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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완희 시인 / 폐 자전거를 보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3.
정완희 시인 / 폐 자전거를 보다

정완희 시인 / 폐 자전거를 보다

 

 

언제쯤 버려졌는지도 모를 오래된 자전거

누군가에 의해 자물쇠로 봉인된 채

아파트단지 주차장 옆에 쓰러져 있다.

바퀴에 족쇄가 채워진 채 잊혀지는 것들

 

아파트단지마다 수없이 녹슬고 있는 이들은

결코 낡아서 죽은 게 아니다.

단지 싫증나서 버림받은 것

처음 새 자전거를 만났을 때 마주했던 설레임과

가슴 두근거리던 열정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부러진 페달과 끊어진 체인

녹과 먼지에 둘러싸여 생을 포기한 프레임

바람과 함께 질주했던 욕망이 빠져나간 타이어

철창 속에서 안락사 될 날만 기다리는 유기견들이나

장례식장 한켠에 붙어있는 요양병원의

사람 그리운 노인들의 눈빛들처럼

 

몇 년마다 한 번씩 아파트 관리소에서는

버려진 자전거의 봉인된 쇠사슬을 끊고

트럭에 실어 하늘나라로 올려 보낸다

 

-시집 <장항선 열차를 타고>에서

 

 


 

 

정완희 시인 / 소주병

 

 

모가지를 비틀어 소주병을 딴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이 온다던 시절

포장마차에 앉아 목을 물어뜯듯이

소주병을 따던 때도 있었다

 

동료들과 장단이 맞아

우리를 힘들게 했던 상사와 세상의 목을 비틀며

삶의 고통을 털어내던 때도 있었다

목이 달아난 소주병들을 탁자 위에 정렬시키고

매캐한 연기 속에서 죄 없는 안주를 물어뜯으며

서슬 푸르던 독재자의 목도 물어뜯고 싶었다

비틀거리는 귀갓길을 막아서던 가로수와 시비를 걸다

벌떡 일어서는 아스팔트에 뺨을 얻어맞던 시절

 

오늘도 사람들은 연기를 피우며

삼겹살과 생선을 굽고

소주병의 모가지를 비틀어

눈물 같은 소주를 유리잔에 부어 마신다

목을 넘어가면서 위장에서 내장으로

빈속을 싸르르 흘러내리는 그 첫잔의 짜릿함

 

 


 

 

정완희 시인 /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것은

 

 

그 속에 세상을 바꾸는

씨앗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 모래알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떠돌던 영혼들이 폭풍을 몰고

회오리바람 속에서 비구름과 뜨겁게 만나

온 세상의 지붕에 튕겨져 낙숫물로 떨어질 때

비로소 화강암 댓돌이 홈이 파인다

 

붉은 흙먼지들이 모래알들이

온 세상을 휘돌아 나와

소낙비와 함께 쏟아지고 있다

물은 물일뿐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일 퍼센트의 사람들

이제 오늘의 눈물들은 누구의 벽에

또 누구의 가슴에 희망의 구멍들을 뚫어낼까

 

 


 

 

정완희 시인 / 응급실에서

 

 

성모병원 응급실

일주일에 한 번씩 냉동고에 보관된 영혼들을

하늘나라로 보내기 위한 절차가 진행 되었다

경광등 불빛 번득이는 속에서 비상벨 소리와

의사의 호령에 울먹이며 복창하는 앳된 간호사들이

시신들을 탑차에 실어 화장터로 보낸다

연고가 없거나 찾는 이 없는 영혼들은

그저 냉동 탑차에 실려 화장장에서 한줌재로 남아

누군가에 의해 공동묘지에 뿌려질 것이다

 

온갖 병으로 사고로

피투성이 되어 실려 오는 사람들과

세상이 싫어 입에 거품을 물고 실려 온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순간으로 바뀌어 스쳐가는 응급실에서

생과 사의 경계선과 갈림길을 지켜보았다

저 사람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에서 살다

어디로 떠나가는 것인가

우리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떠나가는 것일까

 

 


 

 

정완희 시인 /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 것은

 

 

그 속에 세상을 바꾸는

씨앗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 속에 모래알이 있기 때문이다

하늘을 떠돌던 영혼들이 폭풍을 몰고

회오리바람 속에서 비구름과 뜨겁게 만나

온 세상의 지붕에 튕겨져 낙숫물로 떨어질 때

비로소 화강암 댓돌이 홈이 파인다

 

붉은 흙먼지들이 모래알들이

온 세상을 휘돌아 나와

소낙비와 함께 쏟아지고 있다

물은 물일뿐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일 퍼센트의 사람들

이제 오늘의 눈물들은 누구의 벽에

또 누구의 가슴에 희망의 구멍들을 뚫어낼까

 

-시집 <장항선 열차를 타고>에서

 

 


 

 

정완희 시인 / 판교역에서

 

 

장항선은 아직도 허전하다

아직도 복선 철로가 깔리지 아니한 곳

임시역에서 몇 번씩상 하행 새마을호에

길을 내어주고 나서야 도착한 무궁화 열차로

이십년 만에 판교역에 내렸다

 

키 큰 칸나와 해바라기

봉숭아 채송화가 반겨주는 정든 판교역

이제 이 역사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리라

 

직선화 구간으로 새 역사는

사람이 살지 않는 서쪽 들판으로 이동하고

열차는 흥림저수지를 관통하는 교각을 밟고

기억을 더듬어 작은 터널들을 지나서

서천역과 장항역을 없앤 뒤에야

금강 하구둑을 거쳐 군산으로 달려가리라

 

새 길들은 서쪽으로 남쪽으로 비켜만 가고

이제는 기억 속으로 사라져갈 판교역에서

광장의 늙은 소나무 손목 잘려나간 두팔을 들고

눈 시리게 푸르른 하늘을 지켜보고 있다

 

 


 

 

정완희 시인 / 새들은 농부를 쫓아다닌다

 

 

늦은 봄 들판 한가운데서

트랙터로 써레질하는 농부를 보았다

개선장군처럼 농립을 쓰고 높이 앉아서

무논을 갈고 써레질하는 뒤로

백로와 왜가리들 길들여진 강아지처럼

긴 다리 겅중거리며 쫓아다닌다

뒤집힌 흙에 노출된 우렁이나 미꾸라지 개구리까지

부리에 하얀 날개에 진흙 묻히며 쪼아대는 새들

 

언제부터 그들은 이 들판에서

농부들과 같이 살아가는 친구가 되어

푸르른 하늘을 나란히 바라보게 되었는지

소통이 단절된 세상에 사는 나는 알지 못한다

오늘도 도시에는 촛불들이 짓밟혀 부서지고

온 나라의 승려들과 불자들은 깃발을 들고 일어섰는데

오만과 독선의 탈을 쓴 자들은 두 귀를 막고

언제나 불도저처럼 한쪽 방향으로만 밀고 나아간다

뜨거운 불통정국 속에서도

벼들은 새들과 함께 자라나

이 들판은 아름답구나 눈물겹도록

 

 


 

정완희 시인

1958년 충남 서천 출생, 경남대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공장자동화기계 엔지니어로 근무, 1981년 <시동인>으로 시를 썼으며 2005년 <작가마당>에 '칡넝쿨을 자르며' 외 2편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2007년 <어둠을 불사르는 사랑> <장항선 열차를 타고> <붉은 수숫대> 3권의 시집을 출간. 장항선 열차를 타고는 같은 해 ‘세종도서문학나눔’에 선정됨. 현재 충남시인협회 이사, 서천시인협회 부회장, 빈터 동인, 세종마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