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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정 시인 / 견딤에 대하여
산은 제 무게를 견디느라 스스로 흘러내려 봉우리를 만들고 넘치지 않으려 강은 오늘도 수심을 낮추며 흐른다. 사는 것은 누구에게나 왜 견딤이 아니랴 꽃순이 바람에 견디듯 눈보라를 견디듯 작은 나룻배가 거친 물결을 견디듯 엎드린 다리가 달리는 바퀴를 견디듯 적막과 슬픔을 견딘다. 폭설로 끊긴 미시령처럼 생의 건너에 있는 실종된 그리움의 안부를 견딘다.
-시집 <기차는 빈 그네를 흔들고 간다>에서
남유정 시인 / 백년
그대가 닿으려 했던 곳이 백 년 후는 아니었을까 지금 내가 살고있는 날들은 그대가 지나간 꿈
생각에 잠긴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오래된 노래를 들려줄 때 심장을 탄주하는 통증은 그대가 쓰다간 것 이렇게 생생한 건 내 안에 썩지도 닳지도 않는 꿈이 살고 있기 때문
머뭇거리고 흐르기를 또 백년 아픔은 산을 넘다 할미꽃이 되고 사랑은 강을 건너다 물결이 될 거야!
남유정 시인 / 내가 한장 풍경이라면
초록빛 물에 물길 한 줄기 흘려놓겠습니다 서로 바라보며 나부끼는 나무 몇 심어 나무가 그늘을 이루면 그 아래 나를 놓겠습니다
추억이 익어 갈때 쯤 슬픔이 기쁨인 줄도 알겠습니다 허공에 창을 내어 사철 푸른 잣나무 사이로 하늘도 내려오게 하겠습니다
별빛도 따라 오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이 고요한 풍경이라면 행여 그 안으로 걸어오실 그대 마음도 고스란히 받아 안고 싶습니다
남유정 시인 / 자화상
세월 속에 씨앗을 묻었다
바람은 서쪽으로 불고 사랑은 붉은 수수밭처럼 울었다 씨앗을 기억하지 못 하는 풀잎들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흔들렸다
밤길을 홀로 걸었다
남유정 시인 / 봄비에 푸른 잎이 젖네
신경 줄기마다 불이 붙어 집을 뛰쳐나간 내게는 불에 덴 상처가 있지요 기억의 주름마다 각인된 갑골문자, 불길을 피하지 않은 고대국가의 뿌리 깊은 유골이 숨겨져 있지요 오세요 아프지 않게 불타며 날아간 꽃잎들의 흔적, 스러진 한 나라의 잔해처럼 휘어진 길마다 멍들어 지금 푸르답니다
남유정 시인 / 틈
실낱같은 틈새로 너의 마음이 들어와 바위 틈새에서 들꽃 한 송이 피어나듯이 사랑이 피어났지
사랑, 그 눈부심이 슬픔이 절망이 생의 작은 틈바구니에서 피어났지
남유정 시인 / 질문으로 남은 한 그루 나무
그대는 왔다, 그 많은 꽃들의 질문처럼
내가 끊임없이 대답하고 싶은 순간이면 그대가 나를 부르는 거라고 생각했다
몸 안의 시계가 더디 흐르고 강물은 나날이 불어났다
흐린 날이면 새들은 나지막이 날고 비가 올 때 나비는 꽃그늘 아래 날개를 접었다
여전히 그대는 내게 질문으로 남은 한 그루 나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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