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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중하 시인 / 왁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왁스 뚜껑을 열어요. 회색의 끈적한 왁스는 서해바다의 질척이는 펄 같아요. 한발 내딛으면 푹 꺼져버리는.
왁스를 머리에 바를 수 없던 내 사춘기는 갯벌의 나날이었죠.
햇살이 쨍쨍한 점심시간, 나는 학교건물 뒤편에 있었고 계단에 모여 앉은 여자애들을 바라봤죠. 짧은 교복치마의 여자아이. 여자애는 나를 바라보았고 내게 불씨를 집어 던졌어요. 난 온몸이 뜨거워져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죠.
맨 다리의 여자애가 걸어왔어요. 짧은 머리의 그 여자애. 난 엊그제 전학을 왔을 뿐인데 선배인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여자애는 힘껏 내 정강이뼈를 걷어찼죠. 발길질할 때마다 나는 갯벌 속으로 푹푹 꺼져 들어갔어요. 키가 점점 작아져 갔어요.
걸음을 멈추고 싶었지만 멈출 수는 없었죠. 육지와 바다 사이. 갈매기가 내 머리 위를 날고 있었고 나는 하얀 깃털의 꿈을 꾸었어요.
거울 속엔 펄 같은 왁스를 머리에 바르는 내가 있어요. 절대 꺼지지 않는 초강력 왁스. 난 왁스를 바르며 머리털을 곤두세우죠.
한층 자라난 키가 보이지 않나요? 길어진 손톱 발톱은 내 머리끝에 있어요.
-시인정신 2014년 겨울호
황중하 시인 / 공포영화
내가 두려워지기 시작한다.
나의 머릿속으로 이입해 들어오는 영상들. 나는 이미 나에게 공포영화다. 나는 나와 내 존재의 배후를 의심한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창밖의 별은 날카로운 칼끝처럼 나를 겨눈다. 나는 누군가의 손을 그리워하지만 동시에 나를 향해 뻗치는 모든 손을 두려워한다.
누구에게도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다.
나는 나로부터 도망친다. 무서운 살의로부터, 무수한 별들로부터, 별들의 가슴팍에 숨겨진 수많은 칼날들로부터
손에 흐르는 식은땀들.
벽장 속에 숨지만 나는 이미 내가 아니다. 완벽하게 혼자인 지금, 나는 나에게 공포영화다. 이 영화 속을 탈출하고 싶다고 되된다.
무수한 칼들이 나를 향해 살의를 꺼내고 벽장은 나의 숨을 조르기 시작한다. 살아남기위해 필사적으로 손을 뻗는다.
나는 이 영화의 끔찍한 메인 필름이다
황중하 시인 / 내게 머물다가 떠나버린 것들을 기억한다
한낮의 햇볕속에서 나를 어루만지던 손과 내게 깊숙이 몸을 묻던 여름의 향기들
꽃을 들고 다니던 소녀 소년들 그 곁을 뛰어다니던 강아지들
성인이 된 몸이 무너져 내려도 다시 빚어주는 손이 좋았다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웃음소리와 부드럽게 나를 핥아주는 바다의 푸른 혀......
황중하 시인 / 맥주
캐나다에서 건너온 블루문 맥주. 새하얀 피부에 파란 눈의 맥주는 홍대클럽에서 마이크를 잡고 노래했어. 맥주의 목소리에선 부드러운 하얀 거품이 흘러나왔지. 찬란한 조명을 등에 진 블루문 맥주가 신기루처럼 내게로 오던 날, 1860밀리 미터의 거품이 내게로 왔어. 맥주는 유 아 소 큐트!를 외쳐대며 유리잔 속에 거품을 흘려댔지. 안개에 홀리듯 달콤한 거품에 취해 길을 걷는 밤. 밤하늘엔 부드러운 달빛이 흘러나오고 난 거품 흘리는 달을 처음 바라보았어. 노란 달 속의 거품을 퍼내어 내 어깨에 덮어주던 블루문 맥주. 내 가슴에도 거품 꽃이 피어오르던 찰나, 맥주는 내게 입을 맞추었어. 노노를 외쳐보지만 왓츠 더 프라블럼? 유 아 낫 식스틴 이어스 올드라고 말하는 맥주. 맥주가 머리를 흔들었어. 도대체 어쩌란 말이야. 울상을 지으며 마지막 노를 외친 후에야 아 유 어 버진? 이라고 물어. 잇츠 테러블을 연발하는 맥주. 맥주의 거품이 순식간에 사그라들어. 1860밀리미터의 거품도 사그라들어. 달을 한 가득 채우던 거품과 내 안에 막 차오르기 시작하던 거품. 세계의 거품이 사그라들어. 거품 빠진 맥주를 먹어봤니? 그날 밤, 난 거품 빠진 맥주가 되어 도심의 달 속을 하염없이 걸었어. 하늘의 달이 거품을 닦으며 안녕이라고 마지막 문자를 보내고 있었어.
황중하 시인 / 환상통(phantom pain)
없는 것만 남는다. 없는 것이 있다.
알레르기 반응처럼 온몸을 긁는다. 서둘러 없는 장기를 찾기 시작한다.
피가 떨어지는 심장 하나, 달콤 쌉쌀한 콩팥 한 점의 시를 씹어 먹는다.
당신은 나의 팔뚝 하나, 모가지 한 점을 읽는다.
나는 참을 수 없는 가려움을 잊기 위해 시를 쓴다.
시를 쓸 때마다 아픈 손가락을 하나씩 자른다. 없는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미칠 듯한 가려움.
천천히 나의 몸을 토막 내기 시작한다.
황중하 시인 / 부러진 구두
병신(病身)인 나여도 사랑해줄래요?
당신은 여전히 나의 육감적인 자태를 훔쳐볼 수 있고 난 당신의 은밀한 방문을 허락할 수도 있죠.
당신의 몸이 나의 어둠과 만날 때
우리의 추억은 가벼운 거리 위에 뿌려져요. 마치 나의 유해처럼 상처 입기 쉬운 유리조각처럼
당신은 나의 뼛가루를 손에 들고 우리가 함께한 비밀스러운 카페와 심야 영화관 어두운 골목길에 뿌리겠죠.
나는 당신의 기억 속에서 걸어요. 혼잡한 차도 위에 갑자기 뛰어든 나뭇잎처럼 사실은 죽어가는 갈색 나비처럼
병신(病身)인 나여도 사랑해줄래요?
나의 어둠이 무정한 당신과 만날 때 마지막으로 온힘을 다해 당신을 조여 줄게요. 당신의 숨통을 아찔하게 조여 줄게요.
그러니 이미 죽어버린 몸이어도 날 사랑해줄래요?
황중하 시인 / 빨간 장갑
공단 앞 버스정류장을 지키는 손이었다. 누군가에게 유기된 손이었다. 구겨지고 더럽혀진 손이었다. 빨갛게 도색된 손이었다.
빨갛게 울고 있는 손이었다. 뒤돌아 바라보는 손이었다. 풀죽은 손이었다.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손이었다. 잃어버린 팔을 찾고 있는 손이었다. 온전히 하나였던 몸뚱어리를 그리워하는 손이었다.
그 손은 내 손을 바라보는 손이었다. 그 손은 떠나버린 버스를 향해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손이었다. 그 손은 미련만 남은 손이었다. 그 손은 미련한 손이었다. 텅 빈 벤치 위에 유기된 손. 누군가의 도피처가 되었던 손. 보호색을 잃어버린 손. 손절된 버스를 떠나보내는 손이었다.
-시집 『나는 아직 당신을 처리 중입니다』 (시인동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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