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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장정욱 시인 / 성곽의 오후 외 1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7.
장정욱 시인 / 성곽의 오후

장정욱 시인 / 성곽의 오후

 

 

꼬깃꼬깃 접힌 잎사귀마다 오래된 편지들

소식의 종착지는 겨울이라 했다

 

성벽에 기댄 담쟁이의 까만 눈동자

잠깐 조는 바람에

성곽길을 지나는 바람을 놓쳤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점집을 들어가

전생의 나를 만나고 싶었다

 

손금을 따라 쌓아둔

운명선의 비밀을 풀어

성곽 모서리에 매달아 놓았다

 

비교적 가벼운 글자들이었는데도 돌 하나가 삐끗거렸다

 

성벽에 뚫린 구멍은

누군가의 화살이 숙명처럼 지나간 자리

구멍 밖 풍경을 본다

 

저 멀리

화살에 찔린 채 울고 있는 노을,

성은 방패도 없이 당신에게 물들고 있었다

 

-시집 <넓은 겨울을 혼자 썼다> 여우난골

 

 


 

 

장정욱 시인 / 까만 입술로 말을 걸어 왔네

한 움큼 오디를 따며 돌아보는

눈동자 속엔 내가 모르는, 누구지?

 

이름들로 먹먹한 묘비 뒷면

남기지 못한 유언도 향기롭게 익어 가는데

 

당신의 동공이 어제보다 더 물컹해 졌어

눈을 비벼 봐

달큰한 자정이 흘러나올 것 같아

 

오디가 다 익어 가도록

신발 뒤축은 모르는 사이 으깨져 있고

발등에 배어든 멍은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네

 

바지 끝단에서 헐거운 바람이 풀려 나오면

당신은 기일처럼 빗방울을 세어 보네

 

짓무른 영원에 대한

풀잎들의 질문은 한 풀 늙어 가는데

우리들의 저녁은 까마득히 저 아래에 있네

 

흥얼거리는 비탈, 거기에 서면

묻어 두었던 통증이 달콤하게 밀려오네

 

-시집 『여름 달력엔 종종 눈이 내렸다』(달아실, 2019)​

 

 


 

 

장정욱 시인 / 스카프는 당신에게로 날아간다

이팝나무 끝에선

낱장 같은 고양이들의 밀회가 시작되고

새하얀 발목은 물가의 출렁이는 연애를 상상한다

잿빛 입술이 더 감미로워질 때

꽃잎들은 기다렸던 파문을 따라 번져간다

향기를 지운 이야기들로 분주해진 거리

봄의 목소리를 꺾어 데쳐내는 저 남자

김 서린 입술로 누구를 부르는가

깊은 손금 안으로 이팝이 떨어져

우리는 한 잎처럼 스치고

뒤돌아본 바람의 취향은 어떤 맛일까

이 사이에 낀 비밀이 슬퍼지는 저녁

삐져나온 덧니처럼

자꾸만 혀는 너를 그리워했다

 

-시집 『여름 달력엔 종종 눈이 내렸다』(달아실, 2019)​

 

 


 

 

장정욱 시인 / 도서관 후문

글자는 바람에 쓸려가고

초록 그늘은 독서의 뒤꽁무니를 맴돌았다

벤치는 묵묵하지만

옹이는 한 장의 페이지보다 가벼워

마지막 행간을 먼저 넘어갔다

책상과 의자

주제가 있는 정물

입술을 다 흘려버린 장미의 꽃받침처럼

발톱이 빠져버린 매발톱꽃의 발처럼

빛바랜 언니

같은 뒤쪽의 문

뒤로 눈을 돌리면

지문이 닳도록 넘겨대던 언덕과

표지가 떠러져 나간 달이 편린처럼 떠돌았다

도서관 후문은 어제의 일들을 읽어내느라

책등 위로 노을이 다녀가는 것도 몰랐다

 

-시집 『여름 달력엔 종종 눈이 내렸다』

 

 


 

 

장정욱 시인 / 다정한 기분을 만났다

 

 

