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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성후 시인 / 싸구려 카피캣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3.
박성후 시인 / 싸구려 카피캣

박성후 시인 / 싸구려 카피캣

 

 

구십구만

구천구백구십구 번 산 고양이가 세 마리 있었는데

둘은 아는 사이고 하나는 아무도 모르더래

둘은 사랑하는 사이고 하나는 안부도 묻지 않아

둘은 그림자가 없어 하나는 밤눈이 밝아 잠도 안 자고

 

사랑은 초콜릿 같더래

우리는 고양이인데

꿈은 늘 쿠키를 구워서 반죽을 찍어냈대

하트 모양 하나 굽고 네모 빼기 하트 쿠키

부스러기를 할짝댔다나 그 애 둘은

백만 번 살아보러 간대 바삐 걸으래

살아남은 고양이는 한 마리 반이야

 

구십구만

구천구백구십구 번 산 고양이들이 낳은 처음 사는 고양이 셋

넷째는 백만 번 살아봤더래

고양이 새끼가 받는 사랑은 초콜릿 같아 그래그래 고양이인데

세 마리는 살아가더래

그렇지만 고양이는 백만까지 셀 줄 모르잖아

넷째는 하나에서 넷째로

넷째는 넷째에서 백만 번째로

살아남은 고양이는 세 마리만이야

어떻게 셌는지는 비밀이지만

 

구십구만

구천구백구십구 번을 기억하는 고양이는 정말 똑똑할 테지

오늘이 살아간 지 며칠째였죠

백만 번 산 고양이는 조용하고

구십구만

구천구백구십구 번째를 베낄 뿐이야 그럼 그건 누구 거였지

둘은 그림자가 없어 하나가 하나일 시절에는 밤눈이 밝아서

그림자가 없었어

가로등은 몇 번째부터 등장했나

우아하게 그믐달 뜬 날 담장 위를 걷는

꿈을 꾼댔어

그 여섯 중 하나가 한 말이었어

 

나는 백만 한 번 산 고양이를 스케치하고 있고

구십구만 구천구백구 에이 왜 이렇게 기냐

어림잡아 백만 번 산 고양이 둘이 껴안고 백만 번 살러 갈 때

백만 두 번 산 고양이를 나는 스케치하고 있어

 

백만하고 세 번도 어림하면 백만 번이 아닌가 깨달았어

 

 


 

 

박성후 시인 / 상추 키우기

 

 

 어머니는 로멘 상추를 기르신다 (로멘이 맞을까, 발음은 맞는데,) 요새는 뿌리까지 팔더라고, 맞는 말이다 (나는 때리는 쪽) 식물도 통각이 있다는 실험 결과는 통각을 제대로 정의하는가 다만 잘릴 때 흔적은 쓴맛이 난다 욕설처럼

 

 머리카락을 자르러 간다 요즘 제모는 뿌리부터 뽑더라고, 때리는 말이다 머리카락은 비싼 돈 주고 자르는데 다리는 면도기로 밀었다 털에 통각이 있는지 고심한다 (그럴 리가) 더듬이가 잘린 바퀴벌레 골목에서 봤던, 잠자는 숲속의 바퀴벌레 잠자는 침대 위의, 사실 변신 제대로 안 읽어봤다 그래도 지껄이고

 

 로멘 상추는 자라난다 샐러드 용이라고, 쓴맛이 덜 올라오는 아삭한 놈이다 보라색 부분이 없다 안토시아닌 (안토시아닌이 맞나, 중요치 않다) 눈앞에서 뜯어내는 사람이 있다 어머니다

 

 어머니는 뿌리부터 염색하신다 요새는 그렇게도 되더라고, 직접 하신다 종종 수건에 검은 물이 든다 안토시아닌 (중요치 않다) 다만 내가 그 수건을 못 쓰게 하셨다 (쓰게, 쓰다, 쓴맛,) 집은 발코니가 없고 식물은 창가에서 키운다 사랑니가 났다 뿌리는 얕고 얕은 사랑, 뽑으러 간다

 어머니는 염색을 거의 끝내셨고 로멘 상추는 비 내릴 때면 휘늘어진다 얕은 뿌리, 어머니는 머리가 가늘어진다

 

 엄마 나 사랑니가 얕아서 다행이다 이것 봐라 나란히 났지

뿌리 저거는 어디다 쓰는데 잘라서 버려라 그냥

우리는 보통 햇살이 셀 때 휘늘어지고 뿌리는 땅속에 곧게 나지

사랑이 얕으면 어떡해 엄마, 저거 예뻐서 어떻게 먹어

 

 사실 별생각 없었다 뜯은 상추는 삼겹살에 마늘 얹어 맛있게 먹었다 돼지를 본 적 없어 다행이었고

 

 바퀴벌레는 더듬이를 뿌리 염색하고 나는 사랑니에 고기가 꼈다

 

 


 

 

박성후 시인 / 눈을 가리고 빙글 돌아 춤이 되겠지

 

 

 섣부른 오월의 맑은 아침, 강릉은 눈이 내린답니다

 글은 조금 생태적이지 그러나 화자는 아니에요 이런 내부 고발 좀 있어야 긴장하겠지 필자야

 

 필자야!

