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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재영 시인 / 부처를 꺼내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5.
최재영 시인 / 부처를 꺼내다

최재영 시인 / 부처를 꺼내다

 

석공은 고심 끝에 부처를 들어냈죠

그에게 돌부처는 한세상을 완성하는 일

기약도 없이 하 적막한 끝이어서

어디서도 석공을 기록한 흔적은 볼 수 없네요

불경스럽게도 어느 쪽이 돌부처이고 석공인지

사방 정을 쪼는 소리만 아득한데,

칠흑의 시간을 견뎌 온 모서리마다

칸칸이 고요의 질서를 둘러앉히고

형형한 눈빛과 인자한 미소를 다듬어요

돌 속 깊숙이 들어앉아야

천 년 가는 미소를 새길 수 있다는데,

돌덩이와 독대하며

그는 일생을 면벽수행 중인지도 모르지요

여간한 고행이 아니건만

뼈대를 앉히고 숨결을 불어 넣자

오매불망 해탈한 부처님 환하게 피어나요

그 향기 온몸 가득 은은하고

비로소 돌의 허락을 얻어냈는지

밤새 미증유의 피안(彼岸)을 완성한 게지요

 

-시집 <통속이 붉다 한들> 에서

 

 


 

 

최재영 시인 / 갈등

 

 

 풀초 변을 머리에 두었으나 성질은 나무에 이르러 잘 베어지지 않는다 견고한 용틀임을 뽐내며 감아올려 가는 비법으로 일생을 풍미하니 누구도 감히 그들과 공생하기를 꺼려한다 공공연한 비기로 인해 기대고 의지하던 것들을 초토화시키니 배은망덕도 유분수라 했던가

 

 난세에는 간사한 꽈배기 병법이 더 통하는 법 갈葛이 한 번 오르면 등藤이 뒤질세라 덮어버리니 그 용렬함에는 선 후가 없다 그리하여 배배 꼬인 자들의 우상이라 할 만하다 칡은 말로 감싸 안으며 옥죄이고 등은 달을 곁에 두어 방패막이로 쓴다 서로 기온차가 컸던 것일까

 

 뜨거운 방점 하나 찍으려 해도 마땅한 혈자리가 없으니 풀이 질기다는 옛말의 근원이다 기어이 어느 지점에서는 서로 폭발하여 얼굴 보기를 원수같이 하니 갈등이 창궐하는 세상이 도래한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다 이는 서로의 필법이 다른 까닭이다

 

 


 

 

최재영 시인 / 복사꽃 아래 저녁

 

 

복사꽃 나무 아래서 고기를 굽는다

봄기운 선연한 나무 그늘로

삼삼오오 사소한 추억들이 모여들어

상추쌈을 크게 한 입씩 우겨넣는다

우적우적 도화꽃의 지나는 청춘을 씹어대며

한 잔 세월을 주거니 받거니

지나간 모든 날들이 폐허라고

당장 폐기처분해야 마땅하다고

입안의 고기가 튀어나올 듯 떠들어댄다

매캐한 냄새를 들이마시며 꽃나무가 쿨럭거린다

한창 빛나는 시절을 피워내는 중이라며

한 잎의 생이 고깃점 위에 떨어진다

화들짝, 어느 적멸이 이리 가볍고 뜨겁더냐

열렬한 연애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후일담까지

지글지글 고기판 위에서 익어 가는데

구름들은 죄다 역마살 낀 죄인이다

누군가 불쾌해진 얼굴로 성토하자

끄덕이며 또 한 잎이 떨어져 내린다

향기로운 모가지 처연한 꽃나무 아래서

몇 생이 흘러간 듯

아니 누가 지나는 청춘이고

내게 오는 꽃시절인가 싶은,

 

 


 

 

최재영 시인 / 루파나레라

 

 

골목 입구 길 바닥에 새겨진 루파나레라*

열쇠 구멍을 닮은 사랑의 표적이다

내게 알맞은 키를 돌려야

제대로 된 쾌락을 즐길 수 있다는 의미일까

매몰되었던 고대의 환락가를 들어서자

온갖 종류의 체위가 전시되어 있다

사랑은 어두울수록 더 대담한 것

숨도 쉴 수 없는 화산재 속에서

수천 년 동안 성교 중인 남녀를 만난다

배를 바짝 밀착시킨 사이엔

그들을 떼어놓을 시공이 없다

격렬했을 절정들

신음을 뱉어낼 새도 없이 굳어버린 혀는

순간이 영원을 간다고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이들은 서로에게 어떤 체위의 키를 꽂은 것일까

