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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보영 시인 / 어제보다 좀 더 갔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4.
문보영 시인 / 어제보다 좀 더 갔다

문보영 시인 / 어제보다 좀 더 갔다

 

 

다시 찾아가고픈 것이다

표범의 얼굴에 난 두 개의 검은 줄

빛을 흡수해

내리찍는 날을 견딜 수 있다

눈을 감으면 사방이 깜깜하다

아무것도 보고 싶지 않아서 눈을 감지만

너는 눈꺼풀 뒤를 보고 있다

게오르크 어제보다 더 갔다

미래가 두려워서 오늘은 여기까지만 본다

 

 


 

 

문보영 시인 / 도로

 

 

날마다 눈을 뜬다 착실하게

악몽을 꾸었다

 

빈 골목에 실편백나무 한 주를 꽂자

골목이 편협해진다

 

내가 협소해 눈을 떠본다

 

질주하고 싶어

등을 떼어내기 위해

 

탁 트인 도로를 달리면

온 몸을 이실직고하는 기분이 들 거야

 

나의 등이 마치 나의 이변인 것처럼

 

달릴수록 등은 강렬해지므로

눈을 질끈 뜬다

 

눈을 아주 크게 뜨면 무엇과도 눈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

 

빨리 달릴수록 나의 등이 나를 바싹 따라잡고

 

멈추자

등이 먼저 주저앉고

나는 사라진다

 

—시집 『책기둥』 (민음사, 2017)

 

 


 

 

문보영 시인 / 배틀그라운드

— 떡 진 머리에 관한 슬픈 말장난

 

 

 바닥을 기는 송경련의 머리는 떡 졌다. 왕밍밍과 송경련 남부로 향한다. 해변을 따라 기어서 간다. 총신이 긴 구식 총. 송경련. 엎드린 자세로 조준한다. 왕밍밍. 녹지 않는 땅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도 살지 않는 땅은 용기 있는 땅인가? 송경련은 머리가 떡졌지만 조준하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 듀오가 해안선을 따라 기어간다. 세상은 더듬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호수를 떠올린다. 호수의 동쪽 지대는 슬픔이 넓어서 발을 담그기에 좋지. 우리가 여기 끌려왔을 때를 기억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서 진실에 가까운가? 송경련의 심장에 작은 문제 발생한다. 심장 판막을 갈자. 너 죽어? 부추기지 마. 등에 찬 skorpion이 무겁다. 떡 진 머리가 감추고 있는 귀밑 상처. 상처에서 윤이 난다. 몇 마일은 남았어. 힘을 비축하고 발싸개를 갈자. 다시 조준했고 그동안 심장 판막은 흘러간 피가 되돌아오지 않도록 도왔다. 귀를 닦아줘. 송경련은 그런 말은 할 줄 모른다. 너는 용기 있는 땅인가? 돌아가지 않는 게 중요하지. 포복 자세로 더 간다. 그녀들은 위험하건 말건 적응해버렸다. 어제는 죽는 게 좋았지. 바라는 것을 멈출 수 있다는 점에서. 왕밍밍은 말하는 대신 덤비고 싶었다. 죽는 건 익숙해져도 괜찮지만 죽기 직전이 익숙해지면 끝인 거다. 송경련. 조준하는 대신 덤비고 싶었다. 송경련의 심장이 떡 져 있다.

 

 왕밍밍과 송경련을 조준하는 무리가 있다 그들은

 기어 다니는 인간들을 가리키며

 저게 바닥에 있어야 하는 게 맞아요?

 묻기도 한다.

 

― 시집 『배틀그라운드』(현대문학, 2019)

 

 


 

 

문보영 시인 / 불면

 

 

누워서 나는 내 옆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내 옆의 새벽2시는 회색 담요를 말고 먼저 잠들었다

 

이불 밖으로 살짝 나온 내 발이

다른 이의 발이었으면 좋겠다

 

애인은 내 죽음 앞에서도 참 건강했는데

 

나는 내 옆얼굴에 기대서 잠을 청한다

옆얼굴을 베고 잠을 잔다 꿈속에서도 수년에 걸쳐 감기에 걸렸지만

나는 여전히 내 발바닥 위에 서 있었다 발바닥을 꾹 누르며

그만큼의 바닥 위에서 가로등처럼 휘어지며

 

이불을 덮어도 집요하게 밝아 오는 아침이 있어서

 

