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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세라 시인 / 세 개의 상자
라일락 및 상자 세 개 모래밭에 놓는다
옆으로 나란히
위로 높이
그리고 니은 자로 배치해 보았다
기역 자로는 배치할 수 없다
기억은 배치할 수 없다
-시집 <복화술사의 거리>에서
최세라 시인 / 고양이를 볼 때 천사를 믿는다
두 개의 촛불처럼 눈동자가 흔들린다 같은 시공간에서 고양이는 동물계를 나는 인간계를 살았다 냄비에 눈송이 끓는 소리를 내며 고양이가 기대 온다 그릉그릉 물에 젖은 공간이 열린다 고양이는 동물계의 발톱으로 현관에서 가장 잘 보이는 벽지를 긁어 놓았다 나는 인간계의 입술과 혀로 고양이를 달랬다 털이 티슥티슥하고 꼬리가 뭉텅 잘린 길고양이를 본 적이 있었는데 계속 울며 전봇대 주위를 뒤지고 있었다 고양이에게도 소유라는 게 있을까 깨진 접시 조각이 방금 전 가졌던 둥그럼을 소유하듯 이해하지 못하는 기도문을 외우며 천사라고 부르면 울컥 기울어지는 게 있어서 자꾸 서려고 하는 고양이를 안는다 고양이는 아주 정교한 보일러처럼 내 목구멍에 뜨거운 호스를 밀어넣는다 방안에 오줌이 퍼진다 나는 온 방안을 더듬는다 네 개의 발로 기며 바닥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방금 전까지 소유했던 따스함을 되찾기 위해 고양이를 볼 때면 천사를 믿는다 나는 동물계를 살게 된다 -계간 『시와 경계』 2024년 여름호 발표
최세라 시인 / 낙진 예보
1. 나는 네가 추측하는 곳에 서 있다 더럽고 비좁은 유리창이 보이는 자리 회색 먹구름이 하수관을 통해 흘러나오는 곳 이따금 장발의 남자 마테가 창을 열면 그의 배후에 죽은 애인의 분골과 늙은 개들의 털이 먼지의 적란운으로 이룩되는 걸 엿볼 수 있는 곳 거기에 나는 검을 짚은 채 서 있다 검날을 쥔 손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내 피에 검이 부식된다 빛을 잃은 검을 모래땅에 꽂는다 검에 기대 선다 검을 의지한다 이것이 다 부식되면 모래흙에 피와 철이 섞일 것이다 내 몸에 녹이 슬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에 손목을 물어뜯으면 쇠 맛이 날 것이다 철판으로 잇댄 어깨에 혀를 대면 피 맛이 날 것이다 빗물이 검에 스며들어 온통 핏방울 핏방울들 그때 나는 네가 짐작하는 시간에 서 있다
2. 장발의 남자가 거칠게 창을 닫자 삶을 경멸하며 행인들이 흩어진다 이곳 사람들은 1년에 0.02%씩 플라스틱이 되어간다 그건 그만큼의 비율로 영원이 된다는 뜻
달리던 로라가 멈춰 선다 숨 가쁜 하늘 가득 핏빛 에어로졸
이번만큼은 여자애를 성공적으로 떼어냈기를 바라며 대형 건물 옥상 광고판에 낙진 예보관이 등장한다 오늘도 그 모든 어제와 마찬가지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낙진이 떨어지겠습니다 행인들이 걸음을 옮긴다 사람을 원하지 않는 영원 쪽으로 장발의 남자 마테의 배후는 무너지지 않은 채 새로운 먼지와 뒤엉키고
갑자기 왔던 방향으로 로라가 달리기 시작한다 사람들 사이를 누빌 때마다 낙진이 떨어진다 혼자 낙진을 맞는다 로라의 피가 검에 베어 부식되어 간다 녹슬고 피맺힌다 점점 그 자리에 붙들린다
3. 검붉은 반점으로 뒤덮인 너와 함께 검붉은 낙진을 맞고 싶다 이 자리에 붙들리고 싶다 그러나 네가 추측하는 시간과 장소가 맞아떨어지는 자리
거기엔
내가 서 있지 않다 네 피가 검에 베어
최세라 시인 / 신데렐라와 왕자님은 결혼하여 행복하게 살았 습니다
1. 불 지르자 오목하게 선이 산다 격자무늬 창살 너머로 지겨운 우리 집 오빠, 우리가 정말 저 집 자식이야? 여동생의 검지를 따라 창문 가득 육탄전을 벌이는 부모의 실루엣을 본다 물론 그럴 리가 차라리 여기가 나아 이 흉가가 아름다운 유령이 나타나 진짜 엄마에게 데려다 줄 거야 왕가의 우아한 여인일 저들과는 근본적으로 딴판일
불 지르자 냄비만한 푸른 외눈이 박힌 검은 진흙탕의 하늘 격자무늬 창살 너머로 지겨운 우리 집
오빠, 다른 집 아빠도 좀도둑질을 하고 다닐까? 다른 집 엄마도 여덟 명의 애인을 달고 다닐까?
