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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문순 시인 / 보초의 항상성 - 화성행궁 내포사
속이 깊어 호령이 드높았던 목어의
하얗게 퉁그러진 눈알 굴리는 소리를
귓전에 슬쩍 건네주고 달아나는 바람
ㅡ오늘의시조시인회의 『물고을 꽃성』 (가히,2023)
표문순 시인 / 문신
바람 같은 남자를 스물넷에 보낸 후 어느 날 심장에서 선명하게 돋았다는 나선형 문신 하나를 운명처럼 갖고 사네
좌표를 잃어버린 마음의 점을 따라 돌고 또 돌았다는 암록빛 곡선들을 그녀는 혼자가 될 때만 어둠에게 보여줬다네
여자를 훌훌 털고 빈집으로 살아가며 혹한 속뿌리 내린 다년생 근성으로 한파가 휘몰아치는 빙하기를 통과 중이네
표문순 시인 / 10분 더 빨리 가는 시계
10분 더 빨리 가면 무엇이 더 늦게 올까
으레껏 먼저 간 시간들을 계산하며 모른 척 고장난 채로 밀고 갔던 계절 있다
잃은 듯 하면서도 까닭 없이 채워지는
꽉찬줄 알았는데 돌아보면 빈 몸뿐인
익숙한 반복 속에서 같이했던 이들은 안다
괘종이 호명했던 오류를 방치하며 실제보다 더 실재 같은 허상을 따라다녀
되돌려 맞춰놓아도 꼭 그만큼 허탈해지는
표문순 시인 / 장(醬) 경전
입 닫아걸고 몸으로 수행하는 행자들의 쿰쿰한 들숨들만 가만히 담겼다가 차올라 뚜껑이 열리면 이곳에 가을이 온다
두부며 호박이며 파송송 썰어넣고 한소끔 보글보글 끓여내온 서운암 경전
구수한 말씀 따라서 바삐 오는 발길들
-부산시조 통권 50호 기념시조집 『서운암, 시조에 물들다』
표문순 시인 / 별의 기록문
달 속에서 자라던 꽃잎이 떨어지면 엄마는 모달에서 채집한 별을 오려 열세 살 시트 위에다 감쪽같이 수를 놓았다
달이 필 때마다 늘어나던 붉은 별 먼 잠을 덮고 있던 촘촘한 실밥들이 미숙한 나의 우주를 경영하곤 했었다
하마터면 잊을 뻔한 공전하는 아이를 엄마의 기록으로 빛나게 일궈놓아 슈퍼문 그것이 와도 까딱없이 밤을 차렵했다
― 《가히》 2023년 창간호
표문순 시인 / 행운목
처음엔 오로지 한 도막 죽음 같았다 숨 같은 건 도무지 한 모금도 없이 보여 밑동을 물속에 담그고 기원하듯 바라봤다
물관에 기생하던 대지를 들어내듯 앞뒤도 알 수 없는 껍질의 지점으로 하얗고 푸른 배꼽을 태아처럼 밀어내니
꽃이다. 이십 년 받들어서 만개한 한 도막이 온전한 한 그루가 되기까지 깊숙한 뿌리의 기록 거실에서 읽는다
행운목이 뭉뚱하게 나무토막 같은것이 꽃을 피운것이다 정성을 다한 것이다 삶도 정성을 다하고 긍정적으로 미소와 행복감으로 영위하듯이 행운목에서 만끽해본다
표문순 시인 / 웃음에 관한 미각적 고찰
제단에서 살고 있던 머리를 걸어놓고 광장은 뜨겁게 내장들을 볶고 있다 자욱이 드리워있는 죽음이 자극적이다
죽어도 웃어야 하는 가공된 운명 앞에 번창을 기원하고 일과를 의탁하며 덩기덕쿵더러러러 속풀이가 한창이다
접시에서 눈알을 굴리던 도미처럼 젓가락이 들어올린 쫄깃한 경련처럼 갓 뽑은 웃음 지점으로 국밥을 향유한다
-《좋은시조》 2023.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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