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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천선자 시인 / 안개비, 꽃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1.
천선자 시인 / 안개비, 꽃

천선자 시인 / 안개비, 꽃

 

 

유방암 말기 진단을 받고 삼 개월이다.

어미를 잃어버린 아이가 젖을 찾으며 운다.

미음을 끓여주고 분유를 타 먹여도 먹지 않는다.

아비의 마른 등에 매달려 빈젖꼭지 물고 또 운다.

젖무덤 찾아 고사리손이 아비의 등을 더듬는다.

삼일 내내 내린 비는 삼 년 내내 내리고

산 능선을 따라 안개비, 꽃을 피운다.

안개비, 꽃만 보면 그 아이 방긋방긋 웃는다.

 

 


 

 

천선자 시인 / reeal*. 1

 

 

코흘리개 친구와 땅따먹기를 한다

병아리 떼 쫑쫑쫑 봄나들이 가는 마당

금 긋고 동글납작한 돌멩이를 튕긴다

먹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열심히 튕긴다

어스름 산그림자 지우고 별내 흐르는데,

코 박고 엎드려 튕기고 먹고 튕기고 먹고,

땅을 몽땅 빼앗긴 아이가 엄마 부르며 운다

엄마는 오지 않고 울음소리만 되돌아 온다

눈물콧물 흘리며 돌려달라는 아이를 외면한다

금종이 왕관 쓰고 경계 넘어 발도장 찍는다

 

*부동산 용어의 유래, 스페인의 화폐 단위인 "릴"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릴"의 본의는 "국왕의 것"(국가의 거)이라는 의미로 스페인이 점령한 미국의 캘리포니아에 부동산의 뜻을 "릴"이라 부름으로써 스페인이 점령한 땅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시와소금》2018. 여름호

 

 


 

 

천선자 시인 / 내 마음의 양식인 마초더미 속엔 생명이 숨을 쉰다

 

 

이슬방울을 먹고 자란 연잎의 부드러운 속삭임 있다.

여름내 웃자란 나뭇가지마다 많은 이야기가 열려있다.

어깨를 토닥이던 실바람의 부드러운 손길이 있다.

느림의 미학을 가르치는 달팽이의 강의실이 있다.

너무 먼 식탁 위의 마초더미, 손이 닫지 않는다.

바삭한 치킨과 치즈가루를 듬뿍 뿌린 피자의 유혹,

영화를 보며 먹는 팝콘과 콜라와 연인의 유혹,

사방림을 넘어오는 싱그러운 물빛 파도의 유혹,

군마를 타고 경마장으로 가는 발소리들의 유혹,

온갖 유혹들이 오래된 바람벽의 흙처럼 흘러내리고,

사각뿔로 돋아나는 일상에 젖은 마음 한 자락,

이리저리 나부끼다가 빨래줄에서 팔랑팔랑거릴 때,

너의 긴 한숨은 공허한 내면의 황량한 거리를 배회하던,

나른한 오후를 끌고 피안의 저쪽으로 간다.

감각을 잃어버린 감성의 목구멍으로 넘어갈 때 쯤,

솔내음 솔솔 나고 따끈한 공상이 아침저녁으로 피어난다.

쉼표와 도돌이표를 잘 지키며 하루를 되새김질한다.

헛바람이 드나들던 틈새를 꽉 채운 포만감,

너로 채운 나날은 가벼워지고 작아지고 겸손해진다.

마초더미 속에는 인생의 쓰고 단 맛이 들어 있다.

시는 나의 마초더미이고 친구이고 동반자이다.

늙고 병들어도 주름진 얼굴에 핀 검버섯 꽃이 아름다울 것이다.

먼 훗날 마초더미에 묻혀 살아가는 나를 생각을 해본다.

다음날도 먹고 그 다음날도 먹고 상다리가 부러지게 먹고,

질리도록 먹고 배터지게 먹으며 즐거워하는 내 모습을 그리며,

오늘도 열심히 마초더미를 맛있게 먹는다.

 

 


 

 

천선자 시인 / 노을

 

 

 삭이지 못한 분을 참지 못하고, 한 번에 토하는 바다, 바다에 태풍이 치면 앞산이 멀미를 한다.

