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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리산 시인 / 러기드 파이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3.
리산 시인 / 러기드 파이터

리산 시인 / 러기드 파이터

 

 

누가 수건을 던져야 이 게임을 끝낼 수 있을까

너덜너덜한 글러브 속 손가락은 부러지고

찢어진 가죽 사이 피가 스며 나와

끄티 보이지 않는 광막한 링 위에 서서

하루에도 몇 번식 해가 지는 걸 봤어

등 뒤에서 슬그머니 떠올랐다 정수리쯤에서 급하게 지던 태양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두 발자국 뒤로 밀리는건

이곳에 늘 높새바람이 흉흉하기 때문이지

비를 뿌리지 않는 메마를 바람

가슴팍을 떠밀며 보이지 않는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울컥울컥 흰 수건 위로 토해지는 검은 담즙들

발목을 담그고 다만 서 있는 거야

먼 데서 불어온 바람 저 혼자 깊어지면

차가운 비를 몰아오기도 한다는 풍문에 기대어

 

 


 

 

리산 시인 / 겨울 전부

 

 

내가 떠나온 그 밤에 폭설이 시작됐다는 말을 들었다

누가 눈보라 치는 들판에 불을 놓았나

눈꽃과 불꽃 사이를 날아다니고 있을 겨울 까마귀들

 

평생 그곳을 그리워했지만 다시는 가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며 같이 웃고 울기도 하다가

다시 만난 기쁨에 손을 꼭 잡고 행복해 하였더라

두 가지 버전의 이야기 사이로 능동과 부정 수동과 긍정 사이로 나부낀다

 

눈이 오지 않던 눈의 땅 눈보라 눈보라를 기다리며

올 것이다 오지 않을 것이다 한 잎씩 떼어내던 꽃잎 점 이파리들

 

안개 낀 국경을 넘어가는 야간열차의 불빛을 바라보며 하루 한 번

한 바구니의 홍합과 꽃가루가 점점이 떠 있는 맑은 차를 구하기 위해

거리의 끝으로 갔었다

 

그런 어떤 밤이면 길을 잘못 든 고라니들은

산기슭으로 난 도로를 따라 숲으로 돌아가고

나는 거리의 끝으로 향하는 지방도로 그 길의 한 가운데

전조등도 상향등도 없이 문득 멈추어 서 있곤 했다

 

어둠의 빈틈을 메우며 어둠과 한 덩어리가 되어 서 있던 그 때

귀신이 귀신을 알아보는 밤이 있었다

 

종일토록 혼선되던 전파도 툭 끊어지고 밤이면 정적만이 송출되던 단파 라디오 소리

제각각 제 모국어로 말하는 그곳의 이름을 칠흑의 전부라고 발음해 보는 밤이 있었다

 

길이 끊어진 곳에서 다시 길을 그리며 떠돌던 그 때 겨울 전부

 

 


 

 

리산 시인 / 인생이 이렇게 어두워서야 쓰겠나 싶어

 

 

어두워지는 행성의 저녁에서

어두워지는 반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한 잔 차를 끓이고 있노라면

 

밤은 비단처럼 부드러워지고

 

한 세월 잊었던 꿈처럼

 

지구의 처마 끝에 매달린 고드름이며

불곰들 연어를 잡던 풀이 무성한 개울 생각

 

있었지 모든 것이 있다고 생각한 날이 있었지

모든 것이 사라졌다고 생각한 날이 있었지

 

밤새 찻물은 끓어오르고

어두워지는 반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인생이 이렇게 어두워서야 쓰겠나 싶어

 

어두워지는 반도 옆에

등불을 걸어둔 적이 있었지

 

고드름이 다 녹을 때까지

지구의 처마 끝에 서 있던 적이 있었지

 

인생이 이렇게 어두워서야 쓰겠나 싶어

 

 


 

 

리산 시인 / 너바나

 

 

 언덕을 넘어 외곽으로 가는 마지막 전차의 종소리도 그친 자정이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입술을 가진 남자와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손톱을 가진 여자가 모여드는 자정 너머 술집에 불이 켜지지

 

 누군가와 어깨를 겯고 먼 곳에서 먼 곳으로 가고 싶은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남자와 금이 간 청동의 술잔에 제 손금을 비추어 보는 여자가 있는 그곳에는, 유효기간이 지난 달력을 찢어 불이 꺼진 화덕에 불씨를 살리고 밀봉된 병 속의 시간을 헐어 작고 단단한 주전자 가득 끓여내는 뜨겁고 진한 국물이 있지

 

 지금 막 일인분의 따뜻한 음식을 사기 위해 어두운 계단을 내려가는 남자와 뜨거운 김이 오르는 노점 식당 앞에 서서 청어 향수가 뿌려진 손수건으로 지워지지 않는 이마의 허기를 닦는 여자

 

 멀리 가는 밤새들 울음 우는 긴 모퉁이 지나 자정 너머 술집에는, 낡은 앨범 속 램프에 그을린 가수의 목소리 흥얼흥얼 타오르는 자정 너머의 화덕, 오래도록 식지 않을 한 스푼의 온기가 있지

 

 


 

 

