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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시인 / 통일의 염원
누구라도 좋을 갈 수 있는 길이라면
가깝고도 멀고 멀고도 가까운 길 벽으로만 존재하는 초병의 경계 모두 풀려라 지평을 가로막고 산야를 에워쌓은 피로 물든 철조망 역사의 숨결 앞에 살아 녹아라
누구라도 좋을 열려오는 문이라면
가로막힌 발걸음아 달려 나아가라 흙먼지가 풀풀 날도록 삼천리금수강산을 깨워라 새싹으로 눈뜨고 꽃으로 피워 맺을 이민족의 영혼 깨워라
누구라도 좋을 오고 갈 염원이라면
가슴 가슴에 얼어붙은 냉가슴아 맺히고 맺힌 설음들아 흐르는 물처럼 풀려가라
닫히고 닫힌 염원의 문 솟는 태양처럼 활활 태워라 태워 없어라 활활 태워 없어라
김영진 시인 / 물
아침 이슬이 맑을 리 없다. 저녁노을은 분진 층을 이루니까
가지 끝 줄기마다 꽃으로 피워내는 비가 맑은 물이 아니다
마침내 여린 씨방은 짓무르고 크는 열매는 속이 끓는다. 늘 푸른 잎 싱그러워도 지는 낙엽은 삭아 썩을 것이 없으니 살아있어도 살아있음이 아니다
흐르는 물소리가 미끄러진다 더는 베풀 수 없는 더는 숨길 수도 없는 누 우 런 부유물이 코끝에 닿는다
흐른 줄만 아는 살비듬에 절은 강, 푸르름이 짙은 줄만 아는 물 비린 기름때의 바다, 지느러밀 곧추 세우지만 혹을 키워 등이 굽을 뿐 가지런히 식탁에 올려 진다
물도 숲도 동물들도 사람들도 하나 같이 거친 숨을 몰아쉰다
굴뚝에서 얻은 산성비로 하수도에서 얻은 양식으로 면역의 깊이가 풀려가는 모습 질병을 넘어선다
쉼 없이 늘어만 가는 병동의 신음, 참으로 슬픈 유산이다.
김영진 시인 / 막걸리나 한잔 들게나
여보 게 친구! 오늘만은 온갖 시름일랑 다 잊고 한잔 들게나. 술이란 건 참 좋은 벗이야 가슴 밑 벽에 쌓인 흉금을 비울 수 있으니 좋고 넉넉하게 웃음 띤 정감이 있으니 좋고 날 가고 달 가는 궁시렁에 해묵은 넋두리에 주거니 받거니 반쯤 반쯤은 얼빠져도 좋을 한잔 술에 든 얼큰할 흥일지니 얼마나 좋은가 첫눈을 떠밀고 오느라 헐떡거리는 이 겨울 동해에서 갓 잡은 양미리란 놈 둬마리 굽고 벌컥벌컥 넘는 막걸리 차디찬 냉가슴을 녹여낼 훈풍이 이보다 더 있겠나. 여보 게 친구! 막걸리나 한잔 들게나.
김영진 시인 / 올레
사람에게 잘 눌리는 난 질경이와 같은 피가 흘러 발에 밟히고도 곧잘 일어난다
넌 모자라다는 말이 수화기 너머로부터 건너왔다 힘껏 살아온 나를 몰아세웠다 난 오히려 사과를 했다
종일 걷다 방파제에 앉아 바라본 바다
해안선이 파도에 사라졌다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초라한 내 모습 잊어버리려 해도 물결 위로 자꾸 튀어 올랐다
"참지 마! 비난을 견딜 나이란 없어! 인정받기 위해 언제까지 속 태울 거야? 빈틈없으려는 강박이 문제야!"
누군가 바다 속에서 걸어 나와 소리쳐주길 바랐다
보름달이 오징어잡이 배 집어등보다 밝다 길가에 피어난 질경이 풀 바다로 가는 나를 마을로 다시 이끌었다
김영진 시인 / 몸에 제라늄이 자란다
거실 베란다 탁자 위 올려둔 제라늄 꽃봉오리들 피어난 모습이 성냥개비 같아 불길 당기고 싶다
농원 주인은 장식대 위에 놓인 제라늄을 골라온 내게 또래가 주로 사가는 꽃이라고 했다
벌레조차 가까이 오지 못하게 지린내 퍼트리는 꽃 누가 다가오면 주로 물러서는 난 틈나는 대로 꽃으로 다가갔다
물주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몸에도 제라늄이 자라는지 누가 날 건들면 몸속에 지독한 냄새가 스멀스멀 솟았다
가끔 내 몸에선 성냥 불꽃 꺼진 뒤 연기에 묻어나던 유황 냄새가 났다
김영진 시인 / 철근 인생
어릴 적 넝마를 덮고 자란 그의 뼈마디는 철근마냥 굵고 단단하다
콘크리트처럼 딱딱하게 굳은 등
문맹인 그에게 술은 말의 시작, 신청서 쓰는 일도 남의 손을 빌려야 했다
막걸리를 마셨나보다 낯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목숨을 끊지 못해 오늘도 찾아 왔다"로 시작한 술주정, 그의 목에서 이따금 쇳소리가 섞여 나왔다
행정복지센터에 가득 찬 술 냄새
소파에 드러누워 누군가에게 말하듯 읊조리더니 오래 지 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철근을 옮기고 공중에 매달려 철사를 조이는 일은 아내 와 아들딸마저 사고로 떠난 그의 삶보다 아슬아슬하지 않다
술기운을 빌어 기초연금 신청하러 온 그는 쇠보다 강한 자존심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김영진 시인 / 수석 2
귀때기는 너풀너풀 톡 불거진 머리뿔 이마빼기에 솟았고 송곳니가 쑥 삐져나온 상판대기 언제 적 도깨비란 별명을 얻었는지 모르나 애꾸눈에 들창코라 참으로 해학이다
빨간 목젖에다 찌그러진 입 보면 볼수록 귀골이 으뜸인게 방망이를 든 틀림없는 사천왕이다
매일보고 또 봐도 복 터지게 웃는다
나도 닮은 웃음 후련하게 웃는다 하하하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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