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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경순 시인(인천) / 그 바다에 가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2.
박경순 시인(인천) / 그 바다에 가면

박경순 시인(인천) / 그 바다에 가면

 

 

그 바다에 가면

내 잊혀졌던 유년의 꿈도

찾을 수 있고

 

그 바다에 가면

만나지 못해 애태우던

당신을 만날 수 있고

 

그 바다에 가면

흩어지는 생각

모을 수 있고

 

그 바다에 가면

내 존재의 이유도

깨달을 수 있고

 

그 바다에 가면

내가 살릴 수 있는

귀중한 생명이 있다

 

그 바다에 가면

나는 또 다른 내가 되어

다시 태어난다

 

-시집 『그 바다에 가면』에서

 

 


 

 

박경순 시인(인천) / 국수

 

‘국수’ 하고 말하면

떨어지는

눈물 한 방울

국수 한 그릇

국물 한 사발

밥보다 많이 먹던

시절

아!

아버지

국수를 덜어주려면

그릇과 그릇을

붙여야 한다

그대에 나눠주듯

어깨를 바싹 붙여야 한다

내 어린 시절

한 끼 식사로

허기진 가슴

넉넉히 채워 주었던

국수

한 그룻

그리고


 

 

박경순 시인(인천) / 9월, 후포 밤바다에서 가을을 만나다

 

가을은 소리로 다가왔다

밤새 잠들지 못하고

그리움을 울컥 울컥

토해내는 후포바다는

여전히 여름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었다

소나무 숲과

길을 잃은 검은 개 한 마리와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가는 갈매기와

노을을 잊은 후포바다는

등기산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 너머

고기를 잡으러 간

내 아버지와

내 아버지의 아버지는

대게 몇 마리 가슴에 품고

오실는지

녹등, 홍등 등대는

걱정스레 반짝거리고

집을 너무 멀리 떠나온

사람들은

9월, 후포바다에서

먼저 온 가을과 함께

나와,

나를 떠나간 사람과

보랏빛 여름 햇살을

그리고 있다

 

 


 

 

박경순 시인(인천) / 귀향

 

 

모두가 들썩인다

 

점(点)을 잘 친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나 알아

 

꼭 막힌 도로 위에서

곧 닿을 고향 생각에

모든 걸 감수하고 떠나는

용감한 사람들

 

오지 말 걸 그랬어요

폭풍주의보라는데

 

힘겹게 내려온 군산 앞 바다

허옇게 일어나는 파도

 

그는 늘 그랬다

고향 무녀도

문턱에 기대어

막둥이 오길 기다리는 아버지

차마

뵙지 못하고

되돌아 오는 길에

그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이제 고향 닿으면

반겨줄 이

없고

낯선 이들만 늘어가는데

 

고향 무녀도엔

그래도

무녀봉이 반갑다

 

 


 

 

박경순 시인(인천) / 저 혼자 깊어 가는 강

 

 

강물은

그 많은 그리움을 어디에 담고

바다로 가나

 

강가

높이 높이 자란 저 갈대들의 연가

듣고는 있나

 

흐르는 것은

저 강물만이 아니다

 

저 강 깊숙하게

따라 나서지 못하는

이 내 마음도 같이 흐르리

 

강물은

그 많은 그리움을

어디로 가져가나

 

하얗게 부서지는

바다를 만나면

모두 다 주고

어디로 가는 것일까

 

 


 

 

박경순 시인(인천) / 피아노

-노영심

 

 

그녀를 따라 시냇가로 갔지

작은 돌들의 악보로 연주되는 물소리

 

방금 골짜기를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들이 얼굴을 부비며

마가렛을 닮았다고 속삭이더군

 

누군가에게 질투를 불러일으킬

독한 자극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마음속에 자리잡은 질투가

화신처럼 피워올린 꽃이 아니겠냐구

 

시내라고 만만히 볼 일이 아니라서

어떤 여울목에서는

격정으로 튀어오르는 눈맑은 송어들

 

제 이름으로 놓은 징검다리로

한 발짝 두 발짝 그 돌들과 교감하고

 

엷은 안개와 수초로 깊어진 밤을 건너야

닿을 수 있는

오슬로의 아침을 맞이하라고

기어이 내 얼굴 냇물로 말갛게 씻기더군.

 

*오슬로의 아침 ; 노영심이 작곡한 피아노곡

 

 


 

 

박경순 시인(인천) / 해안도로를 달리며

 

 

 참 길다. 혼자 달리기엔 너무 길다. 아암도에 내려 바다를 본다. 난 본래 섬이었어. 난 영원히 섬으로 남길 바랬어. 그의 고백은 늘 그랬다. 곧 없어질 바다를 보고 있다는 것은 고통이었다. 파도소리가 많이 그리울거야.

 

 참 짧다. 하고픈 말 못하고 가슴에 담았다가 바다에 내려놓기엔 너무 짧다. 어쩌면 쓸모없는 매립지로 이 땅에 남겨져 내가 섬이었다는 것을 아무도 모르게 될지도 몰라. 달빛 밝은 밤이면 푸르게 우는 그의 고백을 듣는다. 마음대로 지도를 바꾸는 사람들을 원망하지는 말아. 오늘도 그를 달래러 간다. 세상엔 자기 맘대로 할 수 없다는 게 많다는 것을 오늘은 꼭 들려주어야지. 그리고 나도 고백할거야. 나도 섬이 되고프다고.

 

 


 

박경순 시인(인천)

1962년 인천에서 출생. 1991년 <시와의식> 신인상으로 등단. 인하대학교 대학원 졸업. 행정학박사. <한국수필> 신인상, 인천예총 예술상, 제24회 인천문학상, 2017 여성1호상, 제27회 전국성인시낭송대회 최우수상을 수상. 시집 『새는 앉아 또 하나의 시를 쓰고』 『이제 창문을 내는 일만 남았다』 『바다에 남겨 놓은 것들』 『그 바다에 가면』. 시 쓰는 해경, 첫 여성 경감. 울진해양경찰서장을 지냈으며 중부지방해양경찰청에 재직하다가 현재 천안 해양경찰직무교육훈련센터에 근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