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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연우 시인 / 아름다운 힘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3.
서연우 시인 / 아름다운 힘

서연우 시인 / 아름다운 힘

 

 

은행나무 잎들의 사이가 멀어진다

열매는 햇살을 끄집어 당기고

초록 속에 숨어 있다 들킨

바람이 은행잎을 물고 번지점프 한다

 

은행나무 한쪽이 잠깐 빈다

나의 한쪽도 잠깐 빈다

내가 만든 시간이 아니라, 공전 중인

지구의 기울어진 시간 안에서

우리는 서로 내일의 밑받침

 

아무도 모르게 저를 키워 온

바닥을 뒹굴던 들통 속

말복 지난 습기가 가난해진다

다시 무언가 먹을 수 있다는 희망

알이 단단히 밴 감정으로 보송보송하다

 

가을이 소 눈처럼 맑다

 

-시집 『라그랑주포인트』 중에서

 

 


 

 

서연우 시인 / 엘리베이터

-폭염

 

 

 계단을 오른다

 엘리베이터는 2층에 있고

 엘리베이터보다 높이 오른다

 7층이다헉헉

 

 계단은 계속 이어진다

 1층도 아니고 지하도 아니고

 엘리베이터는 왜 2층에 있을까

 13층이다 허억허억

 

 엘리베이터는 아직도 2층에 있다

 오늘 지구는 예정보다 빨리 돈다

 돈다 돈다 계속 돈다 눈앞이 흐려진다

 19층 허어억허억윽

 

 엘리베이터는 2층에 있다 다행이다 아니다

 엘리베이터가 움직였으면 하는 이유와

 엘리베이터가 움직이지 않았으면 하는 이유가

 오른발 왼발처럼 20층까지 함께 오른다

 

움직이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기계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데 왜 여름만 길게 이어질까 움직이지 않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자연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데 왜 심장은 절대주의가 아닐까

 

 허억 휴우 후

 따라 올라온 고투하는 신음과 함께

 쌓인다 벽 안의 적막한 음모는

 움직여야 하는 것이 움직이지 않을 때

 그 부작용과 작용에 대해

 뭔가 좀 거창하고 거룩한 이유는 없을까

 

다리를 꼬고 컴퓨터 앞에 앉는다 얼음 사이를 뚫는 일회용 빨대, 빨간 립스틱을 바른다 피부를 지키는 선크림,

지구와의 인연에 대해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은 무덥다

 

 폭염에 엘리베이터는 얼어붙는다

 

-월간 <현대시> 2018년 10월호, 신작특집 -

 

 


 

 

서연우 시인 / 달이 떠오를 때까지

 

 

 달은 살아 있다 살아, 떠오를 곳을 향해 멍석을 펼친다 상을 놓고 병풍을 세우고 떡을 놓고 포를 올리고 촛대 를 놓고 초를 꽂고 향을 피운다 달은 살아 있다 살아, 바람이 지운 촛불에 종이컵을 씌우고 초헌관이 오르고 아 헌관이 오르고 종헌관이 오르고 고축을 한다 차례차례 잔을 올리고 절을 하고 잔을 올리고 절을 한다

 

 달은 살아 있다 살아, 통술거리 어디든 기타를 메고 나타나 신청곡도 부르고 부르고 싶은 곡도 부르고 손님 이 팁을 주면 주는 대로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노래하던 악사 원형이 간암으로 입원을 하고 성미예술촌 천 여사 는 마음이 휘어져 멍석 앞에서 머뭇 머뭇거리다 간절히 아주 간절히 절을 하고 절을 한다 달은 살아 있다 살아, 다시 악사가 되어 돌아오기를 바라는 봉투를 놓는다 흰 봉투를 놓고 절을 하고 절을

 

 상에 놓인 떡 하나가 떠나고 둘이 떠나고 셋이 떠나고 넷이 떠나고

 잔이 비고

 대보름 달보다 먼저 뜬 별 하나가 기타를 메고 촛불같이 노래를 한다 음복을 한다

 

-계간 《시사사》 2022년 여름호

 

 


 

 

서연우 시인 / 무슨

 

​폭염에 폭우가 헤매는 영상을 보고 있었다

​빗금친 세상의 틈을 메우고 있었다

모든 게 분주했다

​아무도

​분주하지 않았다

​두꺼비집 늙은, 셔터가 내려갔다

​비의 뒤에서

​물이란 물은 다 무리를 지어 전력 질주하고 있었다

​들에는 호수가 생겨나

​소들이

​절 마당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집시처럼

-월간 『현대시』 (2020년 12월호)

 

  


 

 

