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성혜 시인 / 실내를 위하여
손때 묻은 세월을 뜯어보니 썩고 금이 간 시멘트 벽 쉽게 속이 드러나도 겉으로는 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연한 살구빛 벽지의 잘려진 무늬를 맞춰 작은 방 네 벽을 다시 봉했다 숨길 수 없는 누수로 얼룩졌던 천정 슬쩍 높아지고 쓸데없이 못박았던 자리 지워졌다 뜯어보기만 할 뿐 어딘가 금간 마음의 벽 하나 봉하지 못하고 낮은 스탠드를 켰다 아늑한 실내 차 한잔 앞에 놓고 길게 몸을 파묻으니 유리병에 입이 터지도록 꽃이 피어나고 네 벽은 밤새도록 단단한 껍질이 되어 주었다
장성혜 시인 / 사람들
한 정류장 밖에 올리브 나무 찻집이 있었다 샤갈의 마을이라는 꽃집도 있었다 한 정류장 밖에 있는 집들은 멀다 샤갈의 마을이 사라지고 오븐에 빠진 통닭집이 생겨도 저녁이면 포장마차가 불을 밝히고 있어도 내리지 않는다 올리브 나무가 문을 닫고 하노이의 아침이 손을 내밀어도 바로 옆 왕갈비 집에서 냉면 한 그릇을 그냥 준다고 해도 간판만 보고 지나치기만 한다 언제 차라도 한잔하자면서 만나지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는 샤갈의 집 밖에 잠깐 나타났던 포장마차이거나 올리브 나무 아래 생겼다 사라진 붕어빵 수레다 한 정류장 밖으로 가을이 왔다가 가고 한 정류장 너머에 눈이 쌓였다가 녹는다 한 사람이 피었다 진 자리에 꽃이 피면 잠깐 생각나는 사람이 생겼다 올봄에는 얼굴이나 보자는 사람과 꼭 그러자는 한 사람 사이에 그러자는 사람이 또 나타났다 마을버스 정류장 사이에 정류장 하나가 늘어났다 편의점 앞 소나무는 정류장을 다닥다닥 매달고 있다 문득, 쳐다보니 낮달과 소나무 사이도 한 정류장 거리다
장성혜 시인 / 그 집 앞에는 밤마다 붉은 가로등이 켜진다
손바닥만한 하늘을 쳐다본다 오이지를 눌러 두었던 돌멩이 하나 빈 항아리 속에 드러누워 대낮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는다 잔소리처럼 내려앉는 먼지를 먹고 차곡차곡 차오른 슬픔만 불룩하다 재개발 아파트 솟아오르는 산동네 외진 골목 좁은 마당에는 종일 진한 소금물 같은 그늘이 부어진다 오래전 갈라진 시멘트 바닥에 비명처럼 가느다란 풀이 솟는다 피지도 않고 시들어버린 하루를 싣고 마른 풀잎 같은 여자가 노점에서 돌아온다 초저녁부터 절여지듯 잠이 든 후 돌멩이 붉은 야행성의 눈을 뜬다 곧 부서질 그 집 앞에 무너져 내리는 어둠 한 귀퉁이 떠받치려고 밤새도록 품고 있는 불빛이 묵직하다
-『리토피아』에서
장성혜 시인 / 알레르기
해마다 그 자리에 한 여자가 서 있네 햇살이 메마른 가지를 긁으니 벌겋게 보고싶다는 말이 흩어지네 바람이 수없이 회초리 되어 지나 간 그늘이 부풀어오르네 꽃이 된 자리마다 병이 도져 봄이 오면 여기 저기 미치도록 가렵다는 전화가 오네 불꽃같은 사랑을 하고 아이를 낳고 싶었던 곳이 여기다 여기다 하면서 가시를 품은 향기가 눈물처럼 쏟아지는 골목 이제는 지나갔겠지 눈을 뜨면 징그러운 그리움 아직도 밟고 섰네 달려왔다 지워지는 물결이 보이네 몇 번을 더 앓아야 하는 지 왜 이렇게 가려운지
허망함만 배가 불러 바다로 뛰어들 뿐 푸른 살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네
장성혜 시인 /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어제 자전거를 타고 비디오 빌리러 갔었어요 여름 저녁이었어요 가로수 아래 풀들이 제멋대로 자라고 있었어요 누군가 내 얼굴이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고 말해 어디서 보았을까 생각하다가 비틀거렸어요 가는 길에 신호등 하나가 더 생겼어요 사는 것이 점점 경사가 심해 오르기가 힘이 들어요 자전거에서 내려 지그재그로 걷다보니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에 나왔던 아이가 달려간 길이었어요 그 이란 감독 이름이 또 생각나지 않아요 오늘 비디오를 보다가 중간쯤에서 생각났어요
장성혜 시인 / 유월
어떻게 하면 고객님을 만족하게 할 수 있을까 저희 농원에서 해마다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선별기 구멍 크기로 왕특이 결정되기 때문에 굴러가다 빠져야 할 곳에서 빠지지 않고 다음 칸으로 넘어가는 경우, 왕특이 될 수 없는 것들이 섞여 나가는 일이 가끔 있었습니다 커지는 고객님의 만족도를 채우기 위해 올봄 선별기 굴림통을 교체하게 되었습니다 구멍 수를 늘리고 크기도 커졌습니다 작년 왕특이 상으로, 중이 토종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왕특이 되려면 색도 고른 연초록이어야 합니다 흠집이 잇거나 살굿빛이 도는 놈들을 골라냅니다 첫 수확 날짜는 미루고, 마지막 날짜는 최대한 앞당겨 시간과의 전쟁으로 얻은 결실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과한 매실만이 왕특이 됩니다 진정한 왕특이 되는 마지막 과정은 고객님의 입맛입니다 중대한 결정을 내려주실 왕특을 맛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왕특을 맛보려면 때를 놓치면 안 됩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장성혜 시인 / 물구나무서 있는 두 개의 풍경
화장실 거울 앞에 밀크로숀 병이 거꾸로 서 있다 훤히 바닥이 보이는데도 아직은 끝내고 싶지 않다며 짧은 목으로 버티고 있다 거울에 거꾸로 비쳐지는 낯익은 싸구려 상표가 문신처럼 깊고 징그럽다 머리 희끗희끗한 남자가 세수 하는 동안 한 번만 더 써 달라고 머리를 처박고 전신으로 진한 눈물 짜내고 있다 막막한 입을 열고 손바닥에 내리치면 목구멍까지 올라와 고여 있던 외마디 희망이 흘러나온다 마지막 한 방울이 남기 전 저 위태로운 병은 바닥에 눕지 않을 것이다
거울을 보며 목이 덜렁덜렁한 남자가 넥타이를 매고 있다 발이 허공을 향하고 있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안덕 시인 / 외눈박이 외 6편 (0) | 2025.12.22 |
|---|---|
| 이유선 시인(합천) / 달력의 뒤편 외 8편 (0) | 2025.12.22 |
| 노태맹 시인 / 흑백사진을 벽에 걸다 외 6편 (0) | 2025.12.21 |
| 윤경예 시인 / 백 년 만에 날아간 웃음 (0) | 2025.12.21 |
| 김현정 시인 / 애기똥풀꽃 (0) | 2025.12.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