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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재 시인 / 장미의 외출
전시회에 간다고 하니 꽃집 주인이 선심 쓰듯 장미 다발에 금빛 스프레이를 뿌려준다 붉은 꽃잎에 금방울이 송글송글 맺힌다 굴러 떨어지지도 않는다 색조 화장 마지막 단계에서 볼 터치를 하던 영화 속 배우처럼 금방울이 장미 더미에서 알알이 빛난다 장미는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 같았는데 마리아 칼라스의 높은 음색을 돋보이게 하려고 바이올린이 잠시 멈춰 서는 것과 다른 의미에서 장미는 가시의 시간을 가질 것이다 장미만으로 장미가 되지 못한 장미는 너무 아름다워서 죄가 되었노라던 옛 비유를 내려놓으며 전시장으로 들어선다 ㅡ시집 <느티나무의 문법> 예술가, 2024
문경재 시인 / 명화
열두세 살 무렵 천석꾼 제당에서 처음 보았다 내 키보다 조금 더 큰 꽃나무 지지 않을 것처럼 오래 피어 있었지만 이름도 홍자색이 뭔지도 몰랐던 그 환한 언저리 가까이 가지 못하고 멀리서만 바라보았다
아, 이게 배롱나무였어? 새로 입주한 아파트 꽃나무 몇 그루에 팻말이 붙어 있다
아, 이게 배롱나무였어! 단단하면서도 매끈한 다듬잇방망이에 살 오르고 잎 돋은 듯
사색적이지만 회의적이지는 않다 비틀며 줄기에 더딘 속도를 밀고 나가는 빈한한 집안에서 올곧게 자란 소년들이 활짝 피어 있었다
문경재 시인 / 날개 없는 관객 하나
상고머리를 돌리며 농악대가 판을 벌였다 꽹과리와 장고를 묵음에 놓고 셔터를 열어놓고 찍은 별자리 사진처럼 수십 겹의 원무가 펼쳐진다 자정이 다 된 허공이 붐빈다
초승달이 가로등을 밟고 지나갈 때 곁에 있는 단풍잎이 반짝인다 수건을 꺼내 땀을 닦을 기미가 없어 이파리들이 대신 땀을 흘린다는 듯
나방과 하루살이가 교대 출연하는지 바통은 어떻게 주고받는지 알 수는 없는
날개 없는 관객 하나 창가에 서 있다 흐벅지게 한 번 놀아보지도 못한 생 산야를 뒤덮던 눈발처럼 춤에 지쳐 한 번 쓰러져보지도 못한 채
잠이 오지 않는 밤 모처럼 벽시계를 흘끔거리지 않는 시간도 묵음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문경재 시인 / 산 일번지
개구리가 밤새 따라울며 잠못들게 하는 산 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아내는 일년 내내 안된다고 했습니다 문만 열면 양재천이 코앞이고 매일 찾는 마트는 어떡할 거냐고 닦달을 했습니다
이제는 통장이 마이너스가 되었음을 입 안에서 맴돌고 있을 뿐 밖으로 꺼내놓지 못했습니다
까치소리에 잠을 깨는 산 밑 집에는 문 열면 고추와 배추 상추가 어제보다 키가 자랐음을 자랑합니다
밤나무가 뱉어논 꽃향기가 코 끝을 간지르고 개미가 스물스물 기어들어오는 산 일번지에는 무당벌레 몇 마리가 함께 와 있습니다
빌딩이 눈 앞을 가리고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달려가던 옛집에서 이 곳으로 밀려 왔지만 나는 이 곳에서 머리가 반백이 된 시인을 보았습니다
문경재 시인 / 정기후원
관상용이니 따지 말고 눈으로만 감상해주세요 대추나무의 팻말을 지나 모과나무의 팻말 앞에 선다 생전 처음 읽은 문장처럼 대추만한 모과가 열렸다
하늘은 매일 새로 짠 직물 새소리에 부쩍 굵어지는 나뭇가지들 햇빛은 장부에 빚의 내역을 적고 망종 무렵 그늘의 속도를 점검해본다
너덜너덜해진 나의 장부를 들춰본다 물기를 머금고 감자와 오이가 보낸 택배가 도착했다 저온 살균된 우유와 한정판 와인을 문 앞에 내려놓고 수퍼마켓 배달원이 초인종을 누른다 주말에는 주문제작한DIY탁자가 도착할 것이다 가성비가 높을수록 부채가 늘어간다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키듯* 후원액수를 늘려달라는 유니세프의 권유를 거절하기 어렵다 누구의 삶도 나를 증가시키니
*존 던의 시 「누구를 위하여 조종은 울리나」에서
문경재 시인 / 박새에 대한 은유
난시일까 난청일까 무시로 나타나던 박새는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려주지 않는다
절대음감을 가진 사람은 오케스트라의 음을 가닥가닥 만질 수 있다는데
박새여, 너의 매조소프라노를 들려주렴 나뭇가지마다 절벽을 거느리고 캄캄하게 떨어지는 건 나의 시선 뿐
낙과처럼 웅크린 채 화살나무 붉은 잎이 흔들리는 걸 본다
그 흔하디흔한 부재로 자기를 증명하는 박새는 말하자면 그토록 소란하기 그지없는 그토록 고적하기 그지없는 내게서 너까지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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