서연우 시인 / 초롱아귀가 아니다

 

 

#1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새가 있다

영업을 마친 이불집 앞 평상에 앉아 있다 잘 개킨 이불위 베개 같다

 

아무거나 하는새가 다짜고짜 그래 미운 정도 정이라고 나도 전임이 나은 것 같다 맞장구치며 평상 앞에서 차 문을 연 채 백설기를 나누고 있다

 

아무거나하는새가 백설기 몇 개를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새한테 건네주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새는 손사래를 치고 있다

 

아무거나하는새가 아무 잘못이 없는 백설기를 들고 어찌해야할지 몰라 한다

 

새는 왜 받지 않는가

새는 왜 당연히 받을 거로 생각하는가

 

아무거나 하는새는 그 자리를 최대한 빨리 빠져나가고 있다

 

#2

 

한곳만 보는새가 있다.

햇빛 가득 고인 은행 자동화기기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다 동시에 다른 곳을 보며 줄 달린 볼펜처럼 앉아 있다

 

보이는 건 다 보는 새가 벤치 앞에 주차하고 있다

 

다른 새들이 한 곳만 보는 새를 보지 않으면서 보고있다

한 곳만 보는 새는 보는 것에 내성이 생기고 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들을 보면서 보지 않고 있다

 

새는 눈을 뜨고 보이는 것을 볼까

새는 눈을 뜨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까

 

보이는 건 다 보는 새는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방향으로 한 곳만 바라보는 새의 세계를 상상하고 있다

 

#3

 

새는 어디에나 있지만 새는보려는 사람에게만 보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새를 아랑곳하지 않고

한 곳만 보는 새를 아랑곳하지 않고

깃털처럼 첫눈이 세워둔 차 위에 흩날리고 있다

 

-월간 《현대시≫ 2023년 2월호에서

 


 

 

서연우 시인 / 슬픔증

 

 

나는, 두렵고 위험한 존재다

블랙홀로 가는 검고 붉은 공간의 입구에 서 있다

가랑비 울울하게 갈비뼈를 빗는다

 

울음을 안주삼아 소주를 마신다

억압된 말하기의 도구

한숨을 친구삼아 한 모금 연기를 뿜는다

근원 모를 불안에 대한 위로

 

원근감 잃어버린 말들 분사되어 흩어지고

텅 빈 바다에 낡은 돛배 한 척 흔들리고 있다

순간 덮치고 들어온 파도

육지에 가 닿지 못하는 사유를

갈기갈기 물어뜯는다

 

나는 비닐장막을 노크한다

깨끗이 빗은 갈비뼈,

야무진 가지 하나 뻗는다

붉은 꽃봉오리 부풀어 오른다

 

매트릭스다, 하얀집

차가운 수액은 따뜻한 수혈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지금 동서병원* 간다

나는 초록이다

 

* 마산에 있는 정신분열증, 조울증, 알콜중독, 치매 전문병원.

 

 


 

 

서연우 시인 / 하늘은 도대체 몇 개의 물뿌리개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여름은 재즈오케스트라 구름의 정기공연으로 시작되었다

 

재즈오케스트라 구름의 지휘자는 바람이다

나무는 죽음을 보는 고양이*의 울음을 가진 바이올린

비는 팀파니스트

닫힌 창문을 총 쏘듯 두드리며

피터와 늑대*의 사냥꾼 흉내를 내고 있다

 

총소리에 놀란 아래층 된장 끓는 냄새

하안거중인 물먹는 하마 입속으로 숨어든다

월영공원 벤치를 분양받은 추리닝 아저씨

상가 계단 밑에서 비를 관중으로 디디알 재즈댄스 춘다

 

바람의 지휘자 팀파니스트

새까맣게 탄 누룽지 같은 아스팔트를 깨트리고

벽을 뚫는다

무시무시한 물의 그늘 호른소리

닿을 수 없는 지옥의 음역 그림자 되어 다가온다

 

뜨거움을 잃은 여름은 수장되고, 아가미 없는 나는 기형어류처럼 땅으로부터 유배되었다

 

악보 없는 공연에 앙코르를 보내야 하는 것인가

 

땅의 숨소리, 매미밴드의 미니콘서트가 그리운 밤

 

* 변승욱 감독의 영화 ‘고양이: 죽음을 보는 두 개의 눈’

* 러시아의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의 클래식 음악동화

 

 


 

서연우 시인(창원)

1968년 경남 창원 출생. 창신대학교 미술디자인학과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문화교양학과 졸업. 2012년 《시사사》로 등단. 시집 『라그랑주 포인트』. <思月>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