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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류현 시인(칠곡) / 상사화相思花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3.
류현 시인(칠곡) / 상사화相思花

류현 시인(칠곡) / 상사화相思花

 

 

누구에게

물어 볼까

 

기다림에

가슴만 까맣게 타들어 간다

 

잎이 나면 꽃이 지고

꽃이 피면 잎이 지는

 

꽃송이 이고 꽃대만 솟아오른 꽃무릇

평생을 서로 만나지 못하니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외롭게 저 혼자 피어나는 꽃

 

뙤약볕에 알몸으로

얼굴만 내민

저 홀로 피는 상사화

 

-시집 <봄의 왈츠>에서

 

 


 

 

류현 시인(칠곡) / 달의 저장법

 

 

 손톱을 물어뜯는 아이는 문 뒤에서만 퍼즐을 이해한다 질문이란 싸움의 시작이므로 처음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이라고 부모들은 벽의 자세로 어두워졌다

 

 바닥을 치면 올라설 수 있다는 말은 명언일 뿐이다 바닥은 나에게서 나를 끊임없이 빼는 일 만화책에서 할 일을 못 찾은 소년이 거리를 연주한다 바닥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꽁초를 버리고 침을 뱉고 오줌을 갈긴다

 길눈이 어두웠던 소년에게서 밤과 낮의 철학이 사라지고

 아버지를 찾으러 간 형들은 달의 뼈마디를 들고 돌아왔다

 내일을 단순화한 소년들이 모여 달을 끓인다

 달을 거슬러 올라가던 과정이 소년의 괄호 안에서 생략됐다

 

 


 

 

류현 시인(칠곡) / 때로는 록(LOCK)처럼

 방화범을 꿈꿨다. 그림자를 던져 넣자 노래를 부르는 네가 보였다 유년의 여드름을 태우며 웃고 있는 네가 보였다 붉은 꽃들이 360도로 회전하며 나를 찾고 있었다

 

 주머니 속 불씨를 만지작거렸다 지난여름 보았던 칸나의 감탄사를 신의 혀에 던져 버릴까 바람이 한번 지나면 내 이름이 바뀌던 때, 깊은 잠을 들락거리는 영혼은 무슨 색이었을까 이름 밖에서 빨간색을 줍는다면 칸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발길을 돌리면 한순간 뒤집히는 뱃속

 안간힘 쓰며 중심을 잡던 배꼽의 실타래가 풀렸다

 

 누군가 쓸모없이 스위치를 만졌다

 우리는 서로를 불 속으로 던졌다

 

 조명은 사람과 유령을 섞어 놓은 빛이었다 모든 인종의 눈동자가 데구르르 굴러다녔다 음표를 벗어난 유령들의 합창이 기타 줄을 끊고 말았다 사람을 넘어선 심장이 과열되기 시작했다

 사람과 그림자가 녹아 하나의 인종이 완성됐다

 

 칸나 한 다발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웹진 『시인광장』 2020년 1월호 발표

 

 


 

 

류현 시인(칠곡) / 봄의 왈츠

 

 

바람에 흔들거리는

나뭇가지의 기침소리

이제 막 눈 뜬 대지가 기지개 켜는 소리

 

마른 풀잎 일어서고 파란 풀잎 뛰어 오를 때

하늘의 별들이 내려와 봄의 왈츠를 시작하네

 

봄비가 구름 틈 비집고 내려오는 소리

대지가 녹으며 스르르 무너지는 소리

 

땅바닥을 뚫고 하늘을 보고

함박웃음을 터트리는 소리

 

초록의 새싹들이 아지랑이 향해

저마다 뿜어내는 춘곤의 하품 소리

 

연녹색 고운 속옷 갈아입는 소리

가지마다 어린 것 순산하는 소리

 

나무의 물관을 타고 오르락내리락

소리 따라 오고

소리 따라 흩어지는 봄

 

 


 

 

류현 시인(칠곡) / 청보릿빛 사랑의 노래

 

 

푸른 남쪽 들녘

아지랑이 가물가물 피어오르니

연분홍 진달래 나를 반기네

 

여러 빛깔로 흔들리던 청보리밭

옛사랑을 한 올 한 올 떠서

피어 올리고 있겠지

 

올망졸망 어깨동무하던 초가지붕들

사랑은 아득히 드넓은 벌판을 돌아

들녘 한적한 개울가 빨래터에서

빨래방망이 소리를 타고 넘어서 오네

 

먼동이 문살을 밝히는

새벽녘까지도 잠 못 이루고 뒤척이며

사랑에 목말라 가슴 조이던

 

내 고향에도 지금쯤

지평선 저 멀리에서 파릇파릇한

사랑의 청보리 싹들이

아지랑이 등에 업혀 달려오겠지

 

아지랑이가 너를 싣고 오는 들녘 길

초가집 굴뚝을 타고 하늘거리며

피어오르는 파란 저녁연기 같은

그 푸른 들길

 

나는 잊을 수 없어

발걸음을 돌릴 수 없네

 

 


 

 

류현 시인(칠곡) / 폭우

 

 

산이 통째로 굴러와

우면동 전원마을 거실을 점령했다

 

범람은

마구 베는 칼바람

내 가슴도 자르고 있네

 

차가운 비 가슴 파고들어

심장을 뚫고 넘쳐흘러

돌아가는 피돌기를 멈추게 하네

 

응급실에 던져진, 그곳에는

온통 칼바람에 베이고 상처 난 얼굴들

 

물이 칼이 되면

사람과 집 나무와 흙 가리지 않고

사정없이 한 칼에 베어버리니

 

우면산 하나쯤은

통째로 베어버리지

 

쇠칼보다 무서운 폭우의

칼바람이 춤을 추면

시간은 속절없이 붙잡히고 말지

 

 


 

 

류현 시인(칠곡) / 부처님 진신사리

 

 

오대산 계곡을 걸어 내려오는

청아한 물소리

 

천년의 이끼 낀 배경에

햇살 한 올 한 올

현의 떨림처럼 들려주는데

 

적멸보궁까지 올라가는 길 따라

다가 올 미래도 짐작해 본다

 

굽이굽이 돌아 오르는 길목마다

자장의 숨결소리 피어오르고

 

길섶 따라 피어있는 진달래 나리꽃

사이사이 곱게 묻혀 있는 독경소리

 

들리지도 않고

들으려 하지도 않으며

지나는 길손마다 꽃만 꺾어 들고 가네

 

진신사리에 합장배례하면

전생의 업장과 이생에서 쌓이고 쌓인

항하사恒河沙같은 죄업들이 사라질까

 

독경과 목탁소리만 허공을 맴돌고 있구나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류현 시인(칠곡)

경북 칠곡 출생. (본명 柳明鉉). 국민대학 경영학과, 경원대학(현 가천대학)전자공학과(2004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재무행정학 전공) 졸업, 2015년 <애지>로 등단. 1971년 예비군포장(대통령), 1981년 대통령표창(대통령), 1986년 근정포장(대통령), 1997년 홍조근정훈장(대통령) 등을 받음, 통상산업자원부 산업기술국 기술과장, 특허청 국장, 특허심판원 심판장 역임, 현재 유리안 국제특허법률 사무소의 대표변리사로서 활동하고 있음. 시집 <봄의 왈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