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조옥엽 시인 / 이름 붙이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2.
조옥엽 시인 / 이름 붙이기

조옥엽 시인 / 이름 붙이기

 

 

무슨 뜻일까

 

수없이 많은 이름 다

제쳐두고 붙여진 이름

 

망종화

 

어떤 이름은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굴레가 되어 사람을 닦달해대지

 

음으로

양으로 조종하지

 

본인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그저 사람들의 편의에 따라 붙였을 이름

 

망종화

 

부를 때마다 미안해지는

호명될 때마다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꽃

 

망종화

 

-시집 <거실에 사는 고래>에서

 

 


 

 

조옥엽 시인 / 고래

 

 

남편이 거실에서 자고 있다

오늘은 어느 바다를 헤엄치다가

귀향했는지 탈탈거리는 엔진소리가

한밤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몸 누일 둥지를 틀고

식구를 먹여 살린다는 건

거친 바다에 몸을 던지는 일

어둠을 뚫고 용케

어리바리한 물고기 몇 마리

건져 올려 하루를 접고 짠물에

절은 삭신 막걸리 몇 잔으로

달래 바닥에 눕히고 잠든 남편

잠결에도 압박감에 짓눌려

바다와 교신 중인지 간간이

미간을 찌푸린다

하루 치의 엔진오일을

보충하고 소진하는 과정으로

수수 년 이어져 온 생

숱한 고비들을 넘기고 다시

이어지는 날들이 기적 같은데

충전을 다 마쳤는가

뱃고동 소리 내뿜던 거실은 고요해지고

나는 주유기를 빼 제자리에

돌려놓고 정적이 주는 평화를

양손에 꼭 쥐고 돌아눕는다

 

 


 

 

조옥엽 시인 / 일 그램의 무게

 

 

동사무소에 사망신고를 하러 갔다

 

직원이 내민 용지에

그녀의 출생 연월일과 사망 연월일, 사망 사유

 

딱 세 칸을 적고 나니 일이 마무리되었다며

직원이 흘끗,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다음 대기 번호를 부른다

 

돌아오는 길 내내 종이 한 장에 담긴

사람의 무게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지구의 등에 업혀 태양을 아흔두 바퀴나 돌았던 그녀

그 시간을 모조리 쓸어 담은 종이 한 장

 

꼭 쥐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어떤 일은 너무 가벼워서 사람을 짓누른다

 

밥 한 숟갈에도 이르지 못할 무게로 남은 생

일 그램도 채 안 될 생의 흔적이 무겁기만 하다

 

-시집 {거실에 사는 고래}에서

 

 


 

 

조옥엽 시인 / 독설

 

 

 수십 년 낮과 밤이 쌓은 단단한 철벽 단숨에 뚫고 나타났다 산산한 가슴 찌르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날렵한 야수

 

 놈이 어디에 사는지는 아무도 몰라

 몸통도 얼굴도 색깔도 정년도 없는 유령, 날이 갈수록 혈기왕성 기세 등등 단언 컨데 놈의 가슴에 불로초 이파리 무성한 게 틀림 없어

 

 예고 없이 들이닥쳐 순식간에 번쩍이는 면도날 가슴팍에 들이대 한 점 한 점포 떠 접시에 담아 놓고 유유히 사라졌다 핏기 가실만하면 다시 나타나 칼날 들이대

 

 덧난 상처 딛고 올라가는 가풀막 그 끝이 어딘지 나는 몰라

 

 남몰래 소리 죽여 울던 시간이 만든 꼬부랑길 돌고 돌아가다 한숨 돌리려 들면 또다시 코앞 가로막는

 거듭거듭 곱씹어 봐도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뼈아픈 바늘들

 

 삼키지 못한 말에는 불생불멸의 날개가 있어

 

 


 

 

조옥엽 시인 / 명자꽃 피는 밤

 

 

꺼져버린 불빛 같은

이름 하나

 

명자

 

문득 떠올라

가만히 부르면

 

외딴집

외로운 그 가시나가

금방이라도 달려 나와

 

내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릴 것만 같아

차마 부르지 못하고

 

한참을 바라만 보다가

무담시 서러워져서

돌아가는 봄밤

 

명자꽃 피는 밤

 

 


 

 

조옥엽 시인 / 허물

 

 

재활용 의류 수거함 위에

한 켤레 신발이 놓여 있다

 

작고 귀여운 소녀 하나 반듯이 서 있다.

 

손짓하면

곧장 걸어 나올 듯

 

부동의 자세로

대기 중인

 

사랑스런 소녀

 

바닥에 엎드려

귀 열고 있으면

 

한 아이가 걸어 나가고

한 아이가 다가오고 있는

 

발걸음 소리

 

우주의 비밀 한 가닥이

살짝 옷깃을 들추는 아찔한 순간

 

휘파람새 한 마리 날렵하게 허공으로 치솟는다

 

 


 

 

조옥엽 시인 / 지구의 동승객들

 

 

그해 겨울, 마지막 달력 한 장이 찢어진 치맛자락처럼 바람에 펄럭일 때

당분간 여행을 떠나신다고 들었습니다

모처럼 접어 두었던 날개를 활짝 펴시는구나

부러웠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당신의 행선지가 병원이라는 걸 알았지요

마음속 묵은 공기와 풍경을 들어내고 새 필름을 끼워 넣는 일이 여행이라면

낡은 장기의 부분 부분을 잘라내는 일도 여행이라 할 수 있겠지요

어느 고요한 밤, 별의 날개 타고 이승에 오신 당신은 지금 다시 별의 날개를 빌어

잠시 나들이 속의 나들이를 하는 중이라 말 할 수 있겠지요

다만 귀가 일정을 알 수 없는 여행이라는 점이 다를 뿐

그러나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당신뿐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 당신처럼 일정을 알 수 없는 여행 중입니다

코트 안주머니 깊숙이 근심 걱정을 숨기고 모든 게 순조로운 듯, 평화로운 듯 천연스레 얼굴에 미소까지 골고루 펴 바르고

일정을 불문에 붙인 지구라는 여객기에 몸을 싣고 지난한 여행을 하는 중입니다

당신이 우리이고 우리가 곧 당신입니다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운명체입니다

 

 


 

조옥엽 시인

전남 구례에서 출생, 순천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2010년 《애지》로 등단. 시집 『지하의 문사文士』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