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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균 시인 / 매화, 흰빛들
뒤뜰 매화나무에 어린 하늘이 내려와 배냇짓하며 잘 놀다 간 며칠 뒤
끝이 뾰족한 둥근 잎보다 먼저 꽃이 피어서, 몸과 마음이 어긋나는 세상의 길 위로 날아가는 흰빛들
아픈 생의 비밀을 안고 망명하는 망명하다가 끝내 되돌아와 제자리를 지키는 저 흰빛의 저 간절한 향기 속에는
죄짓고 살아온 날들의 차디찬 바람과 지금 막 사랑을 배우는 여자의 덧니 반짝이는 웃음소리, 한밤중에 읽은 책들의 고요한 메아리가 여울물 줄기처럼 찰랑대며 흘러와 흘러와
새끼를 낳듯 몇 알 풋열매들을 드넓은 공중의 빈 가지에 걸어 두는 것을 점자처럼 더듬어 읽는다
전동균 시인 / 거돈사지(居頓寺址)
숲은 의연하다,낭자한 허기와 피비린내 속에서
누구도 제가 지닌 가난보다 더 높게 더 낮게 살 수는 없으나 바라볼 때마다 나무들은 모습이 달라지고 이름이 바뀌고 약 같은 풀냄새 풀냄새 속으로 들어와 눕는 여름의 그림자들 숨어야지 숨어서 피어야지 그래야 꽃이지 사라진 절은 여전히 살아 있고 주춧돌들은 안간힘 다해 허공을,그 너머를 떠받치고 손금을 몇 부러뜨리며 나는 내 몸을 빠져나와 햇볕의 윙윙대는 적막의 가장 깊은 안쪽으로,먼 바깥으로 걸어가고 있으니 절터에 집을 지은 낯선 사람들, 두런대는 흙들의 사투리에게로
전동균 시인 / 멀리 먼 곳에 더 먼
나무를 휘감아 올라가는 덩굴들,저것은 싸움일까 놀이일까싸움이라기엔 즐겁고놀이라기엔 어쩐지 장엄 싸움과 놀이 사이에 한 생이 있고그늘은 때로 반짝이며 출렁이는데나는 약봉지를 들고 서서공복의 담배를 태우네 채혈주사기 속 내 피는 붉었으나사라져 돌아오지 않는 기억들화물을 가득 싣고 덜컹 덜컹공중을 달리는 검은 트럭들 짧은 휴식이 끝나면남의 것 같은 몸을 데리고 나는 걸어가야 하네오래 살았지만 낯선 도시와스마트폰에 고개 묻은 사람들,눈물로 켜지는 성전의 촛불들을 지나 멀리 먼 곳에 더 먼 곳이 있으니*나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테니 여기 이곳키가 작고 얼굴이 까만 당신이내 모습을 뚫고보일 듯 말 듯 웃으며 지나가는 시간에게로
*오정국 시 「그곳이 어딘들」에서
전동균 시인 / 어쩌자고 부산에 봄눈이 내리고
걷다보니 구포시장 국밥집이었다 백 년은 된 듯 허름했다 죽은 줄 알았던金宗三씨가 국밥그릇을 나르고 있었다 얼굴이 말갰다 눈빛도 환했다 여전히 낡은 벙거지를 쓰고 있었다 허리에 찬 전대가 불룩했다 설렁탕이며 해장국이며 깍두기를 딱딱 제자리에 갖다주었다 뜨건 국물을 가득 부어주었다 공손하였다 두 병째 소주를 시키자 완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왼쪽 벽을 가리켰다 ‘소주는 각1병’적혀 있었다 삐뚤삐뚤 아이 글씨였다
-詩전문 계간지『포엠포엠』2018년 가을호-
전동균 시인 / 남춘천역
남춘천역 철로변, 몸통이 잘려 썩어가는 나무를 덩굴손이 휘감아 오르고 있었습니다. 언제나 삶은 저렇게 죽음에 세 들어 있는 것인지, 푸르고 여린 신생의 잎과 줄기들이 안간힘 다 해 몸 뒤틀며 오르다가, 유월의 햇빛에 눈이 부신 듯 멈칫대다가 마침내 죽은 나무의 끝, 더 이상 갈 곳 없는 허공에서 길을 잃고 잔바람에 흔들렸습니다.
잠시 멎었던 열차가 덜컹대며 다시 떠나가는 사이,
그 흔들림 속에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無量壽殿같이 넓고 큰 강물 하나 저 혼자 출렁이구요. 한 손에 손주를 잡고 다른 한 손엔 김치통을 들고 힘들게 철로를 무단횡단하는 노파의 그림자가 물결처럼 오래오래 부서졌습니다. 매 맞은 데 없이 아팠습니다.
전동균 시인 / 쯔쓰 비…쯔쓰…
허공의 집, 아파트도 가을이 되면 마당 하나 가지는 것일까 불 꺼진 베란다에서 울리는 풀벌레 소리
저 소리는 나뭇잎, 나뭇잎들이 만월의 달빛에 수런대는 소리 하루 일을 다한 누렁소가 크고 순한 눈을 꿈벅대는 소리 아, 지난봄 세상을 떠난 가난한 이의 차마 다 떠나지 못한 마음이 골목길을 서성이는 소리
쯔쓰 비…쯔쓰…
내가 다가서면 뚝 끊어지고 돌아서면 다시 이어지는 소리의 길을 따라 베란다가 흘러가고, 가구들이 흘러가고 잠든 아이와 아내마저 가뭇없이 흘러가
이 세상은 꼭 상갓집 같은데 혼자 남은 나는 눈도 귀도 지우고, 거짓말 많이 한 혓바닥도 잘라내고 싶은데
쯔쓰 비…쯔쓰…
내가 없는 곳마다, 저토록 눈부시게 눈부시게 반짝이는 그리운 것들
전동균 시인 / 주먹눈
눈 내리는 밤, 야근을 하고 들어온 중년의 시인이 불도 안 땐 구석방에 웅크리고 앉아 시를 쓰는 밤, CT를 찍어도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편두통에 시달리며 그래도 첫마음은 잊지 말자고 또박또박 백지 위에 만년필로 쓰는 밤, 어둡고 흐린 그림자들 추억처럼 지나가는 창문을 때리며 퍼붓는 주먹눈, 눈발 속에 소주병을 든 金宗三이 걸어와 불쑥, 언 손을 내민다 어 추워, 오늘 같은 밤에 무슨 빌어먹을 짓이야, 술 한잔하고 뒷산 지붕도 없는 까치집에 나뭇잎이라도 몇 장 덮어줘, 그게 시야!
전동균 시인 / 마흔이 넘는다는 것은
가장 추운 겨울 날 식구들 몰래 풍경 하나 매다는 일
밀물이 들 듯 밀물에 배가 떠올라 앞으로 나아가듯 울리는 풍경 소리에 멀리 있는 산이 환하게 떠오르면 그 산 속, 배고픈 짐승의 흩어진 발자국 같은 것도 찾아보는 일
마흔을 넘는다는 것은
찬바람 속에 풍경하나 매달고 온종일 그 소리를 혼자 듣는 일 풍경 속에 잠든 수많은 소리를 모셔 와, 모셔 와 그 중 외롭고 서러운 것에게는 술도 한 잔 건네는 일
더러는 숨을 멈추며 싸락눈처럼 젖어드는 고요에 아프게, 아프게 금이 가는 가슴 한쪽을 오랫동안 쓸어 주는 일 그 끝에 반짝이는 검은 우물을 잠시 들여다보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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