 듣고 있니

 

 뭐라 할지 모르겠는 스텝, 강릉은 눈이 내리고 눈을 가리곤 합니다 햇살은 눈을

 아스팔트로 가립니다

 거뭇거뭇한 눈이 내립니다 기분 나쁘고요 아무래도

 

 케이크를 혼자 덥석 물어뜯습니다 강릉 온 눈처럼 새까만, 초콜릿 케이크 맛있다, 필자야 너도 와서 먹어

하지만 필자는 다이어트 중이었고

 남은 케이크는 빗물에 녹아버립니다 여긴 강릉이 아니니까

 

 필자는 훌라후프를 돌린다 늘 걱정인 책상 위 레고 부술까 봐

 밖으로 나간다 비가 내립니다 꽁꽁 얼어붙은 강 위로 이상기후가 진득합니다

 

 화자야 다른 데 틀어 깔깔깔, 눈을 가린다 필자야 듣고 있니 필자야! 이거 웃기지 않냐

 웃기지 그럼

 

 이상기후가 걸어 다닙니다 꽁꽁 얼어붙기에는 그래도 남쪽입니다 너무

 바나나를 기르기에 적합합니다 바나나에 적합한, 빙그르르 굴려 봤나요 제주도에선 야생 바나나가 종종 잡힙니다 폐사된 채로

 바다에 떠밀려 오고

 우리의 잘못은 아니어서

 

 특히 잃으셔도 되는 건 중요한 것들인데 건강 지식 생태 따위의, 그렇죠 생태적인 글이죠 지구는, 눈을 가리고 빙글 돌아 빙글 빙글 빙글 고독은 달이 있잖아 둘이서 추자 추자 빙글

 바닷물은 드레스 자락, 밀물이 오고 웃기지도 않다

 

 섣부른 오월의 맑은 아침, 사실은 비가 내린답니다

 미세먼지를 재우고 뒤돌아 떠날 비 좀 온다고 변하지 않는 지구 멸망

 아니 인류 멸망의 시대, 지구가 돌린 눈가리개

 는 춤이 되었지 볼 사람 아무도 안 남은

 듣고 있니 필자야 필자야?

 

 


 

 

박성후 시인 / 연필꺾이

 

 

 연필에 감을 붕대는 없어요

 

 누가 글을 연필로 씁니까 자판을 두드려야죠

 카톡으로 위장해서 저기 옆 사람을 봐요

 지하철 승객 절반이 변장한 시인

 나머지 반의반이 꿈을 꿉니다 그중 반은 잠들어서 그렇고요

 

 그들 모두하고도 한 명 더 저까지 손목에 붕대를 감았습니다 우선 저는 건초염 탓인데 그는 왜 감았습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로 누굴 지칭하고 싶었는지도

 

 어쨌든 한 명을 선택하면 그는 항상 필통을 휴대합니다

 샤프

 샤프심 열 통 커터칼 지우개 연필

 

 우리는 연필에 주목합니다

 절필하기 딱 적당한 강도 샤프는 비싸고 그 심은 티도 안 나서 연필을 한 다스 사다 놨습니다

 손가락이 그나마 비슷한 역할인데 중지의 수신호를 못 쓴다면 괴로우니까요 개수도 연필이 더 많고

 

 그리하여 대신 부러진

 연필은 어디로 갔습니까 막내 남겨두고

 책상 위를 뒹군 흔적만 검게 남습니다 그을음일까요

 그의 공책은 불쏘시개

 

 몽당연필이 되도록 쓰겠답디다 요즘 세상에 몽당연필이라니요 부러진 토막을 이르는 것이겠죠

 연필꺾이는 연필을 더 얇게 뜹니다 그럴수록 꺾기는 더 쉽지 않고

 샤프심에 꿰뚫려 엉망인 지우개로 글을 지워버립니다

 미처 못 뺀 샤프심 탓에 그을이 번지고

 

 


 

 

박성후 시인 / 연어 레몬 아보카도의 우울

 

 

연어에 레몬즙을 뿌리던가

샐러드

드레싱에는 들어가는데

 

연어가 날것일 때만 그랬을 거야

생으로 먹는 것과

훈제로 먹기

의 차이도 흐릿하면

그걸 뇌 훈제라고 불러

 