이름도 잊어버리고

약봉지도 놓쳤다

 

교회 종소리는 12월보다 길었다

저 아늑한 곳의 기도는 내일도 죽지 않는 것일까

예배당 창이 반짝거렸다

 

나를 잃어버린다면 어디쯤이 좋을까

슬픔에 둔한 플라타너스 뒤라면

물 위에 떠다니는 버들잎 곁이라면

 

물소리를 세며 나를 불렀지만

나는 세계를 잊었다

 

기도에선 흙냄새가 났다

기도가 바람에 섞여 사라질 때까지 기억은 자주 뒤척였다

 

헌 그리움을 보내는 일

물결의 뒷모습으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일

기도문은 입김 안에서 자꾸 빠져나가려 했다

 

아이들은 얼음 십자가 위에 올라가 신발로 깨며 놀고 있다

 

웃음과 울음이 섞인다

남들은 웃는 거냐 우는 거냐 묻지만

오래전부터 같은 감정이라 생각했다

 

귀가 잘려나간 듯 밤은 조용한 눈발로 날린다

주머니 속 사탕 봉지 소리만 남았다

 

얼음 풍경을 베고

쓰디쓴 눈송이를 한입에 털어 넣으면

나는 다시 깊어졌다

 

—계간 《시인수첩》 2022년 여름호

 

 


 

 

장정욱 시인 / 산후풍

 

 

소리로 구걸하던 새들의 입이 얼어붙었다

눈 속에 묻힌 길은 구실을 잃었다

표정은 바람에 덮인 채 뚜벅뚜벅 걸을 뿐이다

 

매일 눈이 쌓이는 골목

이슬람 사원 종소리는 혀가 꼬부라져 알아들을 수 없는

겨울을 혼자 쓰고 있었다

 

산후풍을 앓았던 왼쪽은 오른쪽보다 차가웠다

그런 꽃밭도 있는 것이다

한쪽은 피었고 다른 한쪽은 얼어버린 가족

 

계단을 오를 때면 추위와 더위가 한 단씩 밀리며 따라왔다

이가 맞지 않는 체온이 서로 삐걱거렸다

 

아이 옷자락을 찢어 굴뚝 꼭대기에 매달았다

 

겨울을 넘기면 개울물이 흐를 거라 했지만

목련을 등진 달력엔 오른쪽 날짜만 따스했다

 

두껍게 껴입은 문장을 덜어내지 못한 채

하루가 싸늘히 가고 또 가고 있었다

 

 


 

 

장정욱 시인 / 소래 포구

 

 

두 손으로 바람을 쓸듯

어제와 오늘이 똑같은 우리는

검은 갯벌에 서 있네

 

물이 들고 난 자리

저 모습은 우리의 대화 같은 것

 

역광을 좀 봐

순간이 캄캄할수록 새들은

빛나는 자세로 날아가네

 

물에 빠진 햇빛은

자신의 눈이 머는 줄도 모른 채

되돌아온 길을 더듬거리네

 

엉킨 물결을 풀려 하지만

끝을 찾을 수 없어 멀고 먼 수평선

 

겹겹의 날개를 날려 보낸 오후는

묵은 그림자를 끌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네

 

지워진 물살이 넘실거릴 때

얼굴 없는 목소리에 서로를 비비며

우리는 환한 비린내를 마시네

 

 


 

 

장정욱 시인 / 죄송합니다 올해는 휴업합니다

 

 

갑작스러운 농담 앞에 나는 멈춰 섰다

얼굴색이 변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해를 꼬박 문을 닫는다니, 지금 막 도착한 장마는 어쩌라고

 

여름은 뜯지 않은 편지와 초록 넝쿨로 얼기설기 뒤덮여 있다

수돗가엔 쓰다 만 면도칼과 세숫대야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

우리 일 년만 헤어져 있자

 

날씨 없는 날씨가 구름처럼 깨졌다

 

빗방울이 텅텅 비었다

개집이 텅텅 비었다

 

