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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원 시인 / 자낙푸르*
ㅡ레일 위에 펼쳐진 좌판 설익은 과일은 아낙네들의 수다로 익어가고 누군가는 선로에 오줌을 누고 있다 아직도 기차는 오지 않는다 해가 한 뼘 기울자 레일이 달아오르고 보따리 상인들은 주섬주섬 철로 밖으로 짐을 옮기고 역은 장터가 된다
ㅡ하루 세 번, 하나뿐인 여덟 량의 기적소리에 놀란 노을이 붉은 가슴을 쓸어내릴 때 자전거가 추월하는 풍경을 매달고 기차는 천천히 국경을 넘어간다
ㅡ달리던 시간도 걸음을 멈춘다 이곳에 오면 풍경도 쉬었다 가고 풀 뜯는 소들의 눈망울과 바람의 손금을 들여다본다 구름의 속도보다 앞서지 않는 사람들 관광객 카메라 셔터는 자낙푸르역을 끌어당긴다 길게 펼쳐진 한낮,
ㅡ기차 지붕에 빼곡하게 걸터앉은 사람들 피난민처럼 매달려간다 덜컹거리는 지붕은 3등석 널빤지 창문에 자전거들이 거꾸로 매달리고 자전거보다 느긋한 속도가 레일 위에 미끄러진다
*네팔에서 인도까지 가는 네팔의 유일한 철도
권여원 시인 / 쇼생크탈출
나는 유채밭에서 태어났다 어느 날 바람에 업혀 건너편 맨홀 구멍에 내려앉았다 내 등뼈엔 나비의 날갯짓과 장다리꽃 가득한 사월의 하늘이 새겨져있다
어둠을 베고 자다가 흐르는 물소리에 목을 축이자 실핏줄처럼 하얀 뿌리가 돋았다 맨홀을 꼭 붙잡았다 흐르는 물길 끝에는 바다가 있었다
하수도 뚜껑으로 떨어지는 달빛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내가 태어난 곳을 향해 키가 한 뼘이나 늘었다 기침을 할 때마다 몸속에 고인 기름이 조금씩 새어나갔다
어둠을 털어내고 흘러온 모래로 둔덕을 만들며 까치발로 바깥을 넘보았다 한줄기 빛을 찾아 맨홀 구멍으로 대궁을 밀어 올리자 눈부시고 목마른 세상이 보였다 햇살이 목덜미에 닿자 노란 꽃이 터졌다
봄볕에 그을린 얼굴을 아슬아슬 스쳐가는 바퀴들 다시 맨홀을 붙잡는다
-<시와세계> 2011년 겨울호
권여원 시인 / 김치가 미쳐갈 때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익은 것도 아니고 생것도 아닌 김치는 미치지 않고는 쓸 수 없는 한 편의 소설 같다 생것 그대로는 소재가 될 수 없어 주인공을 소금에 절여 인생의 쓴맛을 보이고 고춧가루로 가슴에 매운 물을 들인다 인물과 사건을 잘 버무려 걸쭉하게 풀을 쑤는 것이 포인트 조연에겐 톡 쏘는 갓처럼 알싸한 자극을 주고 새우젓같이 무수한 엑스트라는 꼭 필요한 배경이 된다
살리고 죽이는 건 작가의 소관 가끔 숨이 덜 죽은 배추가 살아날 때도 있다 현란한 도마질로 악인의 칼이 되기도 하고 고난에서 퍼 올린 소금의 깊이를 태양에게 묻기도 한다
헛된 일에 소란한 인간의 그림자를 문장 속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나는 냉정한 온도로 발효되어 간다 갓 지은 쌀밥에 잘 익은 김치 한 포기
스토리가 김치처럼 익어가는 사이 남편은 조용히 일어나 밥을 짓는다
-시집 『구름의 첫 페이지』 2018년 시산맥
권여원 시인 / 숲속의 빈방
숲속의 목수 큰오색딱따구리 맞은편 나뭇가지의 속도와 잎맥의 넓이를 예측하고 허공의 각도를 잰다 지붕도 대문도 없는 집 잎사귀를 끌어와 발치고 빗발을 막을 것이다
