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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안덕 시인 / 외눈박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2.
정안덕 시인 / 외눈박이

정안덕 시인 / 외눈박이

 

 

 초점 잃은 눈을 무작정이라 하자 왼쪽 눈이 오른쪽 눈보다 속도가 빠르다면 사물은 오차 사이에서 허둥거린다

 

 가까워진다고 생각했는데 점점 멀어지고 있다

 

 허방을 더듬는 손짓

 눈과 눈이 만나는 지점에서 사물이 생각난다고 하자 도달하는 속도가 다른 두 눈 사이에서 사물들은 생겨나고 사라진다

 

 왼쪽에서 오른쪽 눈으로 눈 깜짝할 사이

 세상은 바뀐다

 

 우리 모두는 외눈박이

 눈 밖에 나면 부지할 수 없는 목숨들

 눈과 눈 사이에서 사라지는 것은 환각

 

 왼쪽에 있는 것들은 오른쪽에도 있고

 오른쪽에 있는 것들은 왼쪽에도 있다

 눈과 눈 사이를 여행이라 하자

 

-시집 <네거리를 건너가는 산>에서

 

 


 

 

정안덕 시인 / 나비 부인

 

 

부채에 바람이 있을까

있다

그러면 부채는 언어도 있겠다고 너는 말을 건넨다

이모는 왜 결혼하지 않았을까

이모는 단어가 부족한 시를 좋아했다

왼손잡이였기 때문일까

부채는 이모의 손이 낯설다

바람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분다

줄무늬가 있으면 더 시원하다

나비를 꿈꾸는 부채가 있다

접히는 날개에서 쏟아지는 소리는 죽은 말이다

이모는 남자가 없다

남자를 꿈꾼 적도 없는 이모는 일본 그림에서 튀어 나왔는지

왼손으로 부채를 부치며 나비를 부른다

 

부채처럼 팔랑이는 꽃이 있다 부채는 꽃이고 싶어 했다

이모는 어제도 내일도

‘어떤 갠 날’에서 나비를 부른다

 

 


 

 

정안덕 시인 / 가족

 

 

나를 넘기면 네가 있다

 

엄마는 말했다

이번만 잘 넘기면 괜찮을 거라고

 

아빠의 눈동자는

수 없이 페이지를 넘겼고

 

우리들은 자신의 페이지에

들어앉아 꼼짝할 수 없었다

 

엄마는 계절마다 이번만 넘기면, 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아빠의 눈은 번뜩였다

 

우리는

저마다의 허들을 갖고 있다

 

어디에나 비탈진 고갯길은 있다

 

내가 너를 넘고 네가 나를 넘듯이

그것은 다 함께 어깨를 두르는 일이다

 

 


 

 

정안덕 시인 / 바람의 신발

 

 

밤이 새하얗다.

내 잠위로 기차가 지나간다.

 

마음이 가난할수록 꽃은 더 아름다운가.

생살을 찢고 피어난 애잔한 목련

달빛에 눈이 시리다.

 

한평생 파티만을 꿈꾸던 오빠

약속된 어음이 불꽃놀이처럼 하늘 높이 펑펑 사라지던 날

 

두꺼비 몇 마리 꿀꺽꿀꺽 목젖에서 그네를 뛰고

전신주 비틀비틀 헛발질에 가로등 불빛은 길을 잃었다.

 

입을 줄이고 배를 주리고 햇빛을 줄이면 우리는 달의 가족이 될까.

 

아우성 소리에 잠을 접은 아침 속으로

빨간 장미 부스럭부스럭 앞 다투어 목을 내민다.

 

어깨 위로 바람의 신발이 무겁다

 

 


 

 

정안덕 시인 / 새의 울음에 싹이 트고

 

 

겨울은 뒷짐 지고 슬금슬금 떠나가는데

30 형광등 파드닥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단잠이 깬다.

 

어깨 너머로 날아간 검은 비닐봉지는

어둠을 끌고 다니는 새

 

버선목에 스며든 봄, 손끝에 나비가 날고

아이들 사라진 빈 놀이터에 민들레가 기지개를 켜면

낮달 살포시 내려앉아 꾸벅꾸벅 존다.

 

노루꼬리만큼 남은 겨울, 봄으로 밀려가는 길목에

태양의 긴 손가락이 이마를 간질인다.

 

마당에 떨어진 새의 울음소리에서

파릇파릇 싹이 돋고

먼 산 아지랑이 눈가에 잔주름으로 걸렸다.

 

 


 

 

정안덕 시인 / 혜윰

 

 

사월, 씀바귀꽃 무리 지어 노랗고

하늘은 울먹울먹

 

내 안의 돌조차 흔들리는

기억의 메스꺼움

 

사그랑이가 된 엄마의 미소를 따라 흩날리는

푸슬푸슬한 송홧가루

 

봄의 화첩 속

깊은 눈

여기저기 쫑긋거리는 봄으로 돋고

 

 


 

 

정안덕 시인 / 남산 타워에서

 

 

 타워휴게실에 앉아 남산에 펼쳐진 가을을 바라본다. 빨강, 노랑, 갈색의 단풍잎들 사이로 찬바람이 잔가지를 흔든다. 까치 한 마리 가지 끝에 위태롭게 앉아 있다.

 막 서울에 올라온 열여덟 그때의 흑백사진이 흔들린다.

 

 처음 내려다본 서울, 회색 빌딩 사이로 개미처럼 시꺼먼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나갔다. 멍한 채 하루해가 지도록 돌이 되어 앉아 있던 무거운 시간.

 

 오십여 년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발길을 옮긴다. 거센 바람이 나무를 들썩인다. 마지막을 불태우던 단풍잎들이 우수수 날린다. 빨강 단풍잎 하나, 허공을 돌다가 내 발치에 떨어진다.

 

 


 

정안덕 시인

1848년 전남 나주 출생. 숭의여대 미디어 문예창작과 졸업. 2014년 《한국인 문학》 수필 등단. 2018년《창작21》 신인상으로 등단. 수필집 『하늘의 별을 따라고 하세요』. 한국문학비평학회 학술상, 시집 <연두공을 치는 여자> <네거리를 건너가는 산>. 세계한인문학가협회 이사.  창작 21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