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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전동균 시인 / 매화, 흰빛들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2.
전동균 시인 / 매화, 흰빛들

전동균 시인 / 매화, 흰빛들

 

 

뒤뜰 매화나무에

어린 하늘이 내려와 배냇짓하며

잘 놀다 간 며칠 뒤

 

끝이 뾰족한 둥근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서,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세상의

길 위로 날아가는

흰빛들

 

아픈 생의 비밀을 안고 망명하는

망명하다가 끝내 되돌아와

제자리를 지키는

저 흰빛의

저 간절한 향기 속에는

 

죄짓고 살아온 날들의 차디찬 바람과

지금 막 사랑을 배우는 여자의

덧니 반짝이는 웃음소리,

한밤중에 읽은 책들의

고요한 메아리가

여울물 줄기처럼 찰랑대며 흘러와

흘러와

 

새끼를 낳듯 몇 알

풋열매들을

드넓은 공중의 빈 가지에 걸어 두는 것을

점자처럼 더듬어

읽는다

 

 


 

 

전동균 시인 / 거돈사지(居頓寺址)

 

 

숲은 의연하다,낭자한 허기와 피비린내 속에서

 

누구도

제가 지닌 가난보다 더 높게

더 낮게 살 수는 없으나

바라볼 때마다 나무들은

모습이 달라지고

이름이 바뀌고

약 같은 풀냄새

풀냄새 속으로 들어와 눕는

여름의 그림자들

숨어야지 숨어서 피어야지 그래야 꽃이지

사라진 절은 여전히 살아 있고

주춧돌들은 안간힘 다해 허공을,그 너머를 떠받치고

손금을 몇 부러뜨리며 나는

내 몸을 빠져나와

햇볕의

윙윙대는 적막의

가장 깊은 안쪽으로,먼 바깥으로 걸어가고 있으니

절터에 집을 지은

낯선 사람들,

두런대는 흙들의 사투리에게로

 

 


 

 

전동균 시인 / 멀리 먼 곳에 더 먼

 

 

나무를 휘감아 올라가는 덩굴들,저것은 싸움일까 놀이일까싸움이라기엔 즐겁고놀이라기엔 어쩐지 장엄

싸움과 놀이 사이에 한 생이 있고그늘은 때로 반짝이며 출렁이는데나는 약봉지를 들고 서서공복의 담배를 태우네

채혈주사기 속 내 피는 붉었으나사라져 돌아오지 않는 기억들화물을 가득 싣고 덜컹 덜컹공중을 달리는 검은 트럭들

짧은 휴식이 끝나면남의 것 같은 몸을 데리고 나는 걸어가야 하네오래 살았지만 낯선 도시와스마트폰에 고개 묻은 사람들,눈물로 켜지는 성전의 촛불들을 지나

멀리 먼 곳에 더 먼 곳이 있으니*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여기 이곳키가 작고 얼굴이 까만 당신이내 모습을 뚫고보일 듯 말 듯 웃으며 지나가는 시간에게로

 

*오정국 시 「그곳이 어딘들」에서

 

 


 

 

전동균 시인 / 어쩌자고 부산에 봄눈이 내리고

 

 

걷다보니 구포시장 국밥집이었다

백 년은 된 듯 허름했다

죽은 줄 알았던金宗三씨가

국밥그릇을 나르고 있었다

얼굴이 말갰다

눈빛도 환했다

여전히 낡은 벙거지를 쓰고 있었다

허리에 찬 전대가 불룩했다

설렁탕이며 해장국이며 깍두기를

딱딱 제자리에 갖다주었다

뜨건 국물을 가득 부어주었다 공손하였다

두 병째 소주를 시키자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왼쪽 벽을 가리켰다

‘소주는 각1병’적혀 있었다

삐뚤삐뚤 아이 글씨였다

 

-詩전문 계간지『포엠포엠』2018년 가을호-

 

 


 

 

전동균 시인 / 남춘천역

 

 

 남춘천역 철로변, 몸통이 잘려 썩어가는 나무를 덩굴손이 휘감아 오르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삶은 저렇게 죽음에 세 들어 있는 것인지, 푸르고 여린 신생의 잎과 줄기들이 안간힘 다 해 몸 뒤틀며 오르다가, 유월의 햇빛에 눈이 부신 듯 멈칫대다가 마침내 죽은 나무의 끝, 더 이상 갈 곳 없는 허공에서 길을 잃고 잔바람에 흔들렸습니다.

