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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맹 시인 / 흑백사진을 벽에 걸다
한 여자 검은 방에 갇혀 있습니다.
박제된 새들이 사방 벽에 걸린 노려보는 시선 외에는 아무것도 시간 속에서 할 것이 없어 흑백으로만 음영 지워진 텅빈 내부의 방
외부가 없는, 내부를 뒤집어도 밀가루 반죽처럼 물컹거리며 다시 내부가 쏟아져 나오는, 날아오를 수 없는 시선 그 검은 방 한 남자가 갇혀 있습니다.
박제된 새들의 내부를 채운 톱밥 같은 밤들이 고여 있는 늪. 죽은 자들은 그저 그 삶에서 가라앉아 버리고 가볍고 텅빈 내부의 방 외부가 없는 죽음
사랑받지 못해 차라리 죽고 싶고 죽이고 싶은 그러니, 바보 같은 그 검은 늪의 함정. 타인의 얼굴이 찍힌 흑백 사진, 우리들의 빈 방.
노태맹 시인 / 벽암록을 읽다. 3
1. 비 오는 무리 속에서 밝은 달 보이고 불길로 가득한 계곡에서 맑은 물 길어 마시려 하네. 고개 들어 길로 들어서니 머리가 땅에 닿고 한 숨 돌리려 너럭바위에 기대 누우면 다리만 하늘에 가 닿네. 나귀를 거꾸로 타고 마을의 獅子를 쫓고 마른 갈대 꺾어 오늘 죽은 자들 채찍질하니 밝은 달과 맑은 물이 썩은 흙으로 구멍마다 쏟아지는구나. 말해보라, 이것이 무슨 시절인가? 論해보라, 이것이 누구의 甲乙丙丁인가?
2 강을 지나자 체어맨이 울음소리를 낸다. 겨울 안개 속 길가에 차를 세우고 울음이 그칠 때까지 젖은 메타세쿼이아 나무를 보다.
지난 2009년 쌍용자동차 대규모 정리해고 당시 희망퇴직한 강모 씨(53)의 사망소식이 뒤늦게 알려졌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에 따르면 지난 1월 20일 강씨가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강씨의 건강이 희망퇴직 이후 갑자기 악화된 것으로 확인돼, 쌍용차지부는 구조조정에 대한 스트레스를 사망원인으로 제기하고 있다. 쌍용차지부는 정확한 사망원인 확인과 대책 마련을 논의 중이다. 쌍용차에서는 2009년 4 월부터 강씨까지 모두 20명의 노동자와 가족이 스트레스성 질환과 자살 등으로 사망했다. (미디어충청, 20121.30.)
이를테면 난 항상 누군가의 죽음을 싣고 가는 중이었던 거다.
3. 마루에 들여놓은 벤자민 이파리가 툭툭툭 지고 있다. 지긋지긋하다, 고 20년 전에 썼는데 이제는 그저 바라보기만 한다. 나 늙어가고 있는 건가?
노태맹 시인 / 벽암록을 읽다. 5
1. 머리 흰 중이 길을 가며 중얼거렸다.
오대산 위 구름은 저 혼자 밥을 짓고 고불당 앞 배고픈 개는 하늘에다 오줌을 누네. 진흙 부처는 강을 건너지 못하여 강 저편에서 세 명의 도둑들만 떡을 먹고 화투를 치네.
머리 검은 중이 길을 가다 멈추고 뒤돌아보았다.
동쪽의 소에게 쇠별풀을 먹이니 서쪽의 말이 배가 불러 앞발을 드네. 급한 마음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의사를 불러다가 흰 돼지 왼쪽 허벅지 위에 침뜸을 하네.
머리 붉은 중이 노래를 멈추었다. 어이할까, 江이여
한 손에 푸른 칼 들고 무장무장 투명해지는 무소를 몰고 가네. 헛되이 헛되지 않게 다리 위를 지나노라니 다리만 흐르고 강물은 흐르지 않네.
2 기억의 주름들이 집들을 세워 올리고 주름 잡히지 못한 기억들은 뭉글뭉글 뭉쳐져 구름이 되고 산이 되고 숲이 되었네. 나는 모든 것의 모든 것, 그리하여 나는 나로부터 미끄러져 내리는 축축한 不在들.
허나 百日紅이며, 이 산 꼭대기에서 너를 부르고 저 숲으로 달려가 내가 대답하네. 동어반복의 革命, 헐떡거리는 이 붉은 종말론. 당신은 당신의 不在 속에서만 빛나는 百日을 지나왔고 나의 미래는 나의 不在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라면
하여 우리 아무것도 보지 못하리라. 너를 사랑한다는 이 순간조차 주름 접혀져 사랑 아닌 순간들만이 먼 훗날 그 사랑을 펼쳐보리니 百日紅이여, 너는 과거를 꽃 피우는 現在 그리하여 너로부터 미끄러져 내리는 不在의 붉은 꽃들.
헛되이 헛되지 않게 다리 위를 지나노라니 다리도 흐르고 붉은 강물도 흐르네. 百日紅 그늘 아래, 사랑을 떠나보내고도 나 지금 노래해야 하네.
