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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민숙 시인 / 김밥 집을 나오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2.
강민숙 시인 / 김밥 집을 나오며

강민숙 시인 / 김밥 집을 나오며

 

 

검찰청이 보이는

김밥 집에서

주먹밥 두 개를 시켜 놓고

나오기를 기다린다.

 

쟁반 위에 가지런히 놓인

주먹밥을 보니

주먹 쥐고 태어났을 때

내 주먹이 보인다.

 

김밥 집 문을 나서며

함부로 까불지 마  

나도 주먹이 있다고

소리쳐 본다.

 

3월 9일 하늘 참 맑다.

 

 


 

 

강민숙 시인 / 나의 새, 나의 시

 

 

새를 그리고 싶었다

아니, 꿈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보아도

내가 그린 것은 새도 꿈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내 그림을 보고

새를 닮은 나무라고 했다

나는 내 그림이 미워

찢어 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아

다시 마음 고쳐먹고 새 그리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새를 그리면 그릴수록

나무 그림만 더 늘어났다

이제 다 던져 버리고 새 그리기를

그만두고 그냥 살기로 했다

한동안 내가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조차도

잊어버리고 그렇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방안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린 나무가 자라

숲이 되어 새소리가 들린 것이다

그 숲에서 불면의 밤으로 그려낸

내 시편들 새가 되어 노래하고 있다

 

 


 

 

강민숙 시인 / 꽃은 바람을 탓하지 않는다

​색이 없다는 것은,

자기의 색깔이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래서 꽃은 색의 의미를 안다.

색을 고르기 위해

뿌리는 어둠 속에서도 잠들지 않는다.

노랑, 빨강, 분홍 옷감을 고르기 위해

꽃은 자기의 목숨을 건다.

그러나, 꽃은

결코 어둠의 옷을 입지 않고

땅속 어둠을 어둠으로 피워내지는 않는다.

보이지 않는 어둠은

향기가 아니라는 것을 꽃은 안다.

눈이 오면 눈이 되고

비가 오면 비가 되는 몸부림으로

돌 틈, 바위 틈서리

부둥켜안고서 혼자 목울음을 운다.

어둠을 뽑아

살이 있는 빛을 피우기 위해

바람의 푸른 눈망울 앞에

바람보다 먼저 고개 숙일 줄을 안다.

엎드려 낮게 엎드려

바람을 탓하지 않는 꽃이 되어

꽃향기가 되어,

꽃은 땅속 어둠을 넘어서 온다...

-시집 『꽃은 바람을 탓하지 않는다』에서

 

 


 

 

강민숙 시인 / 킬링필드

 

 

사람 생각이

똑같지 않다고 소리치는 사람은

우리 편이 아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왜 다르냐고 말하는 사람도

내 편이 아니다

목에 고삐 차고

따라 오라고 이끄는 무리도

같은 편이 아니다

수십, 수백만이 모여서

이룬 크메르 왕국

거대한 무덤의 나라였다.

나이와 성별조차 알 수 없는

뻥 뚫린 두 눈으로

지난 역사를 내려다보는

기념관 앞에서

나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들의 죽음을 생각한다

글자를 알아

한 치쯤 벗어났다고 해서

적이 되는 킬링필드의 나라

가만히 안경 벗고

올려다 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기만 하다.

 

 


 

 

강민숙 시인 / 동진강은 알고 있다

 

 

뒤돌아보며 흐르는 강이 있다

이것은 아니라며

안으로 흐느끼며 흐르는 강이 있다

백제가 지나간 땅

그 넓은 들을 눈물로 적시며

서해로 흐르는 강이 있다

나라가 나누어지면

백성도 나누어진다는 것을

동진강은 알고 있다

천년을 두드려도 길을 열어줄 수 없다고

버티고 선 저 노령산맥 뒤로

살짝 뒷걸음질을 쳐

동쪽으로 흐르고 싶은 강이 있다

동으로 흘러, 신라의 땅 낙동강과

손잡고 싶은 강이 있다

함께 얼싸안고 춤추며

춘추와 계백, 소정방도

이제는 다 부질없다고

아쉬움으로 흘러가는 강이 있다

제 이름 지우지 못하고.

 

 


 

 

강민숙 시인 / 한강

 

 

쉽더라.

그냥 흘러 보내면 되더라.

가만히 누워

흘러 온 만큼만 흘러 보내면 되더라.

쉬엄쉬엄 돌아간다고

빨리 가는 일도 아니더라.

다시 되돌아 갈 수도 없는데

급하게 떠날 일이 아니더라.

앞서겠다고 다투지 않고

가끔 강폭을 넓혔다 줄였다하며

낮게 엎드려 있으면 되더라.

서두르다 넘어져 무릎팍 깨어질 일도 없더라.

댐이 막아서면

빈둥거리며 잠이나 자면 되더라.

아찔한 높이의 낙차에 걸려

뛰어내리다 허리 부러질 일도 없더라.

눈 감고 있어도 가는 길

시시콜콜 따지고들 일이 아니더라.

하지만 쉽게 뛰어들지 마라

함부로 발 담그지도 마라

내 안에

백만 볼트의 전류가 흐르고 있다

태백 검룡소에서

강화까지 뱃길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강이 누구의 친구인가를.

 

 


  

 

강민숙 시인 / 우리는 붉은 혓바닥을 기억한다 2

-이태원 참사 1주기 시청앞에서-

 

 

이제 더 이상 나라는 없다

 

나라가 없는 나라의 국회의사당

홀로 펄럭이는 태극기 앞에

이태원 유가족들이

뚝뚝 눈물 흘리고 있다

임용고시를 앞두고

축제에 구경 갔던 우리 아들딸들이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제 자식까지 잘라버리라고 외치는

저 무리들 목소리가 귀에 쟁쟁하다

 

살고 싶다고, 살아야 한다고

이태원 골목을 넘어

용산과 국회까지 들리도록

집에 가고 싶다고 울부짖던

저 울음이 타는 노을 속에서 더 크게 들린다

 

이제 1년이 지났으니 잊어버리라고

붉은 혓바닥으로 떠들어대는 사람들아

머나먼 이국땅도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인데

그냥 운명 앞에 무릎 꿇고

이름도 얼굴도 없이 훨훨 불사르라는 것인가

 

앞으로 이태원 골목을 말하는 사람들

다시 불 지피려고 모이는 사람들

모조리 수사 대상에 올리고 싶은 건가.

단순한 사고라고 치부해버리고 싶은가

당신들은 누구 핏줄인가

과연 사람 자식인가

꽃 같은 청춘이 이승을 떠도는 것을

이태원 골목은 알고 있다

 

애초부터 안전의식은 없었다는 것을

해도 달도 알고 있으니

붉은 혓바닥으로 더 이상 말하지 마라

 

 


 

강민숙 시인

1962년 전북 부안 출생. 동국대 문예창작학과 석사,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문학박사. 1991년 계간지 '문학과 의식' 등단. 아동문학상과 허난설헌문학상, 매월당문학상, 서울문학상, 법무부장관상 등을 수상했다. 시집 <노을 속에 당신을 묻고> <그대 바다에 섬으로 떠서> <꽃은 바람을 탓하지 않는다> <둥지는 없다> <채석강을  읽다> 외 10여권의 저서가 있음. 아이클라 문예창작원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