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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유선 시인 / 겨울여행 12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2.
김유선 시인 / 겨울여행 12

김유선 시인 / 겨울여행 12

 

 

추운 날은 사람 그리워

마을로 간다

싸움 소리도 다정한

불 밝힌 집 그리워

산을 내려간다

 

추운 날은 체온이 그리워

따뜻한 물 한 잔 그리워

사람 기다리는 사람이 사는 곳

그리워

산을 내려간다

 

-시집  『별이라고 했니 운명이라고 했니』 에서

 

 


 

 

김유선 시인 / 가을새

 

 

품만 자식들이 떠나고

임도 제 길로 돌아간 뒤

 

있는 것

죄다

펼쳐도

 

보금자리

너무 넓다

 

이제는 미움도 슬픔도

마알갛게 투명해져

 

햇살 앞에 앉아

묻힌 시간 굴려 환丸 지어 놓고

긴 밤 다시 오면

꿈 대신 삼킨다

 

아침에 눈떠도

시간은 되돌이표.

 

 


 

 

김유선 시인 / 유년의 모래밭

 

 

유년의 모래밭 위에

낯선 새 한 마리

문득 날아와

옛날처럼 꿈을 쪼아먹고 있다

 

그 깊이따라 빛깔 달라지는

추억 한 움큼씩 파내면

 

묻혀진 시간들

우수 수 살아나와

살갗을 간지럽힌다

이제는 아픔조차 그리움이여

 

얼굴 붉히던 바람 찾아서

파고 또 파들어가면

어느 길목에선가 함초롬 들꽃자리

거기 아직껏 젖어있는 모래무덤

 

 


 

 

김유선 시인 / 꽃에게

 

 

너에게로 가면 어찌해서

세상 모든 것들

아름다워지는걸까

 

사람 사이 만남의 외로운 강줄기며

쓸쓸히 얽힌 인연의 바람줄

다문다문 받아마시고

연분홍으로 웃느니

질척한 추억의 바람소리

슬픔 한 자락도

너에게로 가면 향기로워라

 

사람 마을에서는 오늘도

억수비 쏟아져도

시간 밖으로 밀려난 꿈들

씻겨지지 않는다

그 마을에서는 분노의 얼음칼도

사말살 빛곱게 녹느니

 

그곳에 이르는 길 알 수 없는

우리네 사랑,

저문 들녘 스러지는 그림자처럼

가물가물 저물어갈 밖에.

 

 


 

 

김유선 시인 / 눈은 내리는 게 아니야

 

 

눈은 내리는 게 아니야

얼어붙은 영혼들

녹아 피어오르는 거야

하늘나라 그 聖域으로

가고 싶은 거야

숨기고 싶은 서러움들

하얗게 부서져

흩날리고 있는 거야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게 아니야

땜질해도 새어나오는 눈물

파묻어도 죽지 않는

분노인 거야

헤어지고 배반했다가도

만나면 눈물 글썽대며

서로 부둥켜 하나가 되는

사랑인 거야

 

-시집 <별이라고 했니 운명이라고 했니>에서

 

 


 

 

김유선 시인 / 망초꽃

 

 

땅 위에 뜨는

앉은뱅이 별들

 

그리움을

땅속에 묻었다

 

고개드는 기다림을

다시 땅속에 묻었다

 

허전함 키 크는 밤이면

하늘에 띄우는

수천의 엽신

 

 


 

 

김유선 시인 / 꽃피우기 1

-희망에게

 

 

아름다운 꽃은 언제 피느냐고

사람들이 묻는다

정말로 향그러우냐고

사람들이 묻는다

꽃이며,

벌써 몇 년째

잠만 자는구나

 

내게 남은 일은

기다림뿐이냐

기도뿐이냐

 

창을 열면 그 자리

여전히 거기

잠들어 있는 너를

아예 뽑아버리라고

이웃들은 말하지만

올해도 나는

너의 잠을 지킨다

 

 


 

김유선 시인 (1950년~2019년)

1950년 경기도 용인 출생. 숙명여대 국문과 졸업. 문학박사. 198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놓친마음찾기』 『빈집』 『은유의 물』 『별이라고 했니 운명이라고 했니』 등. 저서 『춘원시 연구』 『현대시 연구의 방법론적 실제』 등. '천상병 시문학상' 수상. 현재 장안대학 디지털 문예창작과 교수. 2019년 5월 22일 별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