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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유선 시인(합천) / 달력의 뒤편 외 8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2.
이유선 시인(합천) / 달력의 뒤편

이유선 시인(합천) / 달력의 뒤편

 

 

누군가

시월을 진실이라고 했고 십일월을 거짓이라 했다

목을 매달아도 죽지 않던 새 한 마리 잿빛으로 날아가고

어딜까

바람을 비껴가는 망상

수평으로 누웠던 시간은 기약 없이 출렁였고

달을 찢을 때마다 한숨은 착지점 없이 나부꼈다

붉다 못해 검어진 사과

한입 깨물면

까맣게 타들어 가는 민낯

낱장으로 흩어지고서야 한 해가 먼지인 걸 알았다

발뒤꿈치 들고 매달리면 돋아 오를

첫, 이라는 끝

열두 달을 다 바쳐도 다시는 틔우지 못할

나의 계절

 

-시집 『그래도 일요일』에서

 

 


 

 

이유선 시인 / 나의 언어

 

 

시퍼런 햇살이 곁눈질한 자리

 

비명오열비명오열비명오열비명오열비명오

 

열비명오열비명오열비명오열비명오열

 

맨몸으로 드러눕지 않고는

 

해독되지 않는

 

그게 나의 언어이다

 

-시집 〈그래도 일요일〉에서

 

 


 

 

이유선 시인 / 잡놈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도 아닌

 로맨티스트도, 사회주의자도, 허무주의자도, 무골호인도, 외톨박이도, 불한당도, 한량도, 낭인도, 걸인도, 나그네도, 오입쟁이도, 낭봉꾼도, 술주정뱅이도, 약장수도, 만담꾼도, 수행자도, 혁명가도, 몽상가도, 사회운동가도, 영웅도, 호걸도, 폐인도, 조폭도, 건달도, 백수도, 예술가도 아닌

 마냥 기다린다. 그냥 기다린다, 너무 외로워 혼자 운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그저 그렇게 산다

 

-시집 〈그래도 일요일〉에서

 

 


 

 

이유선 시인(합천) / 동어반복

 

 

이용했고

사기쳤다

배신했다

모함했다

무시하고

업신여겼다

욕하고

흉봤다

 

어떻게 네가

이럴 수 있는 거지?

 

그런 네가

실은 나, 일 수도 있다

 

 


 

 

이유선 시인(합천) / 뜨거눈 손

-화가 김길후에게

 거룩한 힘이 손에서 나오는 걸 봅니다. 어둡던 애 삶이 다독여지듯, 감전 따위를 모르던 곰 같은 내 손은, 지층 아래서 솟구쳐 오릅니다. 하늘까지 한 호흡에 닿을 듯, 쑥쑥 자라나는 식물 같은 손. 몇 번이나 주저하며 여기까지 오는 11월은, 명태껍질 같은 할머니 손에 쥐어진 주름 많은 사과를 봅니다.

 의자인가? 싶어 걸쳐 앉고 보니 11월의 그늘입니다. 영혼의 볼모가 된 화가는 물질적인 혼탁함 속에서 붓을 들고 누군가의 시를 검은 물감으로 지우고 또 지웁니다. 이게 화가의 침묵 방식일까요? 검어서 살아있다고 믿는 시간이 점차 두터워 지면서 수없이 긁힌 상처를 남깁니다. 선은 여백을 만나 미동을 잃어도 좋았습니다. 완곡의 흐름은 주저함 없는 호흡인가요? 검고 푸른 바다가 내 발밑에서 출렁이다, 용오름처럼 그대 화폭 속에 작열합니다.

 

 


 

 

이유선 시인(합천) / 새우잠

할매들은 말이 없다

아침이면 시루의 콩나물처럼

빛을 쫓아 경로당에 모여들었다가

오후가 되면 뿔뿔이 사라진다

입들은 숨 쉬거나 밥 먹거나

대충 그런 용도다

종일 올 사람도 없는 돌담 아래

할매들 질경이처럼 앉아 있다

사용처 잃은 이빨들이

누군가를 기다리다

기다릴 것이 없어진 순간

절룩절룩 자러 가고 나면 골목은 깜깜

우수수 낙엽보다 먼저

허리 굽은 할매는

불 끄고 모로 눕는다

 

 


 

 

이유선 시인(합천) / 비, 벼랑을 두려워 않는

 

 

이 남녘의 늦은 저녁 어딘가로부터 달려온 빗소리가

동창에 파고들어 온다

긴 담장 타 넘다가 넘어진 빗소리가 겨울비인 듯

봄비인 듯

살 터진 과수나무에 와서 굳은 몸을 흔들어 그리움

을 피워댄다

내 안에서 유혹하는 빛깔로

너를 노릇노릇 익혀가는 동안 탈 때까지 익어가던

내 안의 작은 그리움

어딘가에서 두팔 벌리고 있는

큰 그리움 쪽으로

거기가 땅 끝일 수도

생의 마지막 벼랑일 수도 있는데

놀란 눈 청노루 한 마리

냅다 달아난다, 아니 달려간다

 


 

 

이유선 시인(합천) / 율려(律呂)

 

해, 달, 별, 꽃

그게

환한 건

세상이 검은 탓

지구가

먼지 되는 날까지

한 인간의

기도가 필요해

너도, 나도

환해질

노래를 들려줘

 

 


 

 

이유선 시인(합천) / 뜨거눈 손

-화가 김길후에게

 

 거룩한 힘이 손에서 나오는 걸 봅니다. 어둡던 애 삶이 다독여지듯, 감전 따위를 모르던 곰 같은 내 손은, 지층 아래서 솟구쳐 오릅니다. 하늘까지 한 호흡에 닿을 듯, 쑥쑥 자라나는 식물 같은 손. 몇 번이나 주저하며 여기까지 오는 11월은, 명태껍질 같은 할머니 손에 쥐어진 주름 많은 사과를 봅니다. 의자인가? 싶어 걸쳐 앉고 보니 11월의 그늘입니다. 영혼의 볼모가 된 화가는 물질적인 혼탁함 속에서 붓을 들고 누군가의 시를 검은 물감으로 지우고 또 지웁니다. 이게 화가의 침묵 방식일까요? 검어서 살아있다고 믿는 시간이 점차 두터워 지면서 수없이 긁힌 상처를 남깁니다. 선은 여백을 만나 미동을 잃어도 좋았습니다. 완곡의 흐름은 주저함 없는 호흡인가요? 검고 푸른 바다가 내 발밑에서 출렁이다, 용오름처럼 그대 화폭 속에 작열합니다.

 

 


 

이유선 시인(합천)

경남 합천 출생. 2018년 <모던포엠> 신인상 수상. 대구문화재단 전문인력역량강화 현 시낭송가. 시 퍼포머. TBC 라디오 <노래를 읊다>. <내 마음의 쉼터> 진행. 대구문인협회 회원. 현, 대구 시낭송협회 회장. 시집 <그래도 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