나무의 둘레를 재고 지름을 긋고 구멍을 파는 순간, 부리는 시속 20km 깎기망치가 되고 드릴이 된다 나무의 등뼈가 시려오고 나이테가 흩날린다 저 노련한 목수에게도 복병은 있다 속을 보이지 않는 단단한 비자나무를 만나 부실공사에 빠지기도 했다 며칠 전 공사를 마친 구상나무, 미루나무 빈방에 지빠귀와 박새가 터를 잡았고 키오롯 키오롯, 노래 한 소절로 등기를 마쳤다 새끼 지빠귀들이 자라 너른 세상으로 날아가면 나무들은 메아리처럼 서서히 물들기 시작한다
쉽사리 빈방이 채워지지 않는 숲 아침마다 장수벌레가 맨발로 올라가 전망 좋은 빈방을 들락거린다 가을이 오면 낙엽 전단지를 날리며 다음 분양을 알릴 것이다
권여원 시인 / 은사시나무의 날개
딱따구리를 품어 기르던 나무는 새가 되고 싶어 가슴에 파인 빈집을 동고비에게 내어준다 은사시나무 꽃을 물고 있던 새들이 붉은 음표를 팔랑거리며 노래를 매달고 있다
삐잇 삐잇,하늘을 가르는 동고비 강가에 떠다니는 안개도 물어오고 바다에 밀려온 파도소리도 담아 상처 난 둥지에 스타카토로 발라준다 허공을 쓸어 담은 나뭇가지가 바람을 붙잡고 지휘를 하면 노을에 물든 막이 오르고 백 년 동안 물에 잠기지 않던 뿌리가 날아오른다
날이 밝기 전 새들을 위해 수액을 짜내는 나무의 손끝이 저려올 때 시오리까지 날아가 소식을 물고 온 동고비가 은빛 세상을 둥지에 넣어준다
창공에 뿌려 놓은 나무의 음표들이 메아리 되어 돌아오는 새벽녁 동고비가 탁본해 온 산 너머의 풍경이 이파리마다 햇살에 반사되어 흔들린다
숲속 너머의 소식을 잘 알고 있는 나무는 자기 몸을 뚫어 섬마을 너머를 날아오르고 있다
권여원 시인 / 어름산이*
허공은 그를 장전하고 있다
콩심기와 허궁잽이를 하는 아찔한 묘기에 튕겨나갈 것 같은 그의 몸 외줄이 저글링하듯 사내를 허공으로 던진다 녹밧줄이 활시위를 잡아당기면 부채 하나로 바람의 눈을 명중한 그의 춤사위에 허공은 반으로 갈라진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구름도 함께 출렁이고 구경꾼의 함성도 멍석 위에 깔린다 새들이 외줄에 앉아 창공의 현을 튕기며 날아가듯 사내를 튕겨낸 외줄 지난 해 바람의 발목에 걸린 사내가 땅의 과녁으로 추락한 적 있었다
그를 기다리는 허공은 그에게 곧 지상 허공이 다시 그를 장전하는 동안 낮달이 조바심으로 지켜본다 늙은 사내는 마지막인 듯 다시 외줄을 오른다
또 누군가를 노리기 위해 허공은 탱탱해질 것이다
*어름산이 : 신의 경지에 다다른 줄타기의 장인을 일컫는 말
권여원 시인 / 그때의 기다림으로
안경이 깨졌다 초점 잃은 시야, 비로소 보이는 망막의 저편 안경은 슬픔을 가리기 좋은 도수를 가졌다 세상은 테 안에 있고 나는 테 밖을 서성인다 눈감으면 느티나무 아래 웅크린, 어린 내가 비눗방울처럼 부풀어 오른다
입학 전에는 돌아올게
나뭇가지에 걸린 엄마의 약속은 바람 불 때마다 떨어져나갔다 겨울햇살은 빈 방보다 따스했고 눈발은 떡 부스러기처럼 흩날렸다 한 뼘이나 자란 나무에 어미 새가 날아오고 친구들 집에는 저녁연기가 피어올랐다 내일이 입학식인데 오지 않는 엄마, 골목 끝에 고정된 시선은 젖어 있었다 지나가는 발자국 소리에 가슴이 철렁해질 때 노을은 저녁만 두고 가버렸다
비눗방울 속에 갇힌 나를 터트려준 건 눈물이었다 다른 것으로는 채울 수 없는 엄마의 체온 수정체는 텅 빈 가슴을 무지개로 굴절시켜 주었다
이제 엄마가 된 나는 그때의 기다림으로 아이들을 위해 저녁을 짓는다
-시집 『구름의 첫 페이지』 2018년 시산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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