비스킷 카나페

위에 연어를 얹어

별것 아닌 레시피

에다 아보카도 한 조각 또

레몬도 한 방울

만 넣었다가 좀 느끼해, 레몬을 잔뜩 뿌리고는

얼굴을 찡그릴

핑계라 부르거나

김치를 찾아

빨갛게 버무리는

 

레몬에 씨앗은 꼭 쉼표 같아

어쩌다 들어가면 슬쩍 뱉어내거든

카나페는 그럴 일이 없지만

레몬을 통으로 넣지 않는 이상

 

그러니까 첫 만남이

샐러드였으면 좋았을 텐데

한입 카나페 말고

양상추가 아삭한 동네

 

아보카도 그리고 올리브 열매

레몬즙에 연어는 보일 듯 말 듯

살아가는 그릇으론 반짝거리는

스테인리스가 좋겠어

숟가락으로 퍼먹을 때 흠이 티 나도록

우리는 머리를 긁어

 

내 말이 이 카나페 보고 별로라는 게 아냐

레몬즙이 쓰도록 넣을 것도 아니잖아

그 정도면 회고록이라 불러야 할걸

레몬은 꼭 한 그릇당 한 조각

이 말을 꼭 나머진 아보카도로 채우란 뜻으로 받아들임 곤란하지 아보카도만 해도 충분히 느끼한데 그렇다고 연어처럼 맛있지도 않아 내 입맛에

 

연어는 더 좋은 요리에 쓸 수 있을 거야

양상추를 추가로 썰고

 

퇴고와 레몬의 라임이 맞는 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해?

그게 우연은 아닐 거잖아

 

-계간 《열린시학》 2024년 봄호 발표

 

 


 

 

박성후 시인 / 번아웃

 

 

앞집에 구들장이 깨졌단다

구경꾼들은 구들장이 잘못했다는데

글쎄 잘 모르겠어서

한발 뒤에서 손가락만 연신 피웠다

연기를 일부러 삼켜서

콜록거려보았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

떨어진 재만이 나 여기 있던 흔적이다

이만 인파에 섞이련다

그러니

 

담배꽁초 함부로 밟지 말아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2023년 계간 《시와 편견》 등단시

 

 


 

 

박성후 시인 / 인스타 아이돌 인아 이야기

 

 

 인아는 나나쨩으로 통한다

 인아는 첫사랑에서 잘렸다

 인아는 아름답다 인스타에 검색하면 알 수 있지만

 인아는 첫사랑에서 잘렸다 그것만이 중요하다

 

 나나쨩은 다음엔 된다는 말이 싫었다

 내일의 태양은 무덤 속까지 비치진 않았다

 디엠에 수많은 볼드 글씨 구 할은 읽을 가치도 없고 걔넨 거짓말만 한다 응? 인아야

 

 인아는 나나쨩이 아니었다

 첫사랑은 인스타를 안 하는 사람

 나나쨩은 흔들린다 브로켄 요괴처럼 안개는 흐릿한, 미리 뿌린 사진첩처럼 포토샵은 괜히

 기억 따위를 미화하지 마치

 요오드와 아이오딘 용액처럼

 

 나나쨩 아무래도 구름이 밝아서

 역광 때문에 사진 찍긴 힘들 것 같아 (꾸미지 말자 꾸미지 말자 늘 꾸민 채로 만날 거야 사람들 응? 인아야)

 인아야

 인아야 괜찮아? 그만 찍자 날이 많이 덥지

 

 인아는 처음은 다 어렵다는 말이 싫었다 첫 숨조차 어려운 걸 믿지 않았다 양수가 폐를 잠식한다 깜빡인다 아직 하나도 맞지 않아

 마치 한밤중이 막막하듯 하루 시작은 낮이면 안 될까 한 해 시작은 봄이면, 안 될까요 시계에 빌었다 신은 시계에는 깃들지 않아 같은 말 따위도 싫었다

 

 (양수가 폐를 잠식한다, 양수가 폐를 잠식한다 응애, 양수가 폐를 잠식한다, 응애)

 

 나나쨩은 디엠을 확인한다 이 사람으로 정했다 그 사람이 싫어도

 

 인아는 첫사랑에서 잘렸다 노동청에 신고도 가능한 불법 해고였고

 

 나나쨩은 첫사랑을 잘라낸다 이다음 사람은 첫사랑

 일은 분명 두 번째 자연수잖아 응?

 

 그래서

 나는 첫사랑을 잘라낸다 잘 가라 인아야 디엠 창은 쌀쌀하다 옷 덥게 입고

 나나쨩을 보러 간다

 나나쨩은 이별 따위 하지 않는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6월호 발표

 

 


 

박성후 시인

2023년 계간 《시와 편견》을 통해 등단. 2022년 시집 『쌍성계에 관한 고찰』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