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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고안나 시인 / 사랑도 아니고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3.
고안나 시인 / 사랑도 아니고

고안나 시인 / 사랑도 아니고

 

 

은근슬쩍 달라붙더니

옆구리 만지다 무릎 주물다

슬금슬금 종아리 더듬고 돌아 다녔다

잠자리 들자 와락 덮쳤다

함께 살겠다며 몸 구석구석 파고들었다

얼굴까지 달아올라 숨 헐떡거렸다

꼼짝달싹 못하게 사지 누르고 있는

기운 센 이놈이 누굴까

밤새 꽁꽁 앓으며 비몽사몽

놈의 정체 알고자 억지 걸음 재촉했다

어젯밤 가는 줄 알았습니다

이래 지독한 놈 처음입니다

모든 것으로 부터 격리하세요

마스크 꼭 쓰고 사람 접촉 피하십시요

열에 들뜬 마지막 사랑도 아니고

코로나라니

하룻밤이 천 날 같았는데

이 혹독한 싸움판을 우째야 하노?

 

 


 

 

고안나 시인 / 노을

 

 

마음 밖

몸 빠져나온 생각이지

잠자리 들기 전 쓰는

그림일기

 

먼 벌판 서성이며

머뭇머뭇

모든 것 비우는 시간

잠시, 하늘은 무릉도원

복사꽃 만발하지

 

내 사랑, 몇 발자국 더

비껴갈 때

 

몸 바꾸는

노루 한 마리

 

 


 

 

고안나 시인 / 봄비와 벚나무

 

 

몸 부풀대로 부풀어

지탱하기 힘들 때

봄비가 온다

 

멀어져야 가까워지는

계절과 계절사이

꽃 피워야 한다며 봄비가 운다

 

몸속에서, 마음 밖에서 들리는

비의 가락에 가속도가 붙으면

나무의 표정은 겁에 질린 채

풀어야 할 공식들로 분주하다

 

어제는 백마일

오늘은 오십 마일

폭동은 소리 없이 속에서 일고

내밀한 사랑은 은밀하여라

 

붕괴의 속도가 붙은 벚나무

오늘밤 무탈할까

봄비우는 삼월

나는 또, 왜 이리 분주한가

 

 


 

 

고안나 시인 / 매화

 

 

누가 걸쳐 놓았을까

가지 끝에 뚝뚝 흐르는 봄

나비 떼처럼

날아오르는 살 냄새

취한 듯 비틀거리는 바람

은근슬쩍 한 쪽 팔 밀어 넣자

이리저리 몸 비트는 꽃잎들

어쩔거나

너 마저도 어긋난 사랑인 것을

서러운 봄날

잔기침 소리에도

후드득 떨어지는 꽃잎들

앓는 소리 요란하다

 

 


 

 

고안나 시인 / 인생은 혼자 가는 길

 

 

“목적지 어렴풋이 눈앞에 나타날 때

왜 안도의 기쁨보다는

깊은 한숨이 쉬어지는 걸까

곶감이 달랑 두세 개 남았을 때, 그 기분

넘기 힘든 중년의 고개턱, 지나온 지 한참 되어서야

지천에 보이는 것들은 왜 모두 슬플까

 

아름다운 추억도 눈물이며

사랑도 그리움도 슬픔의 행로였음을

목숨 건 그 무엇들이

한없이 서글프고 가소로운 건 왜일까

진작 깨닫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혼자라는 말

혼자 가는 길

결코 돌아설 수 없는 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며

가난해지며 슬퍼지며 외로워지며

 

인생이라고

인생이니까

내가 나를 정확하게 해부해 볼 수 있는

경건의 시간

백년도 아닌 생, 기꺼이 살아 낼 것이다“

 

-시집 <따뜻한 흔적> 에서

 

 


 

 

고안나 시인 / 우산을 받치고

 

 

이런 날이면

구석에 접혀 있던 지붕들

와르르 거리로 내몰린다

스스로 집이 되고 싶었던

움츠린 생각 펼치면

손바닥 위 순식간 세워지는 집 한 채

망치 소리 없이 서너 채씩

소유할 수 있는 꿈의 궁전

간혹 포개지는 어깨와 어깨

사방 뚫린 지붕 아래 젖기도 하지만

입 벌린 하늘의 말씀

그저 듣기만 해도 좋아라

무지개마을 물 위 떠다니고

날개 달린 지붕들

새떼처럼 날아간다

뿌리 없는 꽃들 피고 진다

나, 노란 국화꽃 한 송이 피워 볼까

걸어다니는 지붕 아래

흠씬 젖어도 좋은 이런 날,

 

 


 

 

고안나 시인 / 매미

 

 

애터지게 울어 쌓는

그 사연 들어봤는가

멀뚱히 서 있는 은행나무

꼼짝하기 싫은 이파리

치근덕거리는 저 요란한 소리

어디 가서 멈출까

지나가는 개가 웃고

졸던 소 웃고

복장 터진 병뚜껑 스스로 터지는

그 소리 들어봤는가

더위 먹은 바람마저 헉헉거리는 대낮

웃을 일 아닌 저 소리

보일 듯 말 듯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도 아닌

떼지어 소리치는 저 치열함

정작, 저렇게 울고 싶은

마음 따로 있는데

 

 


 

고안나 시인

1958년 경남 고성 출생. 본명: 고혜은. 2010년 《부산시인》, 《시에》를 통해 등단. 시집 『양파의 눈물』. 요산문학제, 부산일보, 한국예총 문예공모 수상. 호미곶문학상 수상. 백산여성문예상 수상.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 부산시인협회 회원. 대구시인학교 문화부장. <사림시>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