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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효복 시인 / 드림 컬렉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7.
조효복 시인 / 드림 컬렉터

조효복 시인 / 드림 컬렉터

 

너는 방심하면 뺏기고 마는 꿈들로 살을 찌운 것 같아

자고 나면 왜 꿈이 생각나지 않는 건지

고양이를 껴입어

뚱뚱한 네 개의 발이 생겨나

담요 속으로 파고들지

자세를 배우지 못한 아이처럼

가족 바깥에 숨는 아이처럼

창과 창 사이에 누워

되비치는 여럿의 나는

반사되거나 해체되거나 생략된 채 흐르지

꿈은 태양에 가까워도 불붙지 않아

삐딱한 인간의 기분을 참아 주고 있지 느긋하게

다시 태어날 준비가 돼 있는 것처럼 거만하게

어쨌든, 난 고양이

그림자를 두고 달아난 술꾼의 뒤를 쫓고

마녀의 눈에서 강물이 흐르기 전에 그녀를 재워야 하지

분주한 잠이 밤과 낮을 뜯어먹고 있어

키워야 할 꿈을 정성껏 핥지

젤리클 젤리클 닿을 듯 말 듯 미끄러지는

발톱 끝에 묻어나는 희미한 꿈을 긁어모으지 다음 생을 위해

퀭한 새벽의 눈꺼풀을 열고

낮게 가기 물고 가지 흐르며 가지 문득 치솟아 교란시키지

유선형의 우린 물컹물컹 잠들지 않는 창

매일 실패를 연습하지

 

-시집 <사슴 접기> 에서

 

 


 

 

조효복 시인 / 달아나는 밑그림

손끝이 마른침을 삼킵니다

떨림이 느껴져요 숨을 참고요

 

​처음은 그래요

점 하나에서 명작을 꿈꿉니다

 

​나는 나를 믿습니다 지나치게

단추는 잘못 끼울 수도 있어요

정해진 구멍을 벗어난 단추의 유연한 사고를 추앙합니다

백지를 마주한 화가의 손을 알 것 같아요

 

​심장이 요동칩니다

바위가 파도 속으로 걸어 들어가요

코끼리의 모습으로

압도적이죠 대자연의 힘으로 소리까지 살아 움직입니다

빛과 구름을 삼킨 물빛을 좇다 보면

처음이란 온데간데 없어요

 

​혼자 움직입니다

둘이 되었다가 사라져

코끼리 무덤에서 발견되기도 합니다

사탕수수밭 근처 설탕 공장에서 검은 연기가 되기도 하고요

 

​되어가는 느낌은 얼마나 아슬아슬한지

잘못을 들추면서 나는 단단해집니다

 

​바위는 사라진 게 아니에요

다른 무엇이 될 그 순간을 기다립니다

 

​약속 없이 우린 만나는 중이고

어딘가에서 무엇으로 계속 태어나는 중입니다

<모던포엠> 2024년 1월호

 

 


 

 

조효복 시인 / 내가 너를 아는데

 

 

나눠 갖는 별명이 있지

 바꿔 불러도 잘 어울리는 우린

 친한 사이니까 괜찮아

 잘 아니까 표정만 봐도 아니까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네가 던지는 공은 특별해 보여

 긴 치마를 좋아하는 넌

 번번이 공을 놓친다

 

 네 취향이 불편한 건 내 사정이다

 낯설어지면 우린 이름을 부르면 된다

 

 닮지 않아 다른 게 많아 다행이야

 이해가 두 손을 맞잡게 하니까

 

 치마 둘레엔 펼쳐진 공중이 많아

 어떻게 던져도 공은 빛나니까

 튕겨 나가도 결국 되돌아오니까

 그럴 줄 알았어 똑같이 웃는다

 

 지나간 네 봄을 알지 못해

 쏟아지는 비를 맞고 선 이유를 묻지 않았다

 내가 너를 아는데

 

 내 서랍 속 바스락거리는 이야기에 너는 관여하지 못한다

 구겨진 일기장의 얼룩을 알지 못한다

 너 없이 달려간 저녁의 등이 뜨거웠던 것을 말하지 않겠다

 

 그래도 우린 함께 걷는다

 그림자가 연인처럼 보인다

 그들이 우리를 모르듯

 우리는 서로 아는 만큼 모른다

 

- 반년간 문예지 《세종시마루》 2022 제9호

 

 


 

 

조효복 시인 / 층을 연결합니다

 

 

익숙해져야 합니다

최대한 호흡을 참아요

아랫집이 수리를 합니다

 

아래를 빼냅니다 신중하게

와르르 무너지면 지고 맙니다

층이 지워집니다

 

하루가 멀다고 이집 저집 번갈아 가며 두드려댑니다

바닥이 사라진 빈집은 공중에 뜬 1층 같기도 한데요

내력벽 몇 개로 버티는 공중

 

층을 연결합니다

젠가를 하죠

서로의 일부가 되어 하나인 채 삽니다

마주하는 불안을 견딥니다

 

