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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안나 시인 / 사랑도 아니고
은근슬쩍 달라붙더니 옆구리 만지다 무릎 주물다 슬금슬금 종아리 더듬고 돌아 다녔다 잠자리 들자 와락 덮쳤다 함께 살겠다며 몸 구석구석 파고들었다 얼굴까지 달아올라 숨 헐떡거렸다 꼼짝달싹 못하게 사지 누르고 있는 기운 센 이놈이 누굴까 밤새 꽁꽁 앓으며 비몽사몽 놈의 정체 알고자 억지 걸음 재촉했다 어젯밤 가는 줄 알았습니다 이래 지독한 놈 처음입니다 모든 것으로 부터 격리하세요 마스크 꼭 쓰고 사람 접촉 피하십시요 열에 들뜬 마지막 사랑도 아니고 코로나라니 하룻밤이 천 날 같았는데 이 혹독한 싸움판을 우째야 하노?
고안나 시인 / 노을
마음 밖 몸 빠져나온 생각이지 잠자리 들기 전 쓰는 그림일기
먼 벌판 서성이며 머뭇머뭇 모든 것 비우는 시간 잠시, 하늘은 무릉도원 복사꽃 만발하지
내 사랑, 몇 발자국 더 비껴갈 때
몸 바꾸는 노루 한 마리
고안나 시인 / 봄비와 벚나무
몸 부풀대로 부풀어 지탱하기 힘들 때 봄비가 온다
멀어져야 가까워지는 계절과 계절사이 꽃 피워야 한다며 봄비가 운다
몸속에서, 마음 밖에서 들리는 비의 가락에 가속도가 붙으면 나무의 표정은 겁에 질린 채 풀어야 할 공식들로 분주하다
어제는 백마일 오늘은 오십 마일 폭동은 소리 없이 속에서 일고 내밀한 사랑은 은밀하여라
붕괴의 속도가 붙은 벚나무 오늘밤 무탈할까 봄비우는 삼월 나는 또, 왜 이리 분주한가
고안나 시인 / 매화
누가 걸쳐 놓았을까 가지 끝에 뚝뚝 흐르는 봄 나비 떼처럼 날아오르는 살 냄새 취한 듯 비틀거리는 바람 은근슬쩍 한 쪽 팔 밀어 넣자 이리저리 몸 비트는 꽃잎들 어쩔거나 너 마저도 어긋난 사랑인 것을 서러운 봄날 잔기침 소리에도 후드득 떨어지는 꽃잎들 앓는 소리 요란하다
고안나 시인 / 인생은 혼자 가는 길
“목적지 어렴풋이 눈앞에 나타날 때 왜 안도의 기쁨보다는 깊은 한숨이 쉬어지는 걸까 곶감이 달랑 두세 개 남았을 때, 그 기분 넘기 힘든 중년의 고개턱, 지나온 지 한참 되어서야 지천에 보이는 것들은 왜 모두 슬플까
아름다운 추억도 눈물이며 사랑도 그리움도 슬픔의 행로였음을 목숨 건 그 무엇들이 한없이 서글프고 가소로운 건 왜일까 진작 깨닫지 못한 것은 무엇일까
혼자라는 말 혼자 가는 길 결코 돌아설 수 없는 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며 가난해지며 슬퍼지며 외로워지며
인생이라고 인생이니까 내가 나를 정확하게 해부해 볼 수 있는 경건의 시간 백년도 아닌 생, 기꺼이 살아 낼 것이다“
-시집 <따뜻한 흔적> 에서
고안나 시인 / 우산을 받치고
이런 날이면 구석에 접혀 있던 지붕들 와르르 거리로 내몰린다 스스로 집이 되고 싶었던 움츠린 생각 펼치면 손바닥 위 순식간 세워지는 집 한 채 망치 소리 없이 서너 채씩 소유할 수 있는 꿈의 궁전 간혹 포개지는 어깨와 어깨 사방 뚫린 지붕 아래 젖기도 하지만 입 벌린 하늘의 말씀 그저 듣기만 해도 좋아라 무지개마을 물 위 떠다니고 날개 달린 지붕들 새떼처럼 날아간다 뿌리 없는 꽃들 피고 진다 나, 노란 국화꽃 한 송이 피워 볼까 걸어다니는 지붕 아래 흠씬 젖어도 좋은 이런 날,
고안나 시인 / 매미
애터지게 울어 쌓는 그 사연 들어봤는가 멀뚱히 서 있는 은행나무 꼼짝하기 싫은 이파리 치근덕거리는 저 요란한 소리 어디 가서 멈출까 지나가는 개가 웃고 졸던 소 웃고 복장 터진 병뚜껑 스스로 터지는 그 소리 들어봤는가 더위 먹은 바람마저 헉헉거리는 대낮 웃을 일 아닌 저 소리 보일 듯 말 듯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도 아닌 떼지어 소리치는 저 치열함 정작, 저렇게 울고 싶은 마음 따로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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