리는 기차는 평행이 감당한다

 

바람을 밀매하던 개망초

콧물 훔쳐 길가로 던지다

 

 


 

 

김수예 시인 / 이상하고 아름다운 나라의

 앨리스가 라면을 끓이고 있어요

 일인용 냄비에 불을 켜요 따가닥 따가닥 불꽃이 튀지 않아요 불을 피워야 꽃이 부푸는데 꽃은 뜨거워 물을 끓이는데

 식탁 위 바나나는 새파랗고요

 가스가 떨어졌나요 줄을 따라 옥상으로

 마른빨래가 펄럭여요 앗, 빨려 들어가요 꼬불꼬불 동굴을 삼키는 지하의 아가리

 몇 호로 가는 가스인가요

 막다른 골목까지 가늘어지는 길

 거기 가스가 있나요, 나는 지나가나요

 깔때기를 든 토끼가 꼬리를 자르고 빠져나가는 그쯤

 한 점 불씨 꼬들꼬들 씹혀요 후루룩 마셔 버리자고요 어디에도 늦은 때란 없는 거잖아요

 라면도 떨어졌다고요

 질겅거리는 길 목구멍에 걸려요 우웩, 앨리스가 라면을 끓이고 있다는 말은 거짓 끓이려 했죠

 다만 불붙지 않은 거죠

 불꽃 튈 만큼 허기지지 않았을까요

 허청허청 점심시간이 되었던 거죠 마침 하얀 토끼가 손목시계를 쳐 다보며 뛰어갔던 것

 시곗바늘 돌지 않아도

 흑흑 허기는 물러져요 껍질 까매진 바나나를 벗겨요 미끄러져

 우리 껍질을 벗어요

 당신, 거기 있나요?

 앨리스, 밥 먹고 자야지

 

 


 

 

김수예 시인 / 소래(昭來)

 

 

빗살무늬 앞머리를 가르던

포구의 바람은 미역빛이다

 

공단 옆 버스정류장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때 절은 희망처럼

이따금 빠뜨리는 버스 노선처럼

 

신상품을 내건 간석오거리 몇 구역을

뒷골목으로 쏘다니다

 

삼월은 상이군인처럼 돌아와

너의 팔짱을 낀 채

 

어머니의 쪽문 안으로

몸을 누이곤 한다

 

소래昭來,

 

호명만으로 설레던 너를 끄적이면

골목 안 전봇대에 파래 색 잎새가 돋는다

 

새벽 바람에 속속들이 뒤집히며

마른 박대 같은 어머니

 

날 밝기 전 돌아온 뱃전에서

비린내를 흥정한다

 

 


 

 

김수예 시인 / 시 창작 교실

 

 

시인은 힘주어 말한다

엘리트주의를 경계하려고 노력했다고

 

그 시절에 나는 애써

화이트칼라에 속하고 싶었다

 

시 쓴 지 얼마 안 됐다는 뒷줄 어떤 분은

자작시 「우리집 식모」를 시인께 보인다

 

한번은 사람답게 살다 가야지, 도서관 오던 길

뒤쪽에서 들려온 대화가 꼬리를 자른다

 

살 만하니까 가시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목포에서 올라온 외숙모가 말했다

 

직장암 진단을 받으니까

사람들은 혀를 찼다

이제 살 만한데 아프다고

 

사십 오 회의 항암을 견디며

엄마는 십오 년째 살 만하고

 

흰 코트를 만지작거리다가

나는 나를 내려놓고 돌아선다

 

 


 

 

김수예 시인 / 책상

 

 

 여섯 식구 단칸방 살 때

 식구들 머리맡 백열전등 아래 펴놓은 밥상은 내 책상이었다 그만 자그라, 잠꼬대처럼 흐리는 말꼬리는 아버지의 죄스러운 자리끼였다

 

 철이 들고 새벽 줄을 서야 했던 언덕배기 시립도서관 곰보 칸막이가 전용 책상이 되었다

 여친구함 선인중 2학년 13반 57번 꾹꾹 눌러 새긴 페인팅 음각 벽화는 내 설렘의 시초였다

 

 남편의 자취방 한가운데에서 신혼 방 구석으로 책꽂이까지 딸려온 철제 책상에

 딸의 백일 사진을 세워 두고 공과금 고지서를 눌러둔 온순한 경제가 내 치열의 흔적이었다

 

 독서실로 아들의 교과서와 문제집을 옮기고 대학 기숙사로 옷가지와 침구를 부친다 빈 책꽂이가 기다란 원목 책상에 노트북을 연결하고 머그잔을 내려놓는다

 

페달을 밟으며 자판이 멈칫거린다

 

 


 

 

김수예 시인 / 스트라이프 트라우마

 

 

줄줄줄줄 칸을 만들어요

유려한 곡선이라 해도

칸 안에서 나는 갇혀 있어요

 

아, 사바나에서는 얼룩말이 먼지를 일으키며

줄줄줄줄 무늬를 입고 달려요

 

검정 바탕에 흰 무늬일까요

하얀 털과 검은 털이 번갈아 자라나나요

 

내가 줄무늬 옷을 고른 것은 아니지만

얼룩말 잔등에 기생하는 체체파리는 아니지만

줄줄줄 줄무늬에 감겨 숨이 가빠져요

 

신나게 발을 구르면

발바닥에서는 바퀴가 자라나나요

꼬리를 물고 뱅뱅 오목해졌다가

뒷덜미 잡혀 팽팽해져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릴까요

앗, 각도를 바꿔야 해요

머뭇거릴 틈이 없어요

 

다시 움푹해질 때까지

볼록과 물렁의 시간을 견뎌야 해요

소용돌이는 지나가고 나면

시치미를 떼는 습관이 있죠

언제나 진땀을 흘리는 건 나 출출출출 줄무늬 땀이 되어 당신의 온몸을 돌아나가요

 

 


 

김수예 시인

1967년 인천에서 출생. 2020년 《포엠포엠》 신인문학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2021년 전주문화재단 미디어북콘텐츠 『목소리가 얼굴에게』를 발간. 시집 『피어나 블루블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