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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남유정 시인 / 견딤에 대하여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5.
남유정 시인 / 견딤에 대하여

남유정 시인 / 견딤에 대하여

 

 

산은 제 무게를 견디느라

스스로 흘러내려 봉우리를 만들고

넘치지 않으려 강은 오늘도

수심을 낮추며 흐른다.

사는 것은 누구에게나 왜 견딤이 아니랴

꽃순이 바람에 견디듯

눈보라를 견디듯

작은 나룻배가 거친 물결을 견디듯

엎드린 다리가 달리는 바퀴를 견디듯

적막과 슬픔을 견딘다.

폭설로 끊긴 미시령처럼

생의 건너에 있는

실종된 그리움의 안부를 견딘다.

 

-시집 <기차는 빈 그네를 흔들고 간다>에서

 

 


 

 

남유정 시인 / 백년

 

 

그대가 닿으려 했던 곳이

백 년 후는 아니었을까

지금 내가 살고있는 날들은

그대가 지나간 꿈

 

생각에 잠긴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오래된 노래를 들려줄 때

심장을 탄주하는 통증은

그대가 쓰다간 것

이렇게 생생한 건

내 안에 썩지도 닳지도 않는 꿈이

살고 있기 때문

 

머뭇거리고 흐르기를 또 백년

아픔은 산을 넘다 할미꽃이 되고

사랑은 강을 건너다 물결이 될 거야!

 

 


 

 

남유정 시인 / 내가 한장 풍경이라면

 

 

초록빛 물에

물길 한 줄기 흘려놓겠습니다

서로 바라보며

나부끼는 나무 몇 심어

나무가 그늘을 이루면

그 아래 나를 놓겠습니다  

 

추억이 익어 갈때 쯤

슬픔이 기쁨인 줄도 알겠습니다

허공에 창을 내어

사철 푸른 잣나무 사이로

하늘도 내려오게 하겠습니다

 

별빛도 따라 오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이 고요한 풍경이라면

행여 그 안으로 걸어오실

그대 마음도 고스란히 받아

안고 싶습니다

 

 


 

 

남유정 시인 / 자화상

 

 

세월 속에

씨앗을

묻었다

 

바람은 서쪽으로 불고

사랑은 붉은 수수밭처럼 울었다

씨앗을 기억하지 못 하는 풀잎들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흔들렸다

 

밤길을

홀로

걸었다

 

 


 

 

남유정 시인 / 봄비에 푸른 잎이 젖네

 

 

신경 줄기마다 불이 붙어

집을 뛰쳐나간

내게는 불에 덴

상처가 있지요

기억의 주름마다 각인된

갑골문자, 불길을 피하지 않은

고대국가의 뿌리 깊은

유골이 숨겨져 있지요

오세요

아프지 않게

불타며 날아간 꽃잎들의

흔적, 스러진 한 나라의 잔해처럼

휘어진 길마다 멍들어

지금 푸르답니다

 

 


 

 

남유정 시인 / 틈

 

 

실낱같은 틈새로

너의 마음이 들어와

바위 틈새에서 들꽃 한 송이 피어나듯이

사랑이 피어났지

 

사랑,

그 눈부심이

슬픔이

절망이

생의 작은 틈바구니에서 피어났지

 

 


 

 

남유정 시인 / 질문으로 남은 한 그루 나무

 

 

그대는 왔다, 그 많은 꽃들의 질문처럼

 

내가 끊임없이 대답하고 싶은 순간이면

그대가 나를 부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몸 안의 시계가 더디 흐르고

강물은 나날이 불어났다

 

흐린 날이면 새들은 나지막이 날고

비가 올 때 나비는 꽃그늘 아래 날개를 접었다

 

여전히 그대는 내게 질문으로 남은 한 그루 나무다

 

 


 

남유정 시인

충북 충주 출생. 1999년《시와 비평》으로 등단. 시집 『기차는 빈 그네를 흔들고 간다』. 현재, 경기초교 교사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