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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권혁재 시인 / 경향傾向에 읊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5.
권혁재 시인 / 경향傾向에 읊다

권혁재 시인 / 경향傾向에 읊다

 

 

세상을 향한 삐딱한

내 불온한 사상의 근원지는

저기 저 이십 오 리에 걸쳐

쭉 뻗은 석문방조제다

바다와 물을

민물과 바닷물을 장벽처럼

막아서 경계하는 게 아니라

좌우의 길처럼 늘어선

그 경향에 대해

불온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좌라는 반대편의 우의 것들

우라는 반대편의 좌의 것들

뒤돌아서면 한 순간

모든 것이 같은 편에 있는 것들

석문방조제 가로수들은

모두 뭍 쪽으로 몸을 가누고 있다

어느 한 방향으로 기운다는 건

경향에 대한 본능을

단단하게 읊조리는 것이다

 

 


 

 

권혁재 시인 / 낭도 벽화

 

 

낡은 담장으로 한 무리의 바다가 들어왔다

 

바람도 열지 못한 녹슨 대문 앞에

사랑이 주저앉아 울다 맞이한 사리 때

 

맨발로 숱한 길을 낸

담쟁이 발목까지 바다가 들어왔다

 

구름을 타고 온 물고기가 담벼락에 붙어

지느러미로 붓질을 해대는 섬 같은 집

 

할머니 거친 손으로 덧댄 그림들이

 

한 겹씩 벗겨져 내리면

소금기 밴 틈새로

 

바다가 들어와 출렁거렸다

 

*낭도 – 여수에 있는 섬 이름

 

웹진 『시인광장』 2024년 6월호 발표

 

 


 

 

권혁재 시인 / 두 새벽이 울다

 

 

새벽을 밟으며 화엄사 가는 길

가로수 밑 벤치에서 들리는 새소리

 

다가가 들으니 새벽의 울음이었다

 

남녀가 새벽을 안고

불이문에 갇힌 채,

 

새벽이 검은 실루엣에 눌려 우는 새벽

경내로 번져가는 새벽의 숨소리가

 

대웅전 문살을 뚫고

부처에게 안겼다

 

두 새벽이 한 새벽을 만드는 울음은

계곡을 거슬러 달궁에 이르렀다

 

눈물을 쏟아내면서

두 새벽이 울었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5월호 발표

 

 


 

 

권혁재 시인 / 성구미

 

 

쟁의 찬반투표가 가결이 된 날

성구미에는 진종일 비가 내린다

마음먹은 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을 사람대로 놔두지 않는

한 세상을

횟감처럼 얇게얇게 벼린다

큰아이의 학원비를 안주삼아

한 잔 알싸하게 털어 넣고

아내가 조마조마해하는 공과금도

늘어나는 소주병만큼 쌓인다

희망은 언제나 없는 사람의 것이지

가진 자들의 것은 아니다

가진 자들이 희망을 말할 때는

없는 사람들을 그들의 범주에서

경계를 할 때 하는 것,

빗줄기가 잠시 가늘어지는 것을 보며

그치지 않는 비는 없다는 생각에

사람다운 사람이 그리워진다

빨간 등대 아래에 매인 한양호에 올라

선장의 아내가 끓여주는 매운탕에

한 세상을 잠시,

서글프게 조감한다

빗물이 소주잔에 첨작을 하는 성구미.

 

 


 

 

권혁재 시인 / 시작(詩作)노트를 바꾼 날

 

 

시작(詩作)노트를 바꾼 날

강의 도중에 대놓고

떠드는 여학생 둘을

정중하게 퇴실시켰다

시의 새로운 입맛이 달아나고

세대 차이를 탓하기엔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들뜬 시작의 첫날에

더러운 인내를 참지 못하고

욕설을 내뱉게 하는 지성을 가장한

거짓 담론이 졸고 있는 강의실,

학점 따기에만 눈이 뒤집혀

불의고 공분이고 개코도 모르는

나약한 자본의 추종자들,

불투명한 시작의 앞날같이

학생들이 베껴 써대는 리포트가

세상을 더 불투명하게 하였다

시작노트를 바꾼 날

볕 좋은 가을날이 상가처럼 어두운

강의실의 창턱에서 조문을 하고

혀를 차며 돌아갔다

시작노트를 바꾸고 처음으로

쓴 시,

학 생 부 군 신 위.

 

 


 

 

권혁재 시인 / 첫눈

 

 

나염부 엄반장이 노조가입동의서를 돌리고

염색부 정반장은 불량 난 원단을 끊어

머리띠를 만들었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눈발은

공단의 높은 굴뚝들에 가로막혀

눈치를 보며 주춤거렸다

노조설립취지의 설명을 하러

이층 식당 계단을 오르는 엄반장의 어깨가

풀썩거리며 하늘 귀퉁이를 건드렸으나

눈은, 오지 않았다.

주야간 막교대로 피마른 하루가 가고

한 달이 가도 우리의 시작은 언제나

오늘이었다

염료가 찌든 나염가다를 톨루엔으로 닦다

구토를 하고 정신을 잃어도

돈벼락같은 눈발은 내리지 않았다

주야간 막교대와 피마른 잔업에

자괴감만 보너스로 받은 첫 월급 날

정반장과 막소주를 대작하다

주정에 지쳐 잠든 그믐 밤

눈발이 내렸다, 그 해 첫눈이었다

 

 


 

 

권혁재 시인 / 낮달

 

 

대학병원 앞 약국에서

약을 수령하다 그를 만났다

다리를 절며 유리창에

파리하게 비친 그

하루의 반이 아직도 채무처럼

손톱에 낀 기름으로

검게 남아 있었다

어색한 웃음 속으로

낮달이 박하사탕처럼

한 입에 다 들어갔다

버스정거장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이 휘청,

휘청거렸다

 

 


 

권혁재 시인

경기도 평택에서 출생. 단국대학교 국문학과와 同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수료.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토우〉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 시집 『투명인간』 『잠의 나이테』 『아침이 오기 전에』 『귀족노동자』 『고흐의 사람들』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