끓어오른 용암처럼 수천 번도 넘게

세상의 낮과 밤이 뒤집어지고

매몰된 도시가 뜨겁게 달아올랐으리라

진열장 안의 은밀한 순간을 들여다보며

화석이 돼버린 오르가슴을 즐기는 사람들

그들은 어떤 사랑을 탐하고 있는가

 

*루파나레라 : 폼페이의 홍등가를 들어가는 골목 입구 바닥 표지판

 

 


 

 

최재영 시인 / 목련, 色을 쓰다

 

 

백목련 환하게 들어서는 봄의 입구

그의 몸이 한그루 유곽이네

몇 날 며칠 산적같은 사내를 들이는지

어느 새 바람 한 점씩 부풀어가네

몸 안의 등불을 켜들고

색(色)을 다 쓰고 나서야

한 무리의 봄이 시끌벅적 건너갈 것이네

가슴 데이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청춘을 피울 수 없는 것

돌아보니 격정적인 생애였네

애초부터 꽃이었던 게 어디 있는가

있는대로 향기를 질러대느라

잎 보다 꽃을 먼저 피우고

속절없이 통증 한 잎씩 커가는 중이네

난봉꾼 분탕질에 딱 걸려

유난히 굼뜨게 계절을 넘기고 있네

아예 문 걸어 잠그고 들어앉았네

온통 흰 모가지 길게 빼들고

봄의 한 복판으로 뚝뚝

색(色)을 다 부리고 있네

 

 


 

 

최재영 시인 / 순장(殉葬)

 

 

오랜 세월 방치되었던 유골은 아직 신원미상이다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한쪽으로 돌아누운 체념뿐이다

슬픔이나 분노는 불경한 것이므로 매장할 수 없다

숱하게 이승을 열고 닫던 시신의 안구는 텅 비어

완전하게 썩은 복종이

퀭하게 뚫린 구멍을 가득 메우고 있다

무덤 속에서 소통되는 건 공포와 침묵뿐이었으므로

두 눈은 오히려 번거로운 장신구였으리라

올가미에 엮여진 미미한 저항들이

서로 깍지 끼운 절망을 호흡하였으리라

얼마나 멀리 왔을까

무덤 속 길을 열자

진공 속에서 지탱되던 맹목적인 관습이 한꺼번에 허물어지고

수 천 년을 지내는 동안 순종을 세습하였는지

유골들은 가지런하고 편안하다

죽음은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않는 행운의 부장품이었을 것이다

아득한 바닥의 깊이를 가슴에 품는 순간

세상의 낮과 밤이 닫혀지고

귀천의 형식은 이승의 내력과 함께 풍화되었다

남은 건 순장뿐이다

 

 


 

 

최재영 시인 / 붉은 섬

 

 

여자의 하문에 아기가 걸려 있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계엄령이 내려졌다

 

화산섬은 곧 붉게 타올랐고

나는 어떤 언어로도 섬을 읽어낼 수 없었다

 

여자의 가슴을 철창이 뚫고 지나갔다

중세의 기사가 창검 연습을 하듯이,

한 치의 오차 없이 과녁을 꿰뚫듯이,

 

지켜보던 나무는 눈과 귀를 닫아걸고 폐문을 작심하였다

 

철창이 뚫고 간 자리마다 별빛이 들어와 흐느낀다

하얗게 빛나는 뼈들

동백이 울컥, 붉은 문장을 토해내자

걸려 있던 아기가 애벌레처럼 꿈틀거린다

툭, 세상을 뚫고 나오는 소리 없는 울음

섬은

울어보지 못한 울음을 밤새 운다

 

온몸이 통점일 수밖에 없는 붉은 섬

 

* 1948년 12월 28일 안인순 할머니의 동서 문씨는 남편 홍씨가 입산하였다는 이유로 출산 도중 하귀특공대에 의해 학살. 가슴 여덟 군데 등 모두 열세 군데를 철창에 찔려 숨을 거둠.(제주 4.3사건, 시사저널 1998년 4월9일자)

 

 


 

최재영 시인

1965년 경기도 안성 출생. 2005년 《강원일보》와 《한라일보》, 200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창작기금 수혜. 2013년 정읍사문학상 대상 수상. 〈방송대문학상〉을 수상. 시집 『루파나레라』 『꽃피는 한시절을 허구라고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