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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상윤 시인(포항) / 그리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3.
이상윤 시인(포항) / 그리움

이상윤 시인(포항) / 그리움

 

 

얼마나 아파야 꽃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순결해져야 울음이 될 수 있을까

 

그리움 하나로

새들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강물은 뿌리까지도 남김없이 온몸

바다로 가 닿네

 

돌아오지 않는 사랑 앞에서 날마다 가난한 마음으로

푸른 등을 내거는 별들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가슴에 작은 아픔 하나 밝힐 수 있을까

 

온몸으로

너에게 그리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상윤 시인(포항) / 명태의 눈

 

 

포항 죽도시장 생선 파는 골목 좌판대 앞에서

이제 막 차에서 내려 엉거주춤 앉아 있는

명태의 눈을 보았다

세상 가려줄 따뜻한 눈시울도 없이 작은 구슬

하나 박혀있는 것 같은 명태의 눈

그 아득한 기억 너머로 흰 토끼 같은 바다

하나가 놀고 있다

여자가 잘게 부순 얼음을 몇 줌 넣어주자

이내 명태의 몸이 고추처럼 탱탱해지고 눈에서

가늘은 파도 소리가쏴아 밀려 나온다

물속의 오솔길과 부드러운 수풀도 보인다

그러나 명태는 알고 있다

이렇게 바짝 말라붙은 가슴과 지느러미로는

그 어느 곳도 갈 수 없다는 것을

등 뒤로 보이는 것들은 모두가 그리움이란 것을

눈을 감지 못하는 것들은 한결같이 제 안에

예리한 슬픔 하나씩 가지고 있다

아무리 잘라도 무싹처럼 돋아나는

기억의 바다 한 개씩 품고 있다

한낮에도 백열등이 별처럼 걸리는 죽도시장

허리 굽은 명태 한마리 흔들흔들 걸어가고 있다

감아도 감아도 보이는 불면의 눈

운명처럼 파도치는 세상을 보고 있다

 

 


 

 

이상윤 시인(포항) / 손

 

 

여기는 마음이 둥근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예요 아무나

함부로 이사 올 수는 없어요 당신은 마음이 보름달처럼 둥글다고요?

그러면 당신도 이곳에 올 수가 있어요 그렇지만 그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지요?

 

보여 주세요 뭐라도 좋아요 수첩 거울 신용카드 일기장 등 당신의

마음을 보여줄 물증만 있다면 우리는 날마다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문을

열어 두고 방을 치워놓고 길도 깨끗이 쓸어 놓을 게요 혹시

뜨는 것을 좋아하시나요? 그러면 방송국이나 신문사에 연락해서

기자들도 몇 명 데려다 놓을 게요

 

그렇지만 이것만은 꼭 알아주세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티끌만한 것이라도 당신이 손으로 가린 것이 있다면 이곳에

올 수 없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누구도 앞으론 당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손처럼 작고 투명한 것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이상윤 시인(포항) / 아이에게

 

아이야, 너는

하루에 얼마만큼이나

네 반짝이는 눈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

흐르는 시냇물에

작은 발 깊이 담그고

굴러가는 모래알에 깜짝깜짝 놀라며

소리내어 웃어 본 적은 있니?

어쩌다 산길에서 마주치는

한두 포기 혹은 무더기로 피어나

바람에 살랑이는 들꽃들

그들 곁으로 한 발자국 더욱 가까이 서서

다정스레 그 이름 불러 준 적이 있니?

그리고 그 자리, 비록 작고 작은 것들이지만

밤마다 목을 뽑아 네 창문 고요히

두드리는 풀벌레들의 노랫소리에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의 스위치를 끄고

귀기울여 들어준 적이 있니?

네가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어쩌면 차라리 잊고 지내도

하늘은 언제나

네 이마 위에서 푸르고

맑은 시냇물은 발 밑에서 끝없이 흘러가고

들꽃들은 멀리서도 그 작은 귀를 열어

네 목소리를 알아듣는단다.

이 너른 우주에 존재하는

참으로 모래알처럼 작은 것이라도 모두가

너의 목숨처럼 빛나는 소중함이란다.

마치도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시는

보이지도 않는 분이

그 커다란 눈과 귀로 너와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서로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것까지도

잘 닦여진 거울 보듯 깨끗이

알고 계시듯이 말이란다.

너, 아이야.

 

 


 

 

이상윤 시인(포항) / 봄이 아름다운 것은

 

 

봄이 아름다운 것은

꽃이 피어서가 아니다

 

봄이 아름다운 것은 그 찬란한 꽃 위에

나비가 앉아서도 아니다

 

입김만 닿아도 그냥 후, 하고

날아갈 것만 같은 봄이

 

이렇게 백년을 기다린 사람처럼

지독하게 아름다운 것은

 

꽃보다도 나비보다도

그리움이 먼저 오기 때문이다

 

 


 

 

이상윤 시인(포항) /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시간의 재가 되기 위해서 타오르기 때문이다

아침보다는 귀가하는 새들의 모습이 더 정겹고

감울 위에 저무는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것도

이제 하루 해가 끝났기 때문이다

사람도 올 때보다 떠날 때가 더 아름답다

마지막 옷깃을 여미며 남은 자를 위해서 슬퍼하거나

이별하는 나를 위해 울지 마라

세상에 뿌리 하나 내려두고 사는 일이라면

먼 이별 앞에 두고 타오르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이 추운 겨울 아침

아궁이를 태우는 겨울 소나무 가지 하나가

꽃보다 아름다운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 아니겠느냐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어둠도 제 살을 씻고 빚을 여는 아픔이 된다

 

 


 

 

이상윤 시인 / 그러나 울지마라

 

 

새처럼 일찍 눈뜨고 바라보는 아침 해가

쓸쓸함으로 다가오는 나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아프게 살아온 날들이 그리운

그리움이 되는 나이

 

주위에서 바람막이로 살아가던 어른들이 죽어가고

그 소식을 편지처럼 읽는 나이

 

애태우며 키워 온 자식들의 뒷모습에서

아직도 마음이 가난해지는 나이

 

죽어서도 당신 곁에 누워야 편할 것 같다는 그대 말이

마지막 눈물이 되는 나이

 

그래서 우리 아름답게 살아야 할 남은 날들이 찬란한

슬픔이 되는 나이

 

그러나 울지 마라

 

외롭고 쓸쓸한 인생길이 그래도 이만큼 살만하고

눈물 흘릴 수 있도록 아름다운 것은

 

우리에게 추억처럼 지닐 수 있는

가시 같은 아픔 몇 개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이상윤 시인(포항)

경북 포항 출생. 1989년 <동양문학>으로 등단. 수주문학상 대상, 현대시문학상, 여수해양문학상 대상, 소로문학상 수상, 시집 <섬세한 고독> <하느님도 똑같다> <수려> <황홀>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