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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여태천 시인 / 휴일의 감정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5.
여태천 시인 / 휴일의 감정

여태천 시인 / 휴일의 감정

 

 

거울 앞에 서서 뒤를 본다.

흠칫

 

진짜 없는 것들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있다가

있는 척하다가

등 뒤에서 사라진다.

 

꾸부정한 자세

얼굴에 패인 주름

온데간데없는

생년월일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누군가의 생일 같은

오늘

맞은편 아파트 외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 그리고

실금들

 

지나간 모든 것들을 믿을 수 있을까.

 

그런데 이상하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북극의 빙하처럼

화학 공식에도 없는

이것은

 

 


 

 

여태천 시인 / 목소리들

 

 

사람들이 모였다.

광장 어딘가에

가느다란 두 다리로 서 있었다.

무릎이 시린 날이었다.

 

사람들이 모였다.

땅을 뚫고 올라오는 저녁의 파처럼

사람들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사람들이 모였다.

생각들이 모였다.

누구 하나 아프지 않다고?

사람들이 목소리를 조금 더 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였다.

옆에 서 있는 사내의 흰 머리칼이

어디를 가리키는지

생각들이 밖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여태천 시인 / 아름답고 불길한

 

 

밤이면 감정을 하나둘씩 그러모았다.

낮 동안 사두었던 약봉지들.

불필요한 말을 사그라지게 해줄 노란 물약.

저 알약은 기억을 지워줄 것이다.

캡슐 속에 가득 담긴 하얀색 알갱이들.

 

젖은 하늘에서 별이 빛났다.

그랬으면,

 

모래 위에 그림을 그렸던 건 누구였을까?

아침이면 누구도 닮지 않은 얼굴이

빤히 쳐다보고 있을 것이다.

이 밤은 언제 다 지나가는 걸까?

울음이 그치지 않았는데,

 

손을 그리고 있었다.

연필을 쥔 채 피를 흘리고 있는 손.

왼쪽 가슴이 축축하다.

 

한 사람의 가슴을 쓸어내리고

깊이도 모르는 마음을

휘젓던 손이다.

네게브 사막을 건너가는

메마른 그의 손이

축축하게 젖어 있다.

그랬으면,

 

 


 

 

여태천 시인 / 번역

 

 

나는 당신과 달라.

나는 당신을 몰라.

인격이 없는

투명한 두 문장을 가슴에 끌어안고

나는 울었다네.

한때 나는

완벽하게 마음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향해

부서지는 모든 기표에 전념했지.

무엇이 그리 짧았던가.

가늘게 떨어지는 소리의 발자국이여.

나는 이제

한 문장에서 한 문장으로 건너가는 죽음처럼

오래 슬프구나.

낱말과 낱말을 건너

비문처럼 자유로웠다면

나는 당신과 다르고

나는 당신을 몰랐을 텐데.

 

 


 

 

여태천 시인 / 나는 걷는 중이지만

 

 

지도를 펼치면 여기가 저기고 거기가 거기야

너도 알잖아 내게

어색한 옷을 입은 것처럼 거리는 힘들어

 

이곳 사람들은 빨리 걸어

마치 심장이 두 개인 것처럼

아침저녁으로 파크에서 공을 쳐서 그런가?

그런데 넌 어디쯤 가고 있니?

 

그러고 보니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건

언제나 나였지

지도가 알려주는 길은 종종 틀리기도 해,

너는 언제나 상상의 길을 말하곤 했지

나는 네가 가는 길이 가끔 무섭기도 했어

벤치에 앉아 오던 길을 힐끔거리며 쳐다본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그렇게 잊어버릴까봐

그렇게 사라질까봐

 

단단히 마음먹고 나서는 길

오늘은 비가 오네

이곳 사람들은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아

길 위로 여러 색의 공들이 흩어지고

하나 둘 셋 어느 공을 따라 가야 하는 건지

 

비가 오면 그 자리에 서서

옛날처럼 왔던 길을 되돌아봐

빗방울 속에 숨어 있는 얼굴들

사람들이 모두 걸어온 길 쪽으로 오줌을 누는 것 같아

흩어져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들

모여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들

 

할머니 고모 아버지 엄마가 걸었던 길

그 마음 하나둘 밟고 가면

이 거리를 건너갈 수 있을까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데

저 길은 아닌 것 같은데

자꾸만 엉뚱한 길을 걷고 있네

 

―계간 《청색종이》 2023년 봄호

 

 


 

 

여태천 시인 / 소녀의 기도

 

 

머리카락이 점점 자라서

너는 곧 열두 살이 될 거야.

그러니 달리는 버스에서 뛰어내리거나

흰 양말에 대해 이야기해선 안 돼.

밑도 끝도 없는 구멍 같은 이야기가

너를 알아보게 할지도 몰라.

너는 또 열여섯살이 되겠지.

검은 스타킹이 어울리는

그땐 보이지 않는 뒤쪽은 생각지도 마.

주름치마의 세계는 불안하고

사람들은 들춰보는 걸 좋아하지.

너는 머리카락이 점점 자라서

여기에 없는 사람이 되는 거야.

 

 


 

 

여태천 시인 /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

 

 

책이 파랗습니다

아직 읽지 않은 긴 문장의 색깔처럼

혼자 걸어가는

저 깜깜한 복도에서

 

오렌지가 파랗다고

아이는 재잘거리며

복도 끝에서 큰 소리로 부릅니다.

저 파란 오렌지가

갑자기 무서워지는 순간

아직 쓰지 않은 시를

나란히 읽어 봅니다.

오렌지의 문장을 모르기 때문에

아이의 말을 몰라서

문장의 길은 아득하기만 합니다.

 

아이가 복도를 뛰어옵니다.

아이가 내딛는 발자국마다

파란 오렌지가 시도록 눈이 부십니다.

 

-시집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에서

 

 


 

여태천 시인

1971년 경남 하동 출생. 고려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국문학박사). 2000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스윙』 『저렇게 오렌지는 익어 가고』 『국외자들』 『감히 슬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2008년 김수영 문학상. 2021년 편운문학상 수상. 현재 동덕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