어떤 날짜 속에 우리들의 기일은 들어갔을까

주소 옆 우편함

부서진 밀물과 썰물의 내용이 낡은 소설처럼 멀다

 

헛걸음일지라도 빗소리는 빗소리대로 눈송이는 눈송이대로 한 번쯤 다녀갈 것이고, 모란은 서러운 홑겹이라도 피워낼 것이다

비집고 흘러나온 달빛에게 말한다 할 수 없잖아요, 올해는 쉴 수밖에요

 

-시집 <넓은 겨울을 혼자 썼다>에서

 

 


 

 

장정욱 시인 / 얼음의 맥박

 

 

물결이 들어오다

그만 얼어버렸다

 

나의 맥박은 잎맥도 없이

긴 잠에 갇혔다

 

금 간 풍경은

몇 개의 길이 되어 겨울 끝을 이어v붙였다

 

간간이 나뭇잎 빠져나간 자리엔

돌들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녹아내려

몇 겹의 어둠이 젖어 들었다

 

새로운 얼음이 덧대어지고

오후가 되면 물컹, 너의 입김이 언 자리를 녹였다

 

나뭇잎 하나가

지느러미도 없이 얼음 속을 헤매고 있었다

 

 


 

 

장정욱 시인 / 노래는 흘러나오고

 

 

라디오를 켰다

찻잔을 빠져나간 온기처럼

나는 사라져버렸다

 

늙은 의자만 남아

창밖 시끄러운 눈발을 들었다

 

가끔씩 굽은 등을 삐걱거리며

아무 의미도 없는

노래를 중얼거리기도 했다

 

푹 패인 오후는

이미 어둑해지고 편안해졌다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것은 어제의 일

 

거울 속에서

계절이 한꺼번에 지나갔다

 

꽃이 피더니 이내 눈이 내리고

아이가 뛰어가더니

절룩거리는 그림자로 되돌아왔다

 

아무도 돌아보지 않지만

아직은 향기로운 숨에 기대어

나는 나를 기다리는 중이다

 

오늘의 노래는 더 아득해졌다

 

-시집 <넓은 겨울을 혼자 썼다>에서

 

 


 

 

장정욱 시인 / 케이블카

사과와 물결이 그려진 도화지 위로

새들이 지나간다

크로키처럼 휙휙 지나가는

저녁은 멀리 보아야 형체를 알 수 있다

붓질이 휘청거린다

앞서가는 케이블카와 뒤따르는 케이블카는

서로 닿지 않는 정물

허공에 떠 있는 남자는

중얼대는 언어처럼 화창하지 않다

비록 속은 텅 비어 있지만

등대의 키가 매일 한 뼘씩은 자란다고 생각한다

서로 다른 저녁을 맞이한 지는

꽤 오래되었다

바다는 배를 타고 혼자 먼 데로 떠나곤 한다

파도는 그 습관이 대체로 아무렇지 않다

 

 


 

 

장정욱 시인 / 다섯 시를 지나는 추상

 

 

서로의 숨결 쪽으로 기울어진 어깨

대각선의 오후로 끄덕이는 턱

기차는 모르는 두 사람을 나란히 앉혀놓았네

 

달리는 모텔 같기도 한

옆으로 누운 엘리베이터 같기도 한

오월의 추상들이 뒤섞여 있네

 

돌아선 바다를 사라진 역에 내려놓으며

터널을 통과하는 기차

선반에 올려둔 두 개의 심장이 흔들리네

 

레일엔 덜컹거리며 줄장미가 피어나고

창속 붉게 물들어가는 그림자

기차는 길어진 다섯 시를 지나고 있네

 

칸칸의 이야기들이 주름진 커튼을 내리면

눈 뜨지 않는 요람 속

해와 달 사이에서 내가 무수히 태어나고 있네

 

-시집 『여름 달력엔 종종 눈이 내렸다』 에서

 

 


 

장정욱 시인

1964년 인천에서 출생.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15년 《시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2018년 수주문학상 수상. 시집 <여름 달력엔 종종 눈이 내렸다> <넓은 겨울을 혼자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