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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윤 시인(포항) / 그리움
얼마나 아파야 꽃이 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순결해져야 울음이 될 수 있을까
그리움 하나로 새들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강물은 뿌리까지도 남김없이 온몸 바다로 가 닿네
돌아오지 않는 사랑 앞에서 날마다 가난한 마음으로 푸른 등을 내거는 별들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는 얼마나 더 외로워져야 가슴에 작은 아픔 하나 밝힐 수 있을까
온몸으로 너에게 그리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상윤 시인(포항) / 명태의 눈
포항 죽도시장 생선 파는 골목 좌판대 앞에서 이제 막 차에서 내려 엉거주춤 앉아 있는 명태의 눈을 보았다 세상 가려줄 따뜻한 눈시울도 없이 작은 구슬 하나 박혀있는 것 같은 명태의 눈 그 아득한 기억 너머로 흰 토끼 같은 바다 하나가 놀고 있다 여자가 잘게 부순 얼음을 몇 줌 넣어주자 이내 명태의 몸이 고추처럼 탱탱해지고 눈에서 가늘은 파도 소리가쏴아 밀려 나온다 물속의 오솔길과 부드러운 수풀도 보인다 그러나 명태는 알고 있다 이렇게 바짝 말라붙은 가슴과 지느러미로는 그 어느 곳도 갈 수 없다는 것을 등 뒤로 보이는 것들은 모두가 그리움이란 것을 눈을 감지 못하는 것들은 한결같이 제 안에 예리한 슬픔 하나씩 가지고 있다 아무리 잘라도 무싹처럼 돋아나는 기억의 바다 한 개씩 품고 있다 한낮에도 백열등이 별처럼 걸리는 죽도시장 허리 굽은 명태 한마리 흔들흔들 걸어가고 있다 감아도 감아도 보이는 불면의 눈 운명처럼 파도치는 세상을 보고 있다
이상윤 시인(포항) / 손
여기는 마음이 둥근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동네예요 아무나 함부로 이사 올 수는 없어요 당신은 마음이 보름달처럼 둥글다고요? 그러면 당신도 이곳에 올 수가 있어요 그렇지만 그 말을 우리가 어떻게 믿지요?
보여 주세요 뭐라도 좋아요 수첩 거울 신용카드 일기장 등 당신의 마음을 보여줄 물증만 있다면 우리는 날마다 당신을 기다릴 거예요 문을 열어 두고 방을 치워놓고 길도 깨끗이 쓸어 놓을 게요 혹시 뜨는 것을 좋아하시나요? 그러면 방송국이나 신문사에 연락해서 기자들도 몇 명 데려다 놓을 게요
그렇지만 이것만은 꼭 알아주세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티끌만한 것이라도 당신이 손으로 가린 것이 있다면 이곳에 올 수 없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누구도 앞으론 당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거예요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 손처럼 작고 투명한 것이 또 어디 있겠어요?
이상윤 시인(포항) / 아이에게
아이야, 너는 하루에 얼마만큼이나 네 반짝이는 눈 들어 하늘을 쳐다보니? 흐르는 시냇물에 작은 발 깊이 담그고 굴러가는 모래알에 깜짝깜짝 놀라며 소리내어 웃어 본 적은 있니? 어쩌다 산길에서 마주치는 한두 포기 혹은 무더기로 피어나 바람에 살랑이는 들꽃들 그들 곁으로 한 발자국 더욱 가까이 서서 다정스레 그 이름 불러 준 적이 있니? 그리고 그 자리, 비록 작고 작은 것들이지만 밤마다 목을 뽑아 네 창문 고요히 두드리는 풀벌레들의 노랫소리에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의 스위치를 끄고 귀기울여 들어준 적이 있니? 네가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어쩌면 차라리 잊고 지내도 하늘은 언제나 네 이마 위에서 푸르고 맑은 시냇물은 발 밑에서 끝없이 흘러가고 들꽃들은 멀리서도 그 작은 귀를 열어 네 목소리를 알아듣는단다. 이 너른 우주에 존재하는 참으로 모래알처럼 작은 것이라도 모두가 너의 목숨처럼 빛나는 소중함이란다. 마치도 보이지 않는 곳에 계시는 보이지도 않는 분이 그 커다란 눈과 귀로 너와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서로 사랑하며 그리워하는 것까지도 잘 닦여진 거울 보듯 깨끗이 알고 계시듯이 말이란다. 너, 아이야.
이상윤 시인(포항) / 봄이 아름다운 것은
봄이 아름다운 것은 꽃이 피어서가 아니다
봄이 아름다운 것은 그 찬란한 꽃 위에 나비가 앉아서도 아니다
입김만 닿아도 그냥 후, 하고 날아갈 것만 같은 봄이
이렇게 백년을 기다린 사람처럼 지독하게 아름다운 것은
꽃보다도 나비보다도 그리움이 먼저 오기 때문이다
이상윤 시인(포항) /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시간의 재가 되기 위해서 타오르기 때문이다 아침보다는 귀가하는 새들의 모습이 더 정겹고 감울 위에 저무는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것도 이제 하루 해가 끝났기 때문이다 사람도 올 때보다 떠날 때가 더 아름답다 마지막 옷깃을 여미며 남은 자를 위해서 슬퍼하거나 이별하는 나를 위해 울지 마라 세상에 뿌리 하나 내려두고 사는 일이라면 먼 이별 앞에 두고 타오르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느냐 이 추운 겨울 아침 아궁이를 태우는 겨울 소나무 가지 하나가 꽃보다 아름다운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 아니겠느냐 길 끝에 서면 모두가 아름답다 어둠도 제 살을 씻고 빚을 여는 아픔이 된다
이상윤 시인 / 그러나 울지마라
새처럼 일찍 눈뜨고 바라보는 아침 해가 쓸쓸함으로 다가오는 나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아프게 살아온 날들이 그리운 그리움이 되는 나이
주위에서 바람막이로 살아가던 어른들이 죽어가고 그 소식을 편지처럼 읽는 나이
애태우며 키워 온 자식들의 뒷모습에서 아직도 마음이 가난해지는 나이
죽어서도 당신 곁에 누워야 편할 것 같다는 그대 말이 마지막 눈물이 되는 나이
그래서 우리 아름답게 살아야 할 남은 날들이 찬란한 슬픔이 되는 나이
그러나 울지 마라
외롭고 쓸쓸한 인생길이 그래도 이만큼 살만하고 눈물 흘릴 수 있도록 아름다운 것은
우리에게 추억처럼 지닐 수 있는 가시 같은 아픔 몇 개 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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