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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시인 / 못 떠난다
속초 가서 동태장사나 하며 살아볼까 훤하게 뚫린 삼거리 샛바람 마시며 서성거렸다
은행의 창구 내미는 천 원권 지폐 뭉치 고액권 달라고 실랑이하다 새파랗게 질려서 강릉행 뻐스를 탔다
처음 보는 강릉거리 발 가는 대로 들어선 식당 살풍경한 난롯가에서 막국수 한 그릇 용을 쓰며 먹었다
뻐스정류장은 무성영화 낙엽 모이듯 사람들, 행선의 팻말 속초 가는 표 꾸겨 쥐고 다시 뻐스에 올랐다
동쪽이라는 것은 안다 북쪽이라는 것도 안다 어촌인지 어항인지 속초 형편 들려주던 노인네 목소리가 기억에 남아 있다
내린 곳은 설악동이었다 일금 삼천 원 관 길이 만한 민박의 방 안도의 숨 토했으나 밤은 연탄가스로 헤매었다
날이 새어 엷은 무명 자켓 깃 세우고 포켓에 두 손 찌르며 저 밑바닥 가장 깊은 곳에서 흔들려오는 오한惡寒 누르며 장엄한 해돋이 동해 앞에 선다 아아 무심한 바다여
늙은 여자가 백만 원 든 망태 하나 들고 길 잃은 강아지 모양 왔다갔다 "너 간첩이지?" 기념품 가게 여주인 눈빛 읽고 죄 없이 허둥대며 몰리는 내 꼴이라니 웃어야지
속초 가서 동태장사를 하면 가만히 내버려 두기나 할 것이든가 손주들 얼굴 쏜살같이 떠올라 허겁지겁 택시를 잡았다
대절한 택시 속의 나는 미이라 단구동 눈익은 문 앞에 내려서서 잡혀온 탈옥수같이 치악의 연봉 보며 눈물 흘렸다.
-시집 <우리들의 시간>에서
박경리 시인 / 농촌 아낙네
뙤약볕 아래 밭을 매는 아낙네는 밭 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온 밭을 끌어안고 토닥거린다
밭둑길 논둑길이 닳도록 오가며 어미새가 모이 물어 나르듯 오가며 그것이 배추이든 고추이든 보리 콩 수수 벼 어느 것이든 간에 모두 미숙한 생명들이니 아낙에게는 가슴 타게 하는 자식들이다
하늘을 우러러 축수한다 자비를 주시오소서 하나님 연약한 목숨에게 자비를 목마르지 않게 비 내려 주시고 춥지 않게 햇볕 내려 주시고 숨 막히지 않게 바람 보내 주시오소서
밭을 끌어안은 아낙네는 젖줄 물려주는 대지의 여신과 함게 번갈아 가며 생명을 양육하는 거룩한 어머니다
박경리 시인 / 산골 창작실의 예술가들
멀리서 더러 보기도 하지만 방 안에서도 나는 그들을 느낄 수 있다 논둑길을 나란히 줄지어 가는 아이들처럼 혼신으로 몸짓하는 새 새끼처럼 잔망스럽게 혹은 무심하게 머물다 가는 구름처럼 그들은 그렇게 내 마음에 들어오는 대상이다
회촌 골짜기를 떠나 도시로 가면 그들도 어였한 장년 중년 모두 한몫을 하는 사회적 존재인데 우습게도 나는 유치원 보모 같은 생각을 하고 모이 물어다 먹이는 어미 새 같은 착각을 한다
숲 속을 헤매다 돌아오는 그들 식사를 끝내고 흩어지는 그들 마치 누에꼬치 속으로 숨어들 듯 창작실 문 안으로 사라지는 그들 오묘한 생각 품은 듯 청결하고 젊은 매같이 고독해 보인다
박경리 시인 / 안개
회촌 골짜기 넘치게 안개가 들어차서 하늘도 산도 나무, 계곡도 보이지 않는다 죽어서 삼도천 가는 길이 이러할까 거위 우는 소리 안개를 뚫고 간간이 들려온다 살아 있는 기척이 반갑고 정답다
봄을 기다리는 회촌 골짜기의 생명 그 안쓰러운 생명들 몸 굽히고 숨소리 가다듬고 있을까 땅 속에서도 뿌리의 뿌리 서로 더듬으며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있을까