3. 碧巖錄 제73칙의 馬祖 스님 코끝에 벌 한 마리 앉아 있다. 노각나무 흰 꽃이 계곡물 위 막 떨어지는 순간.
<우리에게 공산주의란 달성해야 할 미래의 상태가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의 운동을 공산주의라 부른다.> (마르크스 엥겔스, 독일 이데올로기)
노태맹 시인 / 제석봉을 내려오다
남해 금산 제석봉 꼭대기 내 모든 죽음이 거처할 허구의 암자 하나 세웠다 바로 허물고 내려오네 아래 겨울 바다 산 모두 흐릿한 목소리로 누워 있고 어디까지 내려가면 나도 저 흐릿한 죽음의 목소리 들을 수 있을지 중턱 약수로 바륨 한 알 삼키고 산 출구에서 컵라면 국물 마시며 남해 금산 제석봉 꼭대기 올려다보네 내 모든 생이 거처할 허구의 집 하나 세웠다 바로 허물어져버리면 다시 저 가파른 산길 타고 올라가 허구의 암자 세웠다 허물었다 하며 딱딱한 죽음의 목 조르고 있어야 하리 남해 금산 제석봉 꼭대기 내 한 번도 오르지 않은 그곳을 마른 참나무 막대기 짚으며 나 지금 내려오네
노태맹 시인 / 컴퓨터가 生을 禪하다
황금의 새 아홉 채의 곳간 지키고 있었네 붉고 아주 둥근 언덕 위, 까지 치고 담배 한 개비 물고 한참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모니터 화면 글씨 사라지고 광활한 우주가 화면 가득 나타났네. 후배에게 물으니 절전 기능이라나.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자꾸 내가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지. 붉고 푸른, 보라와 초록의 수많은 별들 사이로 빠져나가는 속도가 生이 죽음으로 달려가는 것처럼 빨랐어. 푸른 거미를 만나다라는 제목을 달고 내 쓰려는 글들은 유성의 꼬리처럼 타서는 사라져버렸고 그건 마치 컴퓨터가 生을 禪하고 있는 거라고나 할까 아니면 어떤 프로그래머가 컴퓨터로 죽음을 觀하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빠른 속도감 못 이겨 꽃과 나무와 강 다 팽개치고 곧바고 우주로 날아가버리고 싶었는지도. 그러나 그 속도의 끝은 우리를 生으로부터 빨아내는 그 둥근 입은 지금 무엇일까. 그 끝에서 입구를 찾아들어가는 Enter키를 누르자 죽은 황금의 새 푸른 거미들의 박제 와르르 쏟아져 내린다. 컴퓨터에서도 生은 윤회하는가…… 나는 우울하게 이어서 치네 붉고 아주 둥근 언덕 위 한 번도 열리지 않은 곳간엔 찬란한 나날들 그득했네.
노태맹 시인 / 천사들이 울고 있다 - 레퀴엠 1-5
하늘의 별들이 모두 지상으로 내려왔네. 사다리 맨 꼭대기에서 천사들이 별이 된 눈물과 그 고통의 기도를 내려다보고 있느니
지상의 어둠들은 천사의 발목을 강물로 덮고 밤이 깊어도 사람들의 꿈은 너무 환하고 밝아서 천사들은 지상의 별들에게 내려갈 수도 없네.
오 우리 반짝이는 슬픔, 오 아득한 천사의 사다리여, 사람들이 사라지고 없는 찬란한 별들만의 지상이여,
말할 수 없는 천사들이 울고 있네.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은 어둠으로 스며들어서 어둠을 아는 별들만 지금 컴컴한 침묵으로 하늘에서 빛나고 있네.
울음이 강이 되고 슬픔이 천사가 되는 시간이네.
노태맹 시인 / 노을빛 금목서 나무 아래에서 -레퀴엠 3-9
황금빛 바람 불고 붉은 풀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눕는 가을 들판을 오늘은 너의 눈빛으로 바라본다. 하기야 이제는 너의 풍경이 나에게만 남아 있어 이 눈물이 무슨 소용인가도 싶지만 가을 다하도록 날아다니는 잠자리 한 마리처럼 이 가을 나의 슬픔은 악착같다.
이런 날 너와 소주잔 부딪치며 길 가 어느 식당에서 삼겹살 구워 먹고 싶은데 그저, 네가 내 앞에 앉아있기만 해도 좋을 텐데, 어슬렁거리는 걸음 같은 어둠은 오고 골목길 주황빛 늦은 꽃을 피워 올린 금목서 나무 아래 저녁노을은 그림자처럼 깔려 이 가을 나의 슬픔은 온통 붉은 빛이다.
오늘은 너 없는 나를 위해 술노래를 부르리니 그곳에서 잘 있어라 그래 다시 돌아간 그곳에서 잘 있거라. 그래,
나는 내일 황금빛 바람 불고 붉은 풀들이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서는 가을 들판에 서서 눈 감고 있어도 환하게 번져오는 태양 빛의 소리를 그렇게 네 안부처럼 듣고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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