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추종욱 시인 / 밤의 여행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5.
추종욱 시인 / 밤의 여행자

추종욱 시인 / 밤의 여행자

 

 

바람이 불고 습도가 낮은 우주를

그가 배회한다

별빛이 켜진 대문들을 지나,

거기 그의 행성이 있다 채널을 바꾸듯

대문을 들어서던 그가 외계인처럼 중얼거린다

그의 눈이 잠시 은하계 속을 떠돌았다

벌써 이만큼 우주가 웃자라

행성으로 오는 행로를 좀체 찾기 어려웠다

그가 살았던 행성 속에는 오래 전부터

먼지만이 이사와 살았던 흔적,

라이트를 켜자 지문 같은 거미줄이,

안방 문을 열자 목소리 같은 문소리가

먼지 쌓인 소파가 등 뒤에서

그를 조용히 껴안는다

창밖은 무성하게 자란 우주로 극성이고,

그의 삶은 애초부터 무성의했다

방구석 고물TV는 같은 채널에 고정된 채

또 다른 은하 한 곳을 비밀처럼 알려준다

마음은 엔진을 달고 마음껏

우주 끝을 활보했던 적이 있었던가.

불빛처럼 지붕에 올라 멀리 떨어져 있는

수많은 행성들을 찾으며

그의 여행은 좀체 깨지 않는다

그가 꿈속에서 다시 깜빡 존다

예전에 날린 적 있던 비행접시가

거실 잠든 머리맡에 불시착한 채

깨진 창 길게 불어오는 바람과 교신한다

그의 집이 무중력 상태로 우주 속을

날고 있다는 것을, 잠든 그는

잘 알지 못한다

 

 


 

 

추종욱 시인 / Blue Day

 

 

서울이거나 뉴욕이거나 암스테르담의 뒷골목을

정처없이 배회해요

난 킬러가 되고 싶었어요

뒷주머니에 권총 한 자루를 숨기고

나를 조준하는 것들을 찾아

내가 먼저 방아쇠를 당기고 싶었어요

하늘이 삐딱하게 빨강 목도리를 매고

여섯 시를 돌아 일곱 시로 가고 있어요

곧 세상이 어두운 총구 속 같을 거예요

탕! 하고 어둠이 다급하게 몰려오는

저녁 무렵에 서 있으면,

총알이라도 박힌 듯

왜 하늘 한 쪽이 저토록 아픈 걸까요

한 블록만 더 돌아가면 새벽이 올 거예요

허름한 맨하탄 여관 현관문을 열면

탕!탕!탕! 총을 쏘며 문이 펄럭이고

객실 창문을 열면 도시의 낡은 창들이

총구처럼 이 떠돌이를 노려볼 거예요

불빛들이 날아와 가슴에 박혀

내 코트와 목도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가

아무 대사도 없이 침대 위로 쓰러지겠죠

세상이 무겁다는 듯 말이에요

날렵하게 움직이기엔 너무 많은 살들이

내 삶의 허리를 잡고 놓아주질 않아요.

탕!탕!탕! 권총소리와 함께

이봐, 당신! 좀 가벼워져야겠어

벽에 걸린 액자 속 윌리엄 클라인의

총구가 열리 듯

두 발의 불빛이 좌심방 우심실을 관통하면,

내 몸에서 근심이 빠져나가 이제 세상이,

좀 가벼울 수 있을까요

 

-계간 <서시> / 2008년 여름호

 

  


 

 

추종욱 시인 / 피아노 입문기

 

 

 학원에서 배운 첫 번째 음은 도였다 음계를 외워가던 그해, 아버지의 고스톱은 잃은 돈이 많아 월광 소나타로 구슬펐다 술 취한 아버지는 밤마다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놀람 교향곡의 실감이 입체적으로 들려온다 파시즘은 아버지를 더 독재자로 만들었다 파마 풀린 베토벤 머리를 한 엄마 훌쩍거리며 도도- 하고 울었다 엄마의 낮은 음은 오래 갔다 오빠의 가슴이 단음계로 차갑게 요동을 쳤다 내 손끝을 떠난 7음계들은 당황했다 머리 좋은 우리 오빠 옆집 모차르트의 매력을 넘어서지 못하는 살리에르였다 그 후유증으로 열등감에 울었다 엄마는 오빠를 사랑했지만 내가 건반 위에서 도의 위치를 잃은 것처럼 오빠의 청춘은 방황의 연속이다 비산동 266번지 우리 가족은 건반의 흑과 백처럼 존재했다 우리들은 날마다 도-도- 하고 울어야했다

 

-계간 『다시올문학』 2009년 가을호

 


 

 

추종욱 시인 / 여왕개미

 

 

좁은 골목으로 들어서면

수많은 자식들을 세상에 낳은

늙은 산부인과가 있다

내 아버지는 친아버지가 분명하지만

한 형제이면서 삼촌이기도 하다

나를 세상에 내놓은 산부인과는

내게 엄마였고 이모였고 할머니이기에

산부인과를 지나다 마주친 사람들은

형이거나 여동생이거나 삼촌, 아니었을까

전깃줄이 집과 집을 마을과 마을을

핏줄처럼 이어져 흐르고 있었으므로

집집의 밥상에는 내가 좋아하는 된장찌개가

뚝배기 속에서 끓고 있을 것이며

사람들은 둥근 수저를 들어

비슷한 종류의 저녁을 먹고 있을 것이다

그들과 나의 의식주가 닮아 있는 것은

같은 산부인과를 어머니로 둔

한 형제이기 때문이다

골목 끝, 만삭의 산부인과가 분만을 시작한다

이제 나는 눈을 감고도 알 수 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내 동생이, 곧

그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다

 

 


 

 

추종욱 시인 / 보르헤스의 숲에는 푸른 숲이 있을까?