가족이 있어도 무너지고 없어도 무너지는 집

무른 기둥도 벽이라고 애처롭게 버팁니다

같은 허공을 가져서 우린 인사도 없이 익숙합니다

 

사다리차가 맑게 갠 창문을 싣고 올라옵니다

날씨를 가져오고

높이를 잃은 옥상에선 가끔 젖은 발자국이 떨어집니다

빛은 어디까지 들어와 깊어질까요

 

이 게임엔 위아래가 따로 없어요

아래가 위가 되고 위가 아래가 되는

아름다운 인지상정이지만 종종 싸늘해지다가

한꺼번에 무너집니다

 

빈 아래를 향해 참았던 항의를 합니다

소음이 삼켜버린 것들을 헤아리며

뒤꿈치에 힘을 싣고 바닥을 굴러봅니다

공중에 뜬 바닥을요

 

 


 

 

조효복 시인 / 카유보트 따라하기

 

 

화가의 정원입니다.

혼자서는 만들지 못하는 소리로 이루어졌죠

 

그는 투명해진 채 기다립니다

지치지 않고 놓여 있지요 귤처럼요

 

물방울이 닿는 곳에 소리가 있지요 그곳에서 모양과 색이 생겨납니다

껍질의 기분을 알고 싶은 알맹이처럼 그는 온몸으로 귤이 되기도 하지요

 

바깥의 소리를 몸에 새깁니다

물그림자 속에 빗줄기를 켜는 화가의 활이 보여요

 

그곳엔 보이지 않는 물뱀과

아직 태양을 모르는 물이끼와

몸을 흔들 만한 적당한 리듬이 있죠

 

눈을 감아요

우호적으로 배어듭니다

서로의 뒷모습까지 알 수 있어요

 

바구니속에서 귤이 물러집니다 포기하고 싶은 공간이지요

나빠지는 것은 아니에요

잘 섞여 갈릴 수도 있어요

몰려다니며물드는 푸른 청귤의 시간이 구름 속에 있어요

 

세계 바깥으로 흩어지는 과육이란

내리는 비와 같아요

빗방울의 살과 즙으로 정원이 풍성합니다

청량하게 짜낸 햇살이 물을 건너오며

맑은 시트러스 향을 흩뿌립니다

 

이곳은 비 내리는 예르*입니다

 

*구스타브 카유보트의 작품

 

 


 

 

조효복 시인 / 퍼핀들*

 

 

이곳은 고여 있고 우린 매일 걸어 들어간다

잘못되어 있는 것에 발을 담그기 위해

 

해안을 붙들고 있는 파도 같다

 

숨죽이지 않는 게 없는 오후

슬픔이 눈부시게 흔들리고 있다 물빛은 우리처럼 환하고

 

검은 해변에서 흰 파도를 골라내 조금씩 바다를 만든다

밀려드는 물그림자를 놓아주는 몽돌들

 

우린 사라져가는 연대기

주저앉는 절벽들

파랑이 산란하는 빛으로 만들어진 작은 파편들

극지의 해변을 완성하는 어린 퍼핀들

 

뼈를 드러낸 물고기는 금방 걷힐 구름처럼 흩어지겠지

무너질 걸 알면서도 우린 재미있고

빈 조개를 쌓아 올리는 사이

세상 모든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는 섬

우리는 조금 더 퍼핀일 수 있을까

 

아직 죽지 않은 바다별이 입안에 있다

온기가 사라진 둥지가 천천히 젖어가는 밤

 

기다리던 오후를 갈매기가 물고 간다 잠은 사라지고

달이 떠야 할 곳에 부리가 걸려 있다

 

* 퍼핀, 대서양에 서식하는 멸종 위기의 바다오리

 

ㅡ계간 《이토포스》 2024년 겨울호

 

 


 

 

조효복 시인 / 우린 아직 웃는 법을 모르고​

 

 

눈과 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혼자가 아니어서 너는 춤을 추는 것 같다

단내 나는 흙이 우리를 빨아들였지만

느리게 앞으로 나아갔다

떨어뜨린다

엉키고 더러워진 머리칼을

네온에 물든 갈라진 손톱을

감춰 두고 돌보지 못한 새를

돌아가야 할 길을 만들지 않는다

숲을 향하는 우리의 도주는

축제의 불꽃 아래서 들키지 않는데

우린 아직 웃는 법을 모르고

숲을 꿈꾸는 오르페우스 같다

상상한 것을 의심할 줄 모르고

가야 할 곳을 갈 줄 아는 걸음으로

잎을 문질러 어제의 노래를 되살리며 간다

층층이 쌓인 장작을 뛰어넘어

울타리용 나무를 실은 트럭을 지나

발을 빠트리고 선 허수아비와

기울어진 누각을 돌아 나오면

발을 떼는 만큼 멀어지는 숲

숲이 돌아보는 것 같아 손을 뻗어 보는데

우린 아직 그곳에 닿지 않고 있다

 

 


 

조효복 시인

전남 순천 출생. 동덕여자대학 회화과 졸업. 계간 《시로 여는 세상》 2020년 상반기 신인상으로 등단. 2021년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