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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경재 시인 / 장미의 외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2.
문경재 시인 / 장미의 외출

문경재 시인 / 장미의 외출

 

 

전시회에 간다고 하니 꽃집 주인이 선심 쓰듯

장미 다발에 금빛 스프레이를 뿌려준다

붉은 꽃잎에 금방울이 송글송글 맺힌다

굴러 떨어지지도 않는다

색조 화장 마지막 단계에서 볼 터치를 하던

영화 속 배우처럼

금방울이 장미 더미에서 알알이 빛난다

장미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 같았는데

마리아 칼라스의 높은 음색을 돋보이게 하려고

바이올린이 잠시 멈춰 서는 것과 다른 의미에서

장미는 가시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장미만으로 장미가 되지 못한 장미는

너무 아름다워서 죄가 되었노라던

옛 비유를 내려놓으며

전시장으로 들어선다

​ㅡ시집 <느티나무의 문법> 예술가, 2024

 

 


 

 

문경재 시인 / 명화

 

 

열두세 살 무렵

천석꾼 제당에서 처음 보았다

내 키보다 조금 더 큰 꽃나무

지지 않을 것처럼

오래 피어 있었지만

이름도

홍자색이 뭔지도 몰랐던

그 환한 언저리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만 바라보았다

 

아, 이게 배롱나무였어?

새로 입주한 아파트 꽃나무 몇 그루에

팻말이 붙어 있다

 

아, 이게 배롱나무였어!

단단하면서도 매끈한

다듬잇방망이에

살 오르고 잎 돋은 듯

 

사색적이지만 회의적이지는 않다

비틀며 줄기에 더딘 속도를 밀고 나가는

빈한한 집안에서 올곧게 자란 소년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문경재 시인 / 날개 없는 관객 하나

 

 

상고머리를 돌리며 농악대가 판을 벌였다

꽹과리와 장고를 묵음에 놓고

셔터를 열어놓고 찍은 별자리 사진처럼

수십 겹의 원무가 펼쳐진다

자정이 다 된 허공이 붐빈다

 

초승달이 가로등을 밟고 지나갈 때

곁에 있는 단풍잎이 반짝인다

수건을 꺼내 땀을 닦을 기미가 없어

이파리들이 대신 땀을 흘린다는 듯

 

나방과 하루살이가 교대 출연하는지

바통은 어떻게 주고받는지

알 수는 없는

 

날개 없는 관객 하나 창가에 서 있다

흐벅지게 한 번 놀아보지도 못한 생

산야를 뒤덮던 눈발처럼

춤에 지쳐 한 번 쓰러져보지도 못한 채

 

잠이 오지 않는 밤

모처럼 벽시계를 흘끔거리지 않는 시간도

묵음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문경재 시인 / 산 일번지

 

 

개구리가

밤새 따라울며 잠못들게 하는

산 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아내는 일년 내내 안된다고 했습니다

문만 열면 양재천이 코앞이고

매일 찾는 마트는 어떡할 거냐고

닦달을 했습니다

 

이제는 통장이 마이너스가 되었음을

입 안에서 맴돌고 있을 뿐

밖으로 꺼내놓지 못했습니다

 

까치소리에 잠을 깨는

산 밑 집에는

문 열면 고추와 배추

상추가 어제보다 키가 자랐음을 자랑합니다

 

밤나무가 뱉어논 꽃향기가

코 끝을 간지르고

개미가 스물스물 기어들어오는

산 일번지에는

무당벌레 몇 마리가 함께 와 있습니다

 

빌딩이 눈 앞을 가리고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달려가던 옛집에서

이 곳으로 밀려 왔지만

나는 이 곳에서

머리가 반백이 된 시인을 보았습니다

 

 


 

 

문경재 시인 / 정기후원

 

 

관상용이니 따지 말고

눈으로만 감상해주세요

대추나무의 팻말을 지나

모과나무의 팻말 앞에 선다

생전 처음 읽은 문장처럼

대추만한 모과가 열렸다

 

하늘은 매일 새로 짠 직물

새소리에 부쩍 굵어지는 나뭇가지들

햇빛은 장부에 빚의 내역을 적고

망종 무렵 그늘의 속도를 점검해본다

 

너덜너덜해진 나의 장부를 들춰본다

물기를 머금고

감자와 오이가 보낸 택배가 도착했다

저온 살균된 우유와 한정판 와인을 문 앞에 내려놓고

수퍼마켓 배달원이 초인종을 누른다

주말에는 주문제작한DIY탁자가 도착할 것이다

가성비가 높을수록 부채가 늘어간다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키듯*

후원액수를 늘려달라는 유니세프의 권유를

거절하기 어렵다

누구의 삶도 나를 증가시키니

 

*존 던의 시 「누구를 위하여 조종은 울리나」에서

 

 


 

 

문경재 시인 / 박새에 대한 은유

 

 

난시일까 난청일까

무시로 나타나던 박새는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려주지 않는다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은

오케스트라의 음을 가닥가닥 만질 수 있다는데

 

박새여,

너의 매조소프라노를 들려주렴

나뭇가지마다 절벽을 거느리고

캄캄하게 떨어지는 건

나의 시선 뿐

 

낙과처럼 웅크린 채

화살나무 붉은 잎이 흔들리는 걸 본다

 

그 흔하디흔한 부재로 자기를 증명하는

박새는 말하자면

그토록 소란하기 그지없는

그토록 고적하기 그지없는

내게서 너까지의 거리

 

 


 

문경재 시인

1951년 장흥읍 출생. 건국대 경제학과 졸업. 한일은행과 동화은행에 근무하다 지점장으로 퇴직. 2018년 계간 <예술가> 가을 제34호에서 '느티나무의 문법' '수서유수지水西遊水池' '통점' 시 3편으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