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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환 시인 / 환장하겠다
한 머스마가 달려오더니 급히 말했다 선생님 ‘끼’로 시작하는 말이 뭐가 있어요? 끼? 쫌만 기다려 나는 사전을 뒤졌다 ‘끼니’가 얼른 나왔다 녀석은 단어를 찾는 동안 신이 나서 지껄인다 서연이하고요 끝말잇기를 했는데요 걔가 ‘새끼’라고 하잖아요 곧 내가 말했다 응, ‘끼니’라고 그래라 녀석이 환해져서 달려갔다가 껌껌한 얼굴로 금방 다시 왔다 선생님, 그 새끼가요 ‘니미씨팔’이라는데요?
이봉환 시인 / 개옻나무 종만이
가을바람 불면 누구보다 먼저 수줍던 개옻나무를 아무도 눈여겨봐주지 않았지 냄새 난다고 킁킁거리고 옻오를까 봐 흠칫 경계하며 친구들 저만치 피해만 다녔지 홀어미의 가난 밑에서 겨우 구구셈이나 마치고 돈벌이 떠난 국졸이 최종 학력인 동창생 종만이 늘 간이나 보고 마음은 통 안 주는 도회 사람들 틈에서 소똥 개똥 안 가리고 닥치는 대로 굽실굽실 막일해댔지 쓰레기 매립장 척박한 땅에 악착같이 뿌리내렸지 삼십 년 바지런히 트럭 몰아 산지사방을 휩쓸고 그 사이 다복다복 이룬 잡목 숲에서 고라니 새끼들이 뛰고 아내는 단 한 푼도 금쪽 마냥 쟁여 모았지 오십 다 된 나이에 추석 쇠러 불쑥 고향에 나타난 개옻나무 종만이 동네 어르신들 잡수시라고 즐겁게들 먹고 노시라고 맥주와 소주 한 상자에다가 돼지 한 마리 내놓는다 연신 술을 따르며 귓불 벌게진 개옻나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동네 어른들을 대접한다 모처럼 저도 고향에서 사람대접 한번 받는다 그려, 그려, 종만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었구먼 아들 딸 낳고 집 장만하고 훌륭히도 장성했구먼
이봉환 시인 / 여울 근처 여름 숲에서
저 녀석, 저러다간 울지도 모르겠는걸? 떡갈나무는 두어 발짝 떨어진 숲 안쪽에서 중얼거린다. 물결무늬를 한창 펼쳐내던 떡갈잎들, 두터워진 그 투박한 손바닥을 써럭써럭 맞비빈다.
엊그제 장마가 다녀간 뒤로 부쩍 생각이 많아진 개옻나무는 여울에 떠가는 주황색 잎이 저인 줄을 모르고 깊은 수심에 코가 쑥 빠져 있다. 떡갈나무는 그런 그의 우수가 여전히 걱정이고,
멧비둘기의 아내가 죽었는지 구국구욱 울음 뜸해진 산속이 요즘 따라 소슬하다. 산제비나비가 이윽고 어슬렁거리며 나타나 검은 날개를 펄럭이자 주변은 금세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이상 없는 저녁을 확인한 제비나비는 처자들 석 달 못 본 사내처럼 여름 숲으로 난 제 골목길을 쏜살같이 달려서 오른다.
이봉환 시인 / 도토리들
어디 가을이 얼마큼 왔나 궁금해 산에 갔더니 키 작은 졸참나무 도토리들 바위틈에 수월찮이 나앉아서 꼭 포경수술 한 동무지간들 목욕탕에서처럼 쪼그리고 앉아서 운동 나온 아낙이 흘끔 보거나 말거나 큰놈 작은놈들 거시기가 밖으로 볼똑하니 나오도록 앉아서 가을볕 따글따글 쬐고들 있습니다요
이봉환 시인 / 피어버린 꽃에는 안 보이는 떨림이
청소 시간 비질에 열심이던 다영이가 또록이 묻는다. 선생님, 누군가를 좋아하면 진짜 가슴이 두근거려요? 왜? 너도 요새 누군가를 보면 가슴이 두근거리냐? 아니요, 책에서는 그러던데 진짜도 그러나 궁금해서요. 피어버린 꽃에는 안 보이는 떨림이 그 애 얼굴에 어린다.
이봉환 시인 / 박세화
가정방문 갔는데 13평 주공 아파트에서 지체 장애 1급 언니랑 동생이랑 엄마랑 살고 있었다
엄마는 당뇨 합병증을 몹시 앓았고, 장애 언니를 제가 엄마처럼 보살피고 있었다
동생이 전염병에 걸렸는데도 한 방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공부는 언제나 뒷전인,
주번 활동도 게으르고 청소도 잘 안 해 야단을 치려하면 쿡, 감춘 가시를 드러낸다
차가운 비 머금은 그 애 눈망울이 진초록을 다 빨아 마셔버려서인지 가을이 점점 깊다
해 갑자기 짧아진 날 주공 아파트 앞 느티나무 잎들 시멘트 바닥에서 오그라들며 운다
-시집 『밀물결 오시듯』 에서
이봉환 시인 / 숨겨놓은 꽃등이 환해졌다
목련 꽃 아린이 껍질을 부풀리며 등 켤 채비를 한다 방 안의 귀여운 불빛들 톡톡 봉창을 두드린다
너무 깊고 아릿한 너를 뉘에게 다는 말하지 못한다 깜깜했던 그 마음이 한 시절을 지나와서는 환히 등을 밝힌다
아,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어두운 내 마음 여기 있어 환한 당신도 거기 있는 것이다
-시집 『밀물결 오시듯』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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