리산 시인 / 토리노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ㅡ파베세에게 묻지 못한 것들

 

 

 일천구백오십 년 팔월 노리노의 체사레 파베세는 자신의 수첩에 적힌 이름 하나 둘 셋 넷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 같았네 "꺼져"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네

 

 처음엔 낡은 엘피를 전문으로 파는 상점에서 도어즈 혹은 넥스트 두번짼 길모퉁이 서점 한낮의 우울이라는 제목 따위의 책은 말고

 

 그저 무심히 긴 머리칼을 쓸어 넘길 때 희게 드러난 목덜미를 한 번 본 것뿐인데 바람이 불면 누군가는 목이 붓고 미열에 시달리네

 

 마지막이란 말을 말자 생크림으로 만든 파스텔 여백이 많은 흰 공책에라도 마음을 빼앗겼을까 코카 이파리 날리는 저녁에

 

 흰 소들이 어슬렁어슬렁 들판을 돌아오네 늙은 연금술사의 파오에서 푸른 연기가 피어나네 낡은 화덕은 쉼 없이 풀무질을 하기 좋았고 무쇠솥에 그을음은 자랑처럼 깊어가네

 

 이미 있던 외경을 지나 이미 있던 의문문과 이미 있던 암호문을 지나 따로 또 같이 섞여 끓고 있네

 

 새로이 방황하는 저기 새로운 방황하는 화란인 새로이 귀환하는 저기 새로운 귀환하는 그리스인

 

 뭐라도 좋을 이름들의 이름들 따로 또 같이 섞여 부글부글 끓고 있네

 

 A의 가각본 B의 약사 제사기의 제 四기, 뭐 다 그렇고 그런 거라네

 

 


 

 

리산 시인 / 오드아이

 

 

 우리는 말을 했다 평생토록 뒷마당을 서성이며 허블망원경만 들여다본 과학자에 관해 육 년간이나 계속되었다는 화산겨울의 암흑과 칠천사백 년 전 해안선을 따라 이주해 온 순다열도의 원주민에 관해 공과 새와 순록의 소리를 내며 추는 춤과 자정이 돼서야 어두워지는 여름 툰드라, 벼락의 빛으로 나아가는 한밤의 항해에 관해 우리는 말을 했다

 우리는 말을 했다 칼에 꽂힌 양고기를 베어 먹느라 주둥이가 다 해진 늑대와 피 묻은 입술을 닦으며 생각하는 늑대의 먼 전생, 왕궁의 성벽 아래 아무도 믿지 않는 계시의 말을 읊조리던 무녀의 비애에 관해 입술에 입술을 맞대고 맹세하던 이방의 말들에 관해 칠만 년 된 언어의 마지막 구사자인 인도인 노파와 그 죽음에 관해 사기와 조개에 이름이 적힌 자는 추방당한다는 패각추방에 관해

 우리는 말을 했다 패치워크로 감싼 주전자에 두고두고 따뜻한 차를 내려 마시며 우리는 말을 했을 뿐인데 가슴에 꽂힌 칼날들은 다 어디서 온 걸까 이건 또 무슨 풀지 못한 난수표처럼 우리가 깨닫지 못한 채 사멸돼가는 고대의언어인걸까 우리는 말을 했다 서로 다른 구석을 그리워하는 멧새떼처럼 서로 다른 곳에서 온 점령군처럼 우리는 말을 했다

 

 


 

 

리산 시인 / 인디 시인에게 무상급식을

 

 

은빛으로 빛나는 돔 아래 작은방에 있는 듯했지

세계의 지붕에 관한 책을 읽었는데

저기 어느 나라에는 지붕 마이스터라는 직업도 있다 하네

 

나는 무슨 애이불비의 마이스터가 되어

휴가의 마지막 밤 센티멘털 노동자들은 어떤 노래를 듣나

태생이 계면조인 심수봉의 백만 송이 장미를 듣는 밤

이제는 문을 닫고 추억 속으로 사라져간

배고픈 저녁이면 찾아가던 밥집과

화덕에 불을 피워 음식을 내던 식당과

지난해 마지막 눈을 바라보던 나무 창문 안 자리와

 

나는 무슨 측은지심의 마이스터가 되어 생각하네

미열에 시달리는 토요일 저녁

서랍 속 마지막 아스피린도 떨어지고

으슬으슬 해열제를 찾아 거리로 나서면

세상엔 온통 어디론가 전화를 거는 사람들 사람들

 

그럴 때 당신은 어떡하나

나는 무슨 센티멘털의 마이스터가 되어

불멸의 좌파에게 맥주를 부어주던 밤들이 자꾸 생각나

테이블에 올라가 장미꽃 마술을 부리던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던

아무것도 아닌 자들의 아무것도 아닌 고독이

 

비무정 비슬픔 비애인 셀라비

 

 


 

리산 시인

1966년 서울 출생. (본명: 송영미). 2006년《시안》 신인상에 〈장미꽃 무늬가 있는 지극히 개인적인 진단서〉 외 9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 시집 『쓸모없는 노력의 박물관』 『메르시, 이대로 계속 머물러주세요』. 현재 '센티멘털 노동자동맹' 동인으로 활동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