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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호열 시인 / 성자와 청소부
오늘도 나는 청소를 한다 하늘을 날아가던 새들의 어지러운 발자국 어두운 생각 무거워 구름이 내려놓은 그림자
지상에서는 쓰레기라 부르는 그 말씀들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화로 같은 마음에 모으기 위해 기꺼이 빗자루를 든다
누군가 물었다 청소부가 된 성자는 누구이며 청소부로 살다 성자가 된 이는 누구인가
나는 망설이지 않고 답하리라 죽음만큼 멀리 사라졌다가 어느새 다시 돋아 오르는 저 새싹을 그 숨결을 당신은 빗질하겠는가 아니면 두 손 받들어 공손히 받쳐들겠는가
- [촉도] (2015년)
나호열 시인 / 경계
안경을 잃어버렸다 세상이 뿌옇게 흐려지고 안과 밖의 경계가 신기루처럼 멀리 휘날렸다 헛디딘 말들이 곳곳에 붉은 신호등을 걸었다
앞을 못 보는 농부가 밤에도 논으로 나갔다는 이야기가 있다 몸이 졸리면 밤이지 캄캄하기는 마찬가지인데 그래도 궁금한 것은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걷고 달리고 밀어올리고 당기고 구부리고 펴고 운동기구 앞에서 하는 일들이 몸에서 연두빛 새 잎이 돋아 오르는 듯 하다고 하자 바로 그것이 한밤중 논에서 벼들이 하는 일이라고 가볍게 받아쳤다
안경은 그까짓 흐리고 어두운 세상을 더욱 확실하게 흐리고 어둡게 각인하는 일 그 눈 먼 농부처럼 눈을 버리고 귀를 얻어 볼까 손전등 없이도 밭두렁 논두렁이 두런거리는 소리 살아있는 것들의 숨소리 그 거친 숨소리 가득한 들판으로 달려가 볼까
헛도는 러닝머신 위에서 신나게 길을 잃고 지금은 안경 벗은 꿈을 꾸는 중
나호열 시인 / 운동 후기(運動 後記) *노동이 너를 자유롭게 하리라 (Arbeit Macht Frei)
몸에서 화약 냄새가 지워지지 않는 것은 그해 시월 때문이다 놀이와 노동 사이에서 태어난 나는 늘 힘이 모자랐다 낙하하는 포탄의 작열과 가지에서 떨어지는 벚꽃의 아우성이 피와 살의 힘 나는 빗나간 화약으로 태어났던 것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꽃들이 진 만큼 또 수 없이 많은 꽃들이 피어났던 까닭에 우리는 놀이와 노동의 근친을 잊었다 희미하게 남아있는 홍조 그 부끄러움은 무거운 짐을 나르는 한 사내의 불끈거리는 팔뚝의 힘줄을 볼 때 더하다
앞으로 밀고, 잡아당기고, 위로 올리고 걷고 뛰면서 나는 한 사내를 이기고 싶다 누가 노동이 자유롭게 한다고 했는가 짐승의 시간이 초식의 슬픔을 잘게 부술 때 땀은 화약냄새를 짙게 풍긴다. 지금 내가 들어 올리는 것은 0 그램의 허무 깊은 날숨이다.
* 폴란드 아우슈비츠 유태인 수용소 정문에 아치로 걸려 있는 문구이다.
나호열 시인 / 참, 멀다
한 그루 나무의 일생을 읽기에 나는 성급하다 저격수의 가늠쇠처럼 은밀한 나무의 눈을 찾으려 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창을 열어 보인 적 없는 나무 무엇을 품고 있기에 저렇게 둥근 몸을 가지고 있을까 한 때 바람을 가득 품어 풍선처럼 날아가려고 했을까 외로움에 지쳐 누군가가 뜨겁게 안아 주기를 바랐을까 한 아름 팔을 버리면 가슴에 차가운 금속성의 금이 그어지는 것 같다 베어지지 않으면 결코 보이지 않는 시간의 문신 비석의 글씨처럼 풍화되는 법이 없다
참, 멀다 나무에게로 가는 길은 멀어서 아름답다 살을 찢어 잎을 내고 가지를 낼 때 꽃 피고 열매 맺을 때 묵언의 수행자처럼 말을 버릴 때 나무와 나 사이는 아득히 멀어진다
한여름이 되자 나무는 인간의 마을로 온다 자신의 몸에 깃든 생명을 거두어 해탈의 울음 우는 매미의 푸른 독경을 아득히 떨어지는 폭포로 내려 쏟을 때 가만가만 열뜬 내 이마를 쓸어내릴 때 나무는 그늘만큼 깊은 성자가 된다
나호열 시인 / 흘러가는 것들을 위하여
용서해다오 흘러가는 강물에 함부로 발 담근 일 흘러가는 마음에 뿌리내리려 한 일 이슬 한 방울 두 손에 받쳐드니 어디론가 스며들어가는 아득한 바퀴 소리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들을 위하여 은밀히 보석상자를 마련한 일
용서해다오 연기처럼 몸 부딪쳐 힘들게 우주 하나를 밀어올리는 무더기로 피어나는 개망초들 꽃이 아니라고 함부로 꺾어 짓밟은 일
나호열 시인 / 풍경과 배경
누군가의 뒤에 서 배경이 되는 그런 날이 있다
배롱나무는 풍경을 거느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배경이 될 때 아름답다
강릉의 육백 년 배롱나무는 오죽헌과 함께, 서천 문헌서원의 배롱나무는 영정각 뒤에서 여름을 꽃 피운다 어느덧 오죽헌이 되고 영정각이 되는 찰라 구례 화엄 산문의 배롱나무는 일주문과 어울리고 개심사 배롱나무는 연지에 붉은 꽃잎으로 물들일 때 아름답다 피아골 연곡사 배롱나무는 가파르지 않은 돌계단과 단짝이고 담양의 배롱나무는 명옥헌을 가슴으로 숨길 듯 감싸 안아 푸근하다
여름 한 철 뙤약볕 백일을 피면 지고 지면 또 피는 배롱나무 한 그루면 온 세상이 족하여 그렇게 슬그머니 누군가의 뒤에 서는 일은 은은하게 기쁘다
-시집 『안부』에서
나호열 시인 / 눈물이 시킨 일
한 구절씩 읽어 가는 경전은 어디에서 끝날까 경전이 끝날 때쯤이면 무엇을 얻을까 하루가 지나면 하루가 지워지고 꿈을 세우면 또 하루를 못 견디게 허물어 버리는, 그러나 저 산을 억만년 끄떡없이 세우는 힘 바다를 하염없이 살아 요동치게 하는 힘 경전은 완성이 아니라 생의 시작을 알리는 새벽의 푸르름처럼 언제나 내 머리맡에 놓여 있다 나는 다시 경전을 거꾸로 읽기 시작한다 사랑이 내게 시킨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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