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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강우식 시인 / 재래시장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3.
강우식 시인 / 재래시장

강우식 시인 / 재래시장

 

 

나는 거의 일주일에 한 번씩은

재래시장에 간다.

시장은 수많은 먹거리들이 널려 있는

바다와 같다.

 

홀아비 신세라 먹고 살기 위하여 들르는

시장이긴 하지만

사람이 그리운 나는

사람 냄새 맡으러 가기도 하고

 

먹고 싶은 과일, 생선, 야채 등속을 사서

날로 먹거나 직접 음식을 해먹는 맛에 간다.

이것은 마치 고기를 잡아

선상(船上)에서 해먹는 식사 같거나

어릴 때 천렵 가서 해먹는 어죽 맛이다.

 

매끼를 다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르는

맛으로 먹는 것은 아니지만

가능하면 마음만은 그런 맛을 내고자 한다.

 

식탁에 가까운 친구나

젊은 날에 사랑했던 수많은 여자 중에

한 명을 불러 앉혀놓은 듯이

(이러려고 내다보고 일생 많은 여자들을 사귀었었나.)

혼자 사는 몸이 외롭지 않게 먹는다.

 

죽기 살기로 억지로 먹는 것보다

어차피 악다구니를 써가며 사는 인생

나나 그대나 다 콩나물 통의

고만고만한 콩나물 대가리가 아닌가.

 

시장에 들러 활기차게 먹거리를 고르며

나도 이 사람 저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이 작은 행보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내 삶의 삼동에도 내가 가지는

나만의 봄날의 초록 싹 같은 숨결이다.

 

 


 

 

강우식 시인 / 사랑

 

 

바다 속 땅 속

몇 천만 자 깊이 유전은

발견하면서도

몸 속 유전은 왜 모를까

 

유전이다

 

내 가슴속 사랑의

샘이 터졌다

 

 


 

 

강우식 시인 / 개탄하는 선거판

 

 

정치를 하시겠다는 어른들이

맨 범죄 전과자 사기꾼

부동산 투기꾼들로 득시글대고

감방에서도 당을 만들고 출마를 하고

백성들은 그 무리에 가담하여 패당을 짓고

거기다 4년 내내 참았던

이때다 싶은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별별 말들의 잔치.

투표권을 가진 우리 아이들이

너무 일찍 어른들의

세계에 초대한 것이 미안해진다.

정치에 대해 땅을 치며

입이 열 개라도 탄식도 못하겠다.

 

 


 

 

강우식 시인 / 유종의 미有終之美

 

 

고스톱 판에서 몇 푼 잃고

두 손 털고 좀 섭섭하지만

내일이 있으니까 중얼대며 일어선다.

놀음판이 아니더라도

걸핏하면 내일이 있으니까 라며 살았다.

만만한 게 내일인 듯 미뤘다.

쌓아놓고 사는 내일인 듯……

그 내일이 내 모든 꿈이 담긴 오늘임을

다 늙어서야 절감하는 ‘내일’이여.

내일이 없으면 미래도 없다.

내 곁으로 다가올 꿈도 끝이다.

내 인생의 생로병사도 희로애락도

내일에 유종有終의 미美처럼 걸고

내일이 없는 체 오늘을 산다.

유종의 미란 결국은 두 손을 부딪쳐

아픔이 아니라 박수가 되는 잘 끝난 상처다.

우리가 예사롭게 하는 말

“박수치며 끝냅시다.”가 유종의 미다.

 

-시집 『주마간산走馬看山』, 리토피아, 2024

 

 


 

 

강우식 시인 / 염불

 

 

생사 길은

예 있으매

늘 곁에 소줏잔을 놓고 앉아 있어서

순수하고

한쪽 다리를 절어서

병든 시대에 더욱 아름다웠던

시인이 눈을 감았다.

진달래 꽃살 타는 아내를

어느 시인 중놈이 몰래 짓이기고 가도

살이 고파서 그렇거니

슬며시 눈감아주던

우리의 처용

생전에 그에게 진 빚 때문에

차마 아니올 수 없었던

몇몇 시인들만이 지키고 있는

어두운 빈소에

반쯤 시정잡배가 다 된 시인 중도 섞여 있다가

목탁을 들어서

염불을 한다.

살아서 나에게 감아준 눈

눈 하나로도 부처되리니

아주 감은 눈 뜨지 말고

나무아미타불.

 

 


 

 

강우식 시인 / 귤

 

 

등을 씻다가 무심결인 듯 아내는

내 불알을 만진다. 손아귀에 쥔 거

귤만하여 무슨 향기라도 나는 건가

인제는 이러한 일도 무심하구나

 

 


 

 

강우식 시인 / 흙

 

 

일생 땅 한 뙈기 가진 것 없어도

내 죽어 누군가의 흙이 되다니 고맙다.

 

 


 

 

강우식 시인 / 별

 

 

아무리 진흙탕 막살이로 살아왔어도 밤하늘에

언제나 먼지 하나 묻지 않은 내 유년의 별사탕이 있다.

 

 


 

 

강우식 시인 / 이사

 

 

내 사는 아파트 단지에

이삿짐 나르느라 오르내리는

지게 소리가 들린다.

설한풍 삼동, 이 추위에

소문도 없이 잘 살고 있더니

갑자기 어디로 옮기는 걸까.

을씨년스럽다.

사연이 많은 이삿짐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들어보면 구구절절하겠지.

모른 체 귀를 막자.

나도 사연이 많게 이웃마을 아닌

서역 땅으로 이사 와서

산 섧고 물 섧고 낯설어도

물가에 내놓은 자식 같은

불안한 삶을 접고

이사 안 한 듯 살고 있다.

어디서나 쑥쑥 자라고 잘 견디는

미나리로 초록을 만들고 있다.

 

 


 

 

강우식 시인 / 불가항력(不可抗力)

 

 

늙은이가 길을 가다 보면

젊은이건 아녀자둘이건 모두들

바지런히 한 발 앞서 간다.

 

누가 만들어 입에 담았는지 모르지만

어릴 때 자주 부르던 노래에

'앞에 가는도둑놈, 뒤에 오는 양반'이 있었다.

 

새삼 늙어 이제는 사라진 지

옛날인양반 짓거리도 아닌데

나처럼 뒤처지는 이도 생긴다.

 

늙어 체념을 하면서도

어떻게 된 걸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불가항력인 줄 알면서도

불가항력을넘어

슈퍼맨처럼 힘이 샘솟는 꿈을 꾼다.

 

앞뒤도 안살피고 앞장서고 싶다.

속도 위반하여 딱지를 떼도

발에 바퀴를 달고 마구 달려보고 싶다.

 

발보다 마음에 바퀴가 달려 있다.

그 욕심이 만리장성을 이어나가듯 한다.

마음에는 불가항력적인 신비가 있다.

 

 


 

강우식 시인

1941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문학박사. 1966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별』 『사행시초』 『벽, 살아가는 슬픔』 『사행시초 2』 등 다수. 제20회 현대문학상, 제6회 펜클럽문학상, 제34회 월탄문학상 등을 수상. 성균관 대학교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