 잎에 묻은 물비늘을 털어내도 발끝에서부터 가슴까지 일렁이는 수풀바다는 작달비를 동반한 큰 바람에 메스꺼움을 견디지 못하고, 앙상한 가지만 남겨두고, 밤새 골짜기마다 푸른 잎을 토한다.

 

 임신 중인 친구가 병원으로 가고 있다. 에스프레스 한 잔을 마신다. 옷을 벗고 길게 누워있는 앞 산이 보인다. 뒤축이 닳아 발이 나온 구름이 힘겹게 재를 넘는다. 바위에 부딪히고, 구르며 한달음에 치닫는 물살, 나뭇가지를 놓친 참새 한 마리가 소스라친다. 몽돌의 졸인 마음이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살내음 풀어진 골짜기, 숲의 끝자락을 들어 올린다. 음부를 드러낸 채 입술이 갈라터지고, 땀으로 뒤범벅이 되어 소리치면서 열 시간이 넘도록 산고를 겪고 있는 그녀, 마른 아이를 낳고 있다. 혼미한 귓가에서 속삭이는 악마 시간의 탯줄이 길어지고, 양수에 빠진 노란 햇살 산허리가 온통 핏빛이다.

 난산이다.

 

 


 

 

천선자 시인 / 하루, 하루

 

 

갱년기에 접어든 여자의 마음은 더위를 먹고 사는 거대한 맹수야.

야생의 본능을 버리지 못하고 육식의 욕구로 채운 벌건 얼굴이,

사바나의 열대야를 만들어, 우기가 지나가고 타들어가는 맹수의 영역,

숲이 사라진 초원의 지표면은 용광로로 변하고 불새가 날아올라.

물 한 모금을 위해서 동족의 등을 밟고 앞으로 돌진하는 코뿔소.

시꺼먼 흙먼지 속에 강을 찾아가는 누우 때의 거친 숨소리.

흔적으로 남아있는 삶의 터에는 시원했던 바람의 무덤만 무성하고,

마른 강 바닥에는 퇴색한 열정의 찌꺼기들, 맹수의 천국이야.

시침과 분침의 교차점에서 멈춘 사바나, 태양의 붉은 발바닥 위에서

발톱 세우고 송곳니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포만감으로 포효하지.

 

 


 

 

천선자 시인 / 먼 길었어

 

 

네 속에는 차디찬 피가 흐르고 있어.

내 안에 흐르는 강조차 얼어붙게 해.

매끄러운 벽 속에 시린 가슴이 멍울멍울 열리네.

살얼음 조각들이 걸음마다 발끝을 아리게 해.

고뇌의 꼬리가 꼬리를 물며 심장을 아리게 해.

 

빙벽과 맞닿으면 비로소 강은 온기가 돌고 숨을 쉬지.

곰삭은 고통의 해일이 어둠 속에 투명한 길을 내네.

바위틈에 매달려 있는 이끼는 푸릇푸릇한 아픔이지.

복잡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단순하지도 않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올곧은 오월의 길이지.

길 끝에 오니 강의 늑골에도 한 떨기 꽃이 피네.

 

 


 

 

천선자 시인 / 척, 하며 가는 길

 

 

너에게로 가는 길은 막다른 도로이다.

사방이 벽으로 쌓인 도로이다.

꺽꺽 차오르는 목구멍에서 오리소리가 난다.

이십사 시간 산소 없이 살아간다.

어떻게 살 수 있느냐고 한다.

그건, 그냥 사는 거다. 살아주는 거다.

삶의 깊이가 꼭 발목까지만 닫는 얇고 딱딱한,

그 자리에 서서 한 길 어둠만 퍼 올린다.

금이 간 마음의 동공이 도로가에 실핏줄을 남긴다.

메마른 두 눈에서 돌알이 커 가는데 눈물이 난다.

눈물은 안개로 남아 막다른 도로 위에 눕는다.

사는 척, 하는 거다. 이젠 척, 척, 하며 습관적으로 산다.

꽉 막힌 좁은 도로에서도 척, 하면 길이 열리더라.

 

 


 

천선자 시인

1963년 강원도 출생. 2010년 《리토피아》를 통해 등단. 2005년 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 졸업. 시집 『파놉티콘』 『도시의 원숭이』. 전국계간지작품상 수상. 현재 〈막비시〉 동인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