봄은 멀지 않았다 아니 봄은 이미 당도하여 안개 저 켠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올해는 도시 무엇을 기약할 것인가 글쎄 아마도······ 쟁기 챙기는 농부 희망에 동참하는 것이 가장 합당하지 않을는지
박경리 시인 / 회촌 골짜기의 올해 겨울
회촌 골짜기의 올해 겨울은 날건달처럼 햇빛이 오락가락 눈도 어정쩡하게 왔다가는 간다 춥지 않은 겨울
오락가락은 망설임이며 혼란인가 어정쩡함은 불안이며 권태인가 구석구석 먼지가 쌓이듯 어디선가 양파 썩는 냄새가 나듯
회촌 골짜기의 올해 겨울은 빈집처럼 쓸쓸하다 잠든 번데기의 꿈도 나른할 것 같고 어디선가 소리 없이 뭔가가 무너지고 있는 것 같다
북극의 빙하와 설원을 생각해 본다 북극곰의 겨울 잠을 생각해 본다 그 가열한 꿈속에는 존재의 인식이 있을 것 같다 넘치고 썩어 나는 뜨뜻미지근한 열기 속에는 예감도 구원에의 희망도 없다 봄도 없다
자본주의의 출구 없는 칠옹성 온난화 현상이 일렁이며 다가온다 문명의 참상이 악몽같이 소용돌이친다 춥지 않은 회촌 골짜기의 올해 겨울
박경리 시인 / 천성
남이 싫어하는 짓을 나는 안했다 결벽증, 자존심이라고나 할까 내가 싫은 일도 나는 하지 않았다 못된 오만과 이기심이었을 것이다
나를 반기지 않는 친척이나 친구 집에는 발걸음을 끊었다 자식들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싫은 일에 대한 병적인 거부는 의지보다 감정이 강하여 어쩔 수 없었다 이 경우 자식들은 예외였다
그와 같은 연고로 사람 관계가 어려웠고 살기가 힘들었다
만약에 내가 천성을 바꾸어 남이 싫어하는 짓도 하고 내가 싫은 일도 하고 그랬으면 살기가 좀 편안했을까
아니다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 삶은 훨씬 더 고달팠을 것이며 지레 지쳐서 명출이 줄었을 것이다
이제 내 인생은 거의 다 가고 감정의 탄력도 느슨해져서 마운정 고운정 다 무덤덤하며 가진 것이 많다 하기는 어려우나 빚진 것도 빚 받은 것도 없어 홀가분하고 오로움에도 이력이 나서 견딜 만하다
그러나 내 삶이 내 탓만이 아닌 것을 나는 안다 어쩌다가 글 쓰는 세계로 들어가게 되었고 고도와도 같고 암실과도 같은 공간 그곳이 길이 되어 주었고 스승이 되어 주었고 친구가 되어 나를 지켜 주었다
한 가지 변명을 한다면 공개적으로 내지른 싫은 소리 쓴 소리, 그거야 글쎄 내 개인적인 일이 아니지 않은가
박경리 시인 / 어머니의 사는 법 中
사람들이 남의 험담을 하면 세상에 숭없는 사람이 어디 있나 했고 말소드레기 일으키는 것들 상종 안 한다는 말도 했다 말소드레기란 말을 옮겨서 분란을 일으킨다는 뜻인데 어머니는 남의 일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고 호기심도 없었다 밥 먹고 할 일 없는 것들, 내 살기도 바쁜데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그럴 새가 어디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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