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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호열 시인 / 성자와 청소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5.
나호열 시인 / 성자와 청소부

나호열 시인 / 성자와 청소부

 

 

오늘도 나는 청소를 한다

하늘을 날아가던 새들의 어지러운 발자국

어두운 생각 무거워

구름이 내려놓은 그림자

 

지상에서는 쓰레기라 부르는

그 말씀들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로 같은 마음에 모으기 위해

기꺼이 빗자루를 든다

 

누군가 물었다

청소부가 된 성자는 누구이며

청소부로 살다 성자가 된 이는 누구인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답하리라

죽음만큼 멀리 사라졌다가

어느새 다시 돋아 오르는 저 새싹을

그 숨결을

당신은 빗질하겠는가

아니면 두 손 받들어 공손히 받쳐들겠는가

 

- [촉도] (2015년)

 

 


 

 

나호열 시인 / 경계

 

 

 안경을 잃어버렸다 세상이 뿌옇게 흐려지고 안과 밖의 경계가 신기루처럼 멀리 휘날렸다 헛디딘 말들이 곳곳에 붉은 신호등을 걸었다

 

 앞을 못 보는 농부가 밤에도 논으로 나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몸이 졸리면 밤이지 캄캄하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궁금한 것은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걷고 달리고 밀어올리고 당기고 구부리고 펴고 운동기구 앞에서 하는 일들이 몸에서 연두빛 새 잎이 돋아 오르는 듯 하다고 하자 바로 그것이 한밤중 논에서 벼들이 하는 일이라고 가볍게 받아쳤다

 

 안경은 그까짓 흐리고 어두운 세상을 더욱 확실하게 흐리고 어둡게 각인하는 일 그 눈 먼 농부처럼 눈을 버리고 귀를 얻어 볼까 손전등 없이도 밭두렁 논두렁이 두런거리는 소리 살아있는 것들의 숨소리 그 거친 숨소리 가득한 들판으로 달려가 볼까

 

 헛도는 러닝머신 위에서 신나게 길을 잃고 지금은 안경 벗은 꿈을 꾸는 중

 

 


 

 

나호열 시인 / 운동 후기(運動 後記)

*노동이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

(Arbeit Macht Frei)

 

 

몸에서 화약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 것은

그해 시월 때문이다

놀이와 노동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늘 힘이 모자랐다

낙하하는 포탄의 작열과

가지에서 떨어지는 벚꽃의 아우성이

피와 살의 힘

나는 빗나간 화약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들이 진 만큼

또 수 없이 많은 꽃들이 피어났던 까닭에

우리는 놀이와 노동의 근친을 잊었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홍조 그 부끄러움은

무거운 짐을 나르는 한 사내의 불끈거리는

팔뚝의 힘줄을 볼 때 더하다

 

앞으로 밀고, 잡아당기고, 위로 올리고

걷고 뛰면서

나는 한 사내를 이기고 싶다

누가 노동이 자유롭게 한다고 했는가

짐승의 시간이 초식의 슬픔을 잘게 부술 때

땀은 화약냄새를 짙게 풍긴다.

지금 내가 들어 올리는 것은

0 그램의 허무

깊은 날숨이다.

 

*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 정문에 아치로 걸려 있는 문구이다.

 

 


 

 

나호열 시인 / 참, 멀다

 

 

한 그루 나무의 일생을 읽기에 나는 성급하다

저격수의 가늠쇠처럼 은밀한 나무의 눈을 찾으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창을 열어 보인 적 없는 나무

무엇을 품고 있기에 저렇게 둥근 몸을 가지고 있을까

한 때 바람을 가득 품어 풍선처럼 날아가려고 했을까

외로움에 지쳐 누군가가 뜨겁게 안아 주기를 바랐을까

한 아름 팔을 버리면 가슴에 차가운 금속성의 금이 그어지는 것 같다

베어지지 않으면 결코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신

비석의 글씨처럼 풍화되는 법이 없다

 

참, 멀다

나무에게로 가는 길은 멀어서 아름답다

살을 찢어 잎을 내고 가지를 낼 때

꽃 피고 열매 맺을 때

묵언의 수행자처럼 말을 버릴 때

나무와 나 사이는 아득히 멀어진다

 

한여름이 되자 나무는 인간의 마을로 온다

자신의 몸에 깃든 생명을 거두어

해탈의 울음 우는 매미의 푸른 독경을

아득히 떨어지는 폭포로 내려 쏟을 때

가만가만 열뜬 내 이마를 쓸어내릴 때

나무는 그늘만큼 깊은 성자가 된다

 

 


 

 

나호열 시인 / 흘러가는 것들을 위하여

 

 

용서해다오

흘러가는 강물에 함부로 발 담근 일

흘러가는 마음에 뿌리내리려 한 일

이슬 한 방울 두 손에 받쳐드니

어디론가 스며들어가는

아득한 바퀴 소리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들을 위하여

은밀히 보석상자를 마련한 일

 

용서해다오

연기처럼 몸 부딪쳐

힘들게 우주 하나를 밀어올리는

무더기로 피어나는 개망초들

꽃이 아니라고

함부로 꺾어 짓밟은 일

 

 


 

 

나호열 시인 / 풍경과 배경

 

 

 누군가의 뒤에 서 배경이 되는

 그런 날이 있다

 

 배롱나무는 풍경을 거느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경이 될 때 아름답다

 

 강릉의 육백 년 배롱나무는 오죽헌과 함께, 서천 문헌서원의 배롱나무는 영정각 뒤에서 여름을 꽃 피운다 어느덧 오죽헌이 되고 영정각이 되는 찰라 구례 화엄 산문의 배롱나무는 일주문과 어울리고 개심사 배롱나무는 연지에 붉은 꽃잎으로 물들일 때 아름답다 피아골 연곡사 배롱나무는 가파르지 않은 돌계단과 단짝이고 담양의 배롱나무는 명옥헌을 가슴으로 숨길 듯 감싸 안아 푸근하다

 

 여름 한 철 뙤약볕

 백일을 피면 지고 지면 또 피는

 배롱나무 한 그루면 온 세상이 족하여

 그렇게 슬그머니 누군가의 뒤에 서는 일은

 은은하게 기쁘다

 

-시집 『안부』에서

 

 


 

 

나호열 시인 / 눈물이 시킨 일

 

 

한 구절씩 읽어 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만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나호열 시인

1953년 충남 서천 출생. 경희대학교 대학원 철학과 박사과정 졸업. 1980년 울림시 동인으로 참여, <월간문학> 신인상, <시와 시학> 중견시인상을 받으면서 문학활동 시작. 시집 『안부』 『안녕,베이비박스』 『당신에게 말걸기』 『타인의 슬픔』 『촉도』 『칼과 집』 『우리는 서로에게 슬픔의 나무이다』 『그리움의 저수지엔 물길이 없다』 등. 색시인상, 한민족문학대상, 한국예총 특별공로상. 한국문협 서울시 문학상 등 수상. 현재 경희대학교 사회교육원 교수이며 계간 『시와 산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