2, 물론 오해가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아름다운 신데렐라가 처음부터 불행했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자정이라는 시각을 견딜 수 있는 건 계단을 내려가다 엎어진 유리 구두뿐 자정을 못 견디는 건 쥐로 만든 마부, 호박으로 만든 마차 자정이 반복될수록 사라지는 건 왕가의 영광과 인간의 사랑이 있겠습니다
자정에 왕자의 나라에 반란이 일어난 것뿐입니다 자정에 도망쳤고 추운 지방에 정착해 신분을 숨겼고 자정에 남매를 낳았고 먹을 게 없고 격자무늬 창살 너머로
물론 천박한 그들이 우리의 진짜 부모일 리 없지요
3. 오빠, 다른 집도 이런 게 있을까? 여동생의 손에 들린 한 쌍의 유리 구두를 본다 그건 두 개의 우는 눈망울처럼 보인다 여동생이 한 짝 내가 한 짝 불타는 우리 집을 향해 던졌다
두 번 유리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우리는 부유하고 아름다운 유령 부부에게 입양될 수 있었다
최세라 시인 / 생일선물
달아나라 최대한 빨리 그래도 늦을 거야
너의 목에 소금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달리다 지치면 이걸 핥아 다음 생일엔 사슴 농장을 선물해 줄게
(어려울 거야 뿔이 잘려지고 다시 만나다는 건)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너는 나의 판단의 근원 예감 그리고 이 순간 너는 손이 미끄러지는 문고리 너머의 빈 방
어서 달아나
삼나무 어깨 위 검은 달이 숫돌에 물을 끼얹는 사이 하얀 시내는 검푸르게 휘어진 칼날이 되고 어느새 알게 된 핏빛 비밀처럼 뿔은 베어지고 말겠지만
나는 네가 여기 살았다는 유일한 증거 변론 멈출 수 없는 탄원 그리고 멀리 사라져 가는 너는 이 마을 모두가 뒤를 쫓는 현상수배자
잡히는 순간 다음번 내 생일이 사라져 버리는
최세라 시인 / 포르테 아 포르테 - 비탈에 묶인 염소에 대한 전언 1
길바닥을 씹어먹는 파쇄기처럼 나는 종이를 씹는다 덩어리덩어리 뒤로 쏟아낸다 파쇄된 아스팔트 길이 굴러떨어져 눅진하게 발 끝에 걸려 있는 나에 대한 사용설명서 따위 끝내 당신을 파쇄하지는 못할 거라는 오만 한 미소까지 버팅기는 완강한 힘과 휘어진 뿔로 당신의 직선 길을 철저히 썰 고 씹 고 삼켜주마 나는 흰자위 없는 노란 눈알을 깜박이지도 않고 당신을 노려본다 보는 것만으로 죽일 수 있다는 믿음으로 철저한 믿음으로 만면에 띤 당신의 웃음을 멍석처럼 말고 있다 땡볕 언덕에 묶인 채 서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내가 아니라 당신이 박아놓은 녹슨 말뚝
붙박힌 자리를 계속 들이받으며 내게 묶인 말뚝을 철 저히 뒤 흔든 다 무릎 꿇어본 적이 없는 다리로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부동의 자세로
그리고 땅은 천천히 염소를 뿜어올렸다
최세라 시인 / 알비노 -어떤 이야기는 결코 끝나지 않고 하얗게 귓바퀴를 맴돈다-
벽장 속을 걸었습니다 자작나무 갈림길은 너무나 정직해서 빨간 눈을 숨겨야 했어요 모든 충혈된 눈들이 결백을 주장하지 않아도 되는 술집을 알고 있습니까?