잠이 오면

부탄가스를 흡입하듯

옆모습이 누군가의 옆모습을 빨아들이다가

 

여전히

누군가 죽었다

잘 깎아 놓은 사과처럼 정갈했다

 

 


 

 

문보영 시인 / 비모의 연애

 

 

 나는 그것의 뒷모습만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나를 본다 그들이 바라봐야 할 무엇이 있고 내가 그것의 뒤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의 뒤에 있으므로 놈의 표정을 알 수 없다 그것은 두 발로 서 있으며 오른손으로 인사를 건넨다 왼손은 스케이트보드를 들고 있다 놈은 바닥에 설 줄 안다 바닥에서 걸을 줄도 알고 뛰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바닥에 서 있는 사실이 징그러울 때 새로운 바닥을 꺼낸다 놈은 보드에 올라가 흔들린다 놈은 흔들리는 게 좋다 흔들려야 안심이 되는 건 견고한 바닥은 뒤통수를 잘 치기 때문이다 세상이 흔들리는군, 넘어지겠어 그는 안심한다 흔들리는 바닥은 사랑에 관한 은유인가? 놈은 이상한 말을 지껄여본다 나는 뒤에서 놈의 사랑을 지켜본다 사랑이 뭐야? 놈이 허공에 묻는다 철학이 개소리가 되는 순간, 이라고 허공이 답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게 뒷모습만을 보였으므로 놈이 얼마나 사랑을 이해하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문보영 시인 / 약속

 

 

 찰리의 팔에는 문신이 있다 life is good with your eyes closed 삶은 견딜 만하다 두 눈만 감는다면 눈만 감으면 인생도 근사해질 거야 지껄이며 나는 찰리를 본다 팔에 적힌 글귀 때문에 찰리는 입체적이다 찰리는 어젯밤 죽었다 찰리의 죽음을 예언한 놈은 데즈먼드다 데즈먼드 떄문에 찰리는 죽는다 나는 눈물을 흘려본다 베개에도 묻혀 본다 꿈에서 나는 데즈먼드가 된다 찰리는 아직 살아 있다 왜 안 죽을까 하루살이는 하루만 살아서 입이 없다 어떤 하루살이는 이틀하고도 열 일곱 시간을 산다 닷새를 사는 놈도 있다 말을 안 지키는 것이다 왜 안 죽을까 찰리는 살아 있다 죽기로 해놓고 죽지 않다니, 김빠지는군, 데즈먼드가 혼잣말을 한다 무언가 죽지 않아서 김빠진다니 그런 말을 데즈먼드인 내가 하다니, 놀라며 나는 찰리를 본다 너는 눈을 감는다 우리는 놀이기구를 타고 있다 눈을 감으니 정말로 인생이 근사해지는걸! 데즈먼드는 웃는다 왜 안 끝날까 너는 그 정도로 강한가? 신난다! 너는 우겨본다 기쁘다! 나는 소리쳐본다 우리는 놀이기구를 탄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너무 충분해서 당분간은 내가 아닐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데즈먼드가 된 내가 지껄이고 찰리와 나는 물 튀기는 슬픔을 잊기 위해 눈을 감아본다

 

 


 

 

문보영 시인 / 지각 유영 대회

 

 

소월로에서 내 몸이 중력을 포기하고 하늘로 띄워진다.

난다.

내가 나는 것이 아니라 날아지는 것이다.

내일이 아니라 내일이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 일어나는 행위이며 남일이 아니라) 내일이다.

 

자유롭고 싶은데 자유롭고 싶다고 쓰는 것이 자유롭지가 않다.

반복되는 것은 갇히는 것이다.

 

무반복을 좇다보니 떠다니는 초파리들처럼 두서없다.

초파리와 내가 다른점은 크기이다.

초파리보다 훨씬 체구가 큰 나는

초파리보다 긴밀한 생각을 가지고 지구의 지각,

아니 지구인의 지각을 유영한다.

지구인의 지각 유영 대회에서 1등을 하고 숨이 차

문보영씨에게 외친다.

 

우리는 현실을 사냥해야 해. 현실을 사냥해야해?

사자처럼 무서운파마 머리를 가지고 아웅대며

현실을 사냥해야해?

 

 


 

문보영 시인

1992년 제주에서 출생.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졸업. 2016년 중앙일보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책기둥』 『배틀그라운드』 『모래비가 내리는 모래 서점』. 산문집 『사람을 미워하는 가장 다정한 방식』 『준최선의 롱런』. 2017년 제36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