 

 

 창밖의 간판들 내 눈을 유혹하고 있네요 저 오래된 거리의 풍경이 보르헤스의 숲이 아닐까요? 마침 푸른빛 전화기가 울리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나는 빨간 입술을 수화기에 대고 목소리를 지평선 너머까지 힘껏 던졌죠 몇 시 몇 분에 만날까요? 라끄베르 대형포스트 위의 비둘기집이나 해 한 마리 쪼르르 배달되는 맥도널드 간판 속도 나쁘진 않겠죠? 그럼 어떤 간판을 설명해야 되죠? 지금 입술과 혀 사이에 독설이 설탕처럼 녹고 있어요 보르헤스 숲속 전화기가 뚝, 끊어져버렸네요 여러 겹으로 쌓인 고물들이 전봇대 아래, 입을 벌려 시간들을 토해내고 낡은 TV는 리어카에서 떨어질 것만 같아요 한 노인이 헤진 소매를 걷어 올리는 동안 대형포스트 속의 여자가 측은한 눈빛으로 웃고 있어요 보르헤스의 숲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가고 있었거든요

 

 보이지 않는 고물들의 영혼을 흩뿌리며 달리고 있는 리어카, 세월이 맞물려 팽팽하게 돌아가는 바퀴가 보여요? 노인은 저 숲의 풍경 속으로 유유히 사라져가고 있네요 내 빨간 입술의 힘은 엄마를 불렀어요 엄마! 창밖 보르헤스의 숲이 너무 답답해요 미쳐버릴 것만 같아요 보르헤스의 숲에는 푸른 숲이 있을까요?

 

 


 

 

추종욱 시인 / 한밤의 수학정석

 

 

낡고 작은 밥상은 형의 오래된 책이다

밥상 모서리에는

흘린 한 톨의 밥알이 말라붙어있고

펼쳐진 수학정석의 해법들이

연실처럼 풀려 나갈 때

멍든 어머니의 몸은

수많은 수학공식들처럼 얽혀 있다

한 밤 내내 눈이 내리는 날

성에 낀 창가에 앉아

형이 손때 절은 수학정석을 탐독한다

외우는 공식들마다

밀린 납부금에 말라가는 절망들을

풀어줄 유일한 해법으로 여겼다

형이 갖가지의 오차들을 고쳐나간다

깊어가는 긴 한 숨의 탄식이

연산 기호들 속에 오래된 고뇌로 꽉 들어차 있었고

수수께끼가 풀릴 때마다

차디찬 환멸의 예감은 늘어 갔지만,

새벽을 향해 시간은 조금씩 깊어 가고

<조건부확률과 확률의 곱셈정리>

부문에 이르러 잠깐 졸았던 형

흩어졌던 숫자들을 애써 끌어 모으며

허약한 집안 내력의 허에 찔리면서

형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수학정석과 싸우는 것일 뿐

술렁거렸던 좁은 방은 자정을 넘어

남은 식구들은 그대로 잠이 들고

새벽잠을 설치는 나는

손에 든 볼펜 끝에서 느껴오는

형의 가장 오래된 꿈을 훔쳐본다

 

-계간 <시와정신> / 2008년 가을호

 

 


 

 

추종욱 시인 / 내가 사랑한 수식

 

 

 어둠속 출구가 지워진 독서실에서 나는 수학공식에 갇혀 서성인다 늘어나는 수식들을 외워가던 내가 우애수* 앞에서 쉄표처럼 멈추어 선다 수식을 따라 풀어갈 때면 늘 사랑이 숨어있었다 책갈피 사이로 바람이 분다 흔들리는 숫자들을 손끝으로 만지고, 읽는다 놀랍도록 서로를 끌어당겨 뭉쳐지곤 하는 우애수가 뜨거운 밤, 한 손에 든 밀크커피처럼 부드럽게 무한수로 이어진다 내 머릿속을 헤집고 돌아다닌 이 수식이 기억하는 것은 우주 너머로 날아가고 있는 영혼을 붙잡는 것이다 우애수는 신이 맺어준 인연이기 때문. 나는 피타고라스 이후, 세상에서 오래된 이 수식에 닿을 생을 되짚어본다 잠깐 졸았던 사이, 내면을 도굴하는 꿈속에 들어온 수식. 우애수의 증명 값은 사랑이었고 빛보다 빠른 기억으로 새겨진다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는 이 수식은 내 가장 깊은 곳까지 신호로 보내온다 오늘밤 나는 당신을 향해 내가 사랑한 수식을 풀어나간다

 

*우애수(友愛數)는 두 수의 쌍이 있어, 어느 한 수의 약수를 모두 더하면 다른 수가 되는 것을 말한다. 220과 284의 쌍이 그 예이다. 220의 약수를 모두 더하면 284가 된다. 반대로 284의 모든 약수를 모두 더하면 220이 된다.

 

-계간 <서시> / 2008년 여름호

 

 


 

추종욱 시인

1970년 대구 출생. 2007년 계간 《서시》 2007년 하반기 신인상에 〈보르헤스의 숲에는 푸른 숲이 있을까?〉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현재 난시 동인, 시산맥 회원, 서시작가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