 

 잠시 멎었던 열차가 덜컹대며

 다시 떠나가는 사이,

 

 그 흔들림 속에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無量壽殿같이 넓고 큰 강물 하나 저 혼자 출렁이구요. 한 손에 손주를 잡고 다른 한 손엔 김치통을 들고 힘들게 철로를 무단횡단하는 노파의 그림자가 물결처럼 오래오래 부서졌습니다. 매 맞은 데 없이 아팠습니다.

 

 


 

 

전동균 시인 / 쯔쓰 비…쯔쓰…

 

 

허공의 집, 아파트도

가을이 되면 마당 하나 가지는 것일까

불 꺼진 베란다에서 울리는

풀벌레 소리

 

저 소리는

나뭇잎, 나뭇잎들이 만월의 달빛에 수런대는 소리

하루 일을 다한 누렁소가

크고 순한 눈을 꿈벅대는 소리

아, 지난봄 세상을 떠난 가난한 이의

차마 다 떠나지 못한 마음이

골목길을 서성이는 소리

 

쯔쓰 비…쯔쓰…

 

내가 다가서면 뚝 끊어지고

돌아서면 다시 이어지는 소리의 길을 따라

베란다가 흘러가고, 가구들이 흘러가고

잠든 아이와 아내마저

가뭇없이 흘러가

 

이 세상은 꼭 상갓집 같은데

혼자 남은 나는

눈도 귀도 지우고, 거짓말 많이 한

혓바닥도 잘라내고 싶은데

 

쯔쓰 비…쯔쓰…

 

내가 없는 곳마다, 저토록 눈부시게

눈부시게 반짝이는

그리운 것들

 

 


 

 

전동균 시인 / 주먹눈

 

 

눈 내리는 밤, 야근을 하고 들어온

중년의 시인이

불도 안 땐 구석방에 웅크리고 앉아

시를 쓰는 밤, CT를 찍어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편두통에 시달리며

그래도 첫마음은 잊지 말자고

또박또박 백지 위에 만년필로 쓰는 밤,

어둡고 흐린 그림자들 추억처럼

지나가는 창문을 때리며

퍼붓는 주먹눈, 눈발 속에

소주병을 든 金宗三이 걸어와

불쑥, 언 손을 내민다

어 추워, 오늘 같은 밤에 무슨

빌어먹을 짓이야, 술 한잔하고

뒷산 지붕도 없는 까치집에

나뭇잎이라도 몇 장 덮어줘, 그게 시야!

 

 


 

 

전동균 시인 / 마흔이 넘는다는 것은

 

 

가장 추운 겨울 날

식구들 몰래

풍경 하나 매다는 일

 

밀물이 들 듯

밀물에 배가 떠올라 앞으로 나아가듯

울리는 풍경 소리에

멀리 있는 산이 환하게 떠오르면

그 산 속, 배고픈 짐승의

흩어진 발자국 같은 것도 찾아보는 일

 

마흔을 넘는다는 것은

 

찬바람 속에 풍경하나 매달고

온종일 그 소리를

혼자 듣는 일

풍경 속에 잠든 수많은 소리를 모셔 와, 모셔 와

그 중 외롭고 서러운 것에게는

술도 한 잔 건네는 일

 

더러는 숨을 멈추며

싸락눈처럼 젖어드는 고요에

아프게, 아프게 금이 가는 가슴 한쪽을

오랫동안 쓸어 주는 일

그 끝에 반짝이는

검은 우물을 잠시 들여다보는 일

 

 


 

전동균 시인

1962년 경북 경주 출생. 중앙대 문예창작과와 중앙대 예술대학원 졸업. 1986년 《소설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오래 비어 있는 길』 『함허동천에서 서성이다』 『거룩한 허기』 『우리처럼 낯선』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 산문집 『나뭇잎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