모든 것이 눈부셔요 그러나 커튼을 치진 말아 주세요 살면서 빛나 본 적 없는 사람은 별이 되어 빛난다는군요
당신과는 이야기였습니다 좋은 결말로 가고 싶었지만요 비 맞고 가는 사람을 위해 우산을 다 버리고 당신이 찾아왔는데 거대한 잿빛 자루가 하늘을 뒤덮더니 주둥이 묶인 개의 침처럼 격한 비가 사방으로 튀었어요
기척 없이 옷에 묻는 백묵처럼 빨간 눈을 숨깁니다 초록빛 알약을 삼키면 내 심장에 풀물 번지는 게 보이나요
풀빛이 연두가 바다색이 좋아요
색깔이 사라지면 하얀 어둠이 밀려오고 오늘은 모든 바닷물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한 알의 은모래 녹슨 난간에 매달려
우리는 그때 대단한 사건을 보는 것처럼 한 송이의 눈을 보았습니다 투명한 빗방울 속에서 하얀 뿔이 뻗어나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눈의 결정을 이룰 때까지 서서히 하양을 뿜어내는 것을
모든 게 눈부시군요 그러나 이제 커튼은 떼어 버려요 어디서나 눈에 띄는 당신은 알비노 내 옷에 묻는
눈이 부신 건가요 시력을 잃는 건가요
아무래도 쉽지 않지요 이 벽장 속을 다 걸을 때까지 갈림길은 너무나 정직해서
최세라 시인 / 2084, 타임머신 승차권을 줍다
1. 기원전후 654
마테는 어깨를 구부린 채 문워크 동작으로 부엌문을 통과한다 밀가루 반죽이 손금마다 고여 있다 빵을 구우면 보름달이 부풀어 기름에 미끄러지는 입술, 입 술로 전해지고 얼굴 가득 손금 새겨진 어머니가 짧은 기별을 시식한다 문고리 에서 달까지 세 발짝 거리
2. 발
날개 없는 새가 발 없는 새 위에 얹혀 서쪽으로 날아간다
모래가 모래 한 알에 얹혀 강물의 휘어짐을 바꾸듯
두 마리 새가 한 마리로 보일 때까지 펜 끝에 생각을 놓는다
생각 속 갱생원을 나와 생각 속 묽은 아메리카노 마신다
재생지는 재생지라 누렇다 재생지는 부활지가 아니다 갱생지도 환생지도 아 니다 재생지는 재생지다 마테는 조금 반성하고 크게 뉘우치는 척하며 걷고 있 다 재생지는 전생에 교과서였거나 플레이보이 잡지였다 선물상자였고 비방문 서나 삐라였다
재생지는 재생을 원했을까 촛불이 꺼지면 불의 그림자는 어디로 갈까
생각은 우주를 감싼 우주 밖 우주
마테는 앞니로 껍질에 구멍을 낸다 발톱이 될 수도 있고 꽁지가 될 수도 있는 날계란 일부가 물큰하게 흘러내려 탁자 위 양푼 속으로 고여든다
계란의 구멍과 양푼 사이의 허공
흘러내리는 날계란 눈동자쯤에 우리 은하가 있다
3. 숲
나무들이 한데 모이면 종일 파도가 친다 청포도색 포말에 발 적시기가 무서 운 새들이 종일 마테의 지붕 위를 맴돌았다 새들은 착륙하지 못하고 토네이도 가 만들어지고 있어, 마테의 형이 새떼를 향해 총을 겨누었다 형, 그쪽은 새들 이 아냐 어머니야
아름답게 황홀해 나를 뛰어넘지
구겨지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절단되지도 않아
불가사리처럼 창에 어린 이미지처럼
650 헤르츠쯤에서 파장을 그었다가 이네 되붙는
홀로그램, 잠깐 끊긴 파장에서 흘러나오던 뉴스와 음악
기억해, 물미역처럼 후르르 서 있던 방직공단 여공들을
항상 아름답게 황홀하지 내가 되고픈 어머니야 형, 홀로그램은
4. 여름과 무궁화의 짧은 통화
땅바닥에 침낭을 던지는 꽃 생리대처럼
돌돌 말려 먼 별 속으로 투신하는 꽃
침낭 속에서 뿔리를 만지는 노숙인과 마테가 마주보고 누웠다
목구멍에서 썩은 멸치떼가 솟구친다 고향이 어디라구요?
노숙인은 술병을 들어 먼 별을 가리킨다 그러니까
당신 고향 말고 내 고향이 어디냐구요 노숙인은 다시 차표를 들어 별을 가리킨다 손을 내밀어 봐
술값으로 손금을 봐 주지 당신은 점성간가요?
노숙인은 차표로 마테의 손바닥에 금을 그었다
이제 가 봐 넌 나를 귀찮게 하는구나 각다귀 들끊는 여름밤처럼
잊지 마 운명이 맘에 안 들면 손바닥에 금을 그어 그것이
두 개 세 개 잔가지를 칠 즈음엔 너도 나도 이 땅에 없겠지만
5. 타임머신 승차권을 줍다
마테는 밀가루와 선반에 화덕을 가지고 있다 수천 년 흘러도 변함이 없이. 공 간이동 부스에서 한 남자가 유쾌하게 녹아 간다 주먹만 한 혼불이 별을 행해 날아간다 검푸른 치마폭에 잔모래를 끼얹으면 거리의 모든 사람이 은하수 되 는 곳, 사람은 별보다 크다고 믿는 백색왜성 키 작은 종족들, 혼불이 또 한 개 날 아간다 뭇별은 일등성보다 아름다워, 어머니는 그 큰 눈에 진심을 담아 말하곤 했지 마테의 직업처럼 유전되는 어머니의 기억 밤의 커다란 창 앞에 선다 전신이 어리비치고 부엌 문턱에 노숙인의 차표가 덜어져 있다. 2084 타임머신 승차권, 마테는 수천 년 동행했던 몸을 침대에 눕 히고 유리창에 어리비친 제 안으로 천천히 탑승한다
-시집 <복화술사의 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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