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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해연 시인 / 자본 이데아
무지개를 좇아 산을 넘은 사람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낭만주의가 지나갔다
부패한 살빛의 대지와 뱀의 몸짓을 타고 흐르는 강물 저편 가느다란 황톳길을 따라 사람들이 걸어간다 자연주의가 지나갔다
서울에 서울타워가 있다 파리에 에펠타워가 있다 런던에 런던타워가 있다 혁명의 시대가 지나갔다
바르셀로나 광장 가우디의 가로등 아래 사람들이 사진을 찍는다 등잔의 램프 같기도, 풍차의 날개 같기도 한 그의 가로등을 도처에 세우려던 계획이 비용 문제로 취소됐다 신도시 예정지를 남몰래 사들여 용버들을 심은 사람은 왜 하필 용버들을 택했을까? 물을 정화하고 해열과 진통의 효능을 가진 버드나무를
마지막 자본주의가 지나가는 중이다 다음이 보이지 않는다
-시집 『달팽이 향수병』 에서
양해연 시인 / 가면무도회
오늘밤 공중그네는 위험해 보여 호흡이 전혀 맞지 않아 얼떨결에 무대에 오른 대타로군 아찔한 아크로바틱 태양의 서커스 공연이 러시아 병사의 불안을 달래줄까 보급품에 아이스크림이 추가되면 우크라이나 병사의 전투욕이 오를까 무덤이 해체된다 발굴조사단은 팔짱을 끼고 등 떠밀린 몇몇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시신의 머리와 몸통을 들어 보이며 히죽거리고 아무 데나 내 던진다 어깻죽지 뼈와 대퇴골이 위치를 바꾼다 왕관의 곡옥이 떨어져 나가고 금제 혁대가 동강나 짓밟힌다 불투명한 유리문 안쪽 그림자가 보인다 한 사람이었다가 두 사람이었다가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그림자들 - 계간 《열린시학》, 2024, 봄호.
양해연 시인 / 새들은 숲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나 오랜만이요 며칠 전 WSJ에 실린 칼럼을 읽다 이메일 주소를 보았소 아직도 나에 대한 오해가 남았다면, 용서하시오 옛일이 어제일 같소 우크라이나 공격을 두고 세 계가 한 입으로 나를 욕하지만, 모르는 소리들이요 나는 여러 번 경고했고 평화를 선택할 기회도 주었소 젤렌스키는 자신의 무능을 감추기 위해 무모한 도박을 한 거요 협상 따위 필요 없다며 큰소리 친 건 제 나라 국민이 죽든 말든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한 이기적 행동이었소 그는 나토에 가입해 나와 러시아를 압박하려 들었소 그들은 하나로 똘똘 뭉쳐 붉은 군대를 무찌르려는 나치주의 추종자들이요 세상엔 아름다운 것도 선한 것도 남아있지 않소
나나 나는 더 이상 젊지 않소 시베리아 사냥터를 누비고, 근육질의 몸을 드러낸 채 카메라 앞 일광욕을 연출하던 때가 까마득하오 카바예바도 곁에 없소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머리를 저어보지만 어쩐지 버려진 느낌이요 가스관 밸브를 열어달라며 추위에 떠는 EU 사람들이 내게 무릎을 꿇으면 좋겠소 그러면 난 히틀러나 나치주의자들을 완벽히 넘어설 것만 같소
전동차 창으로 수변공원 버드나무 군락지가 펼쳐진다 새잎이 돋는 버드나무는 무덤처럼 부풀고 있다 동족 간의 전쟁 중, 아군이 폭파시킨 철교에서 피난민을 가득 태운 기차가 곤두박질 쳤다는 강물 위를 지나는 중이다 당시 이 나라 대통령은 미리 남쪽으로 피난을 갔으면서 수도 사수 대국민 방송을 했다는 불분명한 일화를 들은 기억이 난다
트럼프바이든 정권교체기 나는 미국에 체류 중이었는데, 의사당 난입 현장에서 견고한 믿음의 허무한 종말을 보았다 레닌 목에 밧줄을 걸어 땅바닥으로 끌어내리며 환호하던 소비에트 연방 탈퇴 국민들의 모습이 오버랩 됐다 이념과는 무관한 맨얼굴들 아마존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브라질에서 만난 보우소나루는 개발이 가져올 부의 액수에 흥분하며 숫자로 환산할 수 없는 것들의 희생에는 귀를 막았다 열대우림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파괴되는 중이다
대통령 당선자와의 인터뷰를 마지막으로 한국에서의 일정은 마무리되었다 당선자가 선거 기간 내내 휘두른 어퍼컷 세리모니는 인상적이다 그가 검찰 최고 책임자였다는 사실과 주먹을 날리는 제스쳐 사이 묘한 이질감 때문일까? 모스크바에 가기 위해 난생 처음 기차를 탄 날의 심한 울렁거림과 두통이 몰 려왔다 파괴되는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비명>, <깨진 유리조각과 부서진 기물 의 미국 의사당>, <불타는 아마존 열대우림>, 오늘 인터뷰 헤드라인을 어떻게 뽑을까 골몰하다 푸틴에게 짧은 회신을 보냈다
-아름답고 선한 게 남아있지 않다 해서 추하고 악한 게 이기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양해연 시인 / 여름 숲
동식물 체액 냄새로 공기가 음습하다 흐린 날엔 더욱 더 진입로가 끝나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그녀는 조향사다 야릇한 냄새가 난다
등산로를 벗어난 비탈에 무리지어 핀 산수국 앞서 가던 사람을 따라 걸음을 멈춘다 보라색 꽃송이를 호위하듯 핀 헛꽃에 눈길이 간다 그녀의 작업실은 습기 냄새로 자욱하다 프리지아와 말린 장미, 로즈마리, 자스민 등 꽃과 허브식물은 물론 열매와 뿌리, 벌레와 곤충, 말라비틀어진 동물의 생식기도 있다 검거나 붉은 흙이 담긴 여러 개의 작은 유리병엔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햇빛이 새어들지 못하게 창을 커튼으로 가린 채 자신에게 오는 불행은 모두 진열장 속 생식기처럼 될 거라며 낄낄대던 그녀 바위에 앉아 숨을 고르려는데 휴대폰이 울린다 화면을 열자 막 꺼낸 고래 창자가 꿈틀거린다 며칠 전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향유고래 한 마리 구해줘요
웹진 『시인광장』 2024년 6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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