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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하 시인 / 천이遷移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당신의 피는 계속 끓는다 새소리,산림의 비율이 가끔 결박의 온도에서 벗어나듯 돛을 단 씨앗은 바다 기슭을 습격하기도 한다
일정한 지역에서 탈출한 번식의 자유는 언제나 당돌하다 누군가 선택한 바람이 계곡으로 흩어질 땐 당신의 심장은 어느 순간 산마루에 올라 활짝 웃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주 가혹히
당신과 나 사이는 세월의 근엄한 거울 나이테처럼 깊고 강인하다 기적이 아니라 당연 예측이 가능한 누구를 위한 저항인가
지친 그늘이 태양을 제 몸에 세차게 문지르면 아주 잠깐 누군가는 열반에 든다 그래서 시간의 간격은 오묘한 미래,
날마다 질주하는 시간의 번식 가슴이 뛴다 계곡의 꽃향기가 빗장을 연다 당신과 나는 돌고 도는 추륜(推輪), 수직과 곡선을 사랑하는 숲의 눈물이다
이강하 시인 / 손톱
손톱은 물의 모퉁이다. 누군가를 잊고 싶다는 생각이 극에 달하면 더 길어진다. 어제의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 생각이 또 다른 물의 절망을 끌고 다닌다. 원고를 끝내고 조간신문을 읽은 후 당장 깎아버리고 싶은데 당신이 잘못될까봐 또 하루를 미룬다. 당신을 보지 못할까봐 여러 날 격한 일에 몰두한다. 그러다가 계속 내리는 봄비를 이해하지 못할 때는 아트 브러시를 한다. 차오른 엄마를 지우고 싶다고 다시 살고 싶다고 물방울 섞인 나뭇잎을 엄지손톱에 그려 넣는다. 지울 수 없는 모퉁이여, 더는 아프지 마오. 지독한 병에 걸리면 손톱은 자꾸 물렁하다. 골짜기가 두렵고 가시 많은 울타리와 이별하고 싶고 내달리는 과학이 싫어지고 자신이 태어난 흙집도 싫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그들이 못나 보이고 신체적 안위에 욕심을 부린 나는 더 추악해 보이고 그런 뾰쪽한 시간을 매달고 그것을 즐기듯 밥을 먹고 화장실을 가는 뒷모습들이 슬프다. 더 절망하기 위해서 사과나무에 물을 뿌리는 물뿌리개가 되기도 하는 손톱은 더 슬프다. 사월의 손톱들은 물이 많고 아린 모퉁이들이다.
이강하 시인 / 오래된 나무 이야기 2
오른쪽 나무가 쿵, 쓰러졌다 어제저녁에 지난해 태풍에는 끄떡없었는데 왼쪽 나무 마음은 휘어지는 기찻길
왼쪽 나무는 얼마나 울었을까 기차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 100년 레일이 휴식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식음전폐한 것일까
참 많이도 지나갔었지 든든한 기차가 시간마다 특별한 목소리 내며 미루나무 나이테는 기차소리로 꽉꽉 채워졌었지 자네에게 기차와의 추억을 얘기하라면 밤을 새도 다 못하지 기차는 친구이고 부모이고 형제이고 아들과 딸이지
기차와의 사랑은 충분했으므로 더 울 것도 없지 호계역 역사만큼은 아니어도 이만큼 살았으면 잘 산거지
그럼 그럼 나도 곧 오른쪽 나무를 따라갈 거야 서쪽으로 날아가는 기러기떼를 바라보며 말한다. 왼쪽 나무는 웃으면서
이강하 시인 / 습지
너의 위를 저벅저벅 걸어 다니면 속도에 따라 떨어지는 내 숨을 마시지 마치 내가 너의 구멍에서 솟은 향기를 마시는 것처럼
부들 붓꽃 부처꽃 창포 개구리밥 무궁화 단풍나무 칸나 수련의 숨은 신비하지 때론 네 친구들이 인간에게 고통받을 때도 있지만
요즘 들어 태양과 비구름을 당기는 힘이 어찌나 당당한지 저 멀리 빌딩을 바라보는 눈빛도 어찌나 당당한지 너를 만날 때마다 내 숨이 벅차지 너의 구멍이고 싶지
내가 비겁한 마음을 갖지 못하도록 속근육까지 내보이는 너 그런데 오늘은 왜 네가 나보다 더 비겁해 보이지?
우리가 어떤 고통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우리가 어떤 미래를 설계하고 있을 때 빗방울 소리는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안정제로 스며들까
단풍나무 열매들이 나를 내려다보며 흔들리는 아침 가장 빛나는 씨앗 하나, 금세 못으로 날아갈 것만 같아 내 두 발을 양어깨에 매달고 -웹진 『시인광장』 2024년 8월호 발표
이강하 시인 / 줄무늬 돌
줄무늬 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팔색조 햇살 내리는 계곡 지팡이 짚고 걷는 그림자들, 청색 층이다 줄무늬 검정돌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사이 세계적 교량 일곱이 널뛰기를 했다 전쟁으로 죽은 아이가 아른거린다면서 그래, 이젠 한마음이면 좋겠어 전쟁 없는 세계라면 좋겠어 줄무늬 돌이 나무에게 말을 거는 사이 줄무늬 셔츠를 입은 소녀가 내 앞으로 빠르게 지나간다 줄무늬 셔츠는 한때 내가 사랑한 친구가 즐겨 입은 옷이었지 함께 줄무늬 셔츠를 입고 봉사하러 가는 날에는 발걸음도 초록이었지 그런데 가끔 친구의 친구들과 축구를 했던 장소가 떠올라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처럼 통증이 올 때가 있어 어쩌다가 친구의 친구와 심하게 몸싸움을 했고, 서로의 사과는 사과를 해도 피투성이 사과나무로 남았지 이제야 고백하는데 그때 그 주변 화살나무는 우리보다 더 고통스러웠다고 지금 나라 밖 전쟁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줄무늬 돌들이 계속 운다 돌과 돌 사이 물소리는 누구의 기도일까
웹진 『시인광장』 2024년 2월호 발표
이강하 시인 / 칸나의 해안
여기는 움직일수록 신비한 해안
신발을 내던지고 히잉 말울음소리 내며 내달린다 한참을 내달리다가 멈춘 그림자 위로 누군가의 이름을 쓴다 오! 놀라워라 축축한 모래 속에서 굵은 밤이 흘러나오다니 백합조개나 꼬막 같은 것이라야 하는데 왜 하필 밤일까
동그란 밤은 죽은 님을 무진장 사랑했지 님도 동그란 밤을 사랑했지 갑자기 님의 서해가 떠오른 맨발들, 등이 휘어져라 계속 밤을 파낸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 따라 밤들이 신났다 귀가 없는 밤은 더 신났다 그런데 먼저 캔 밤은 어디로 간 것일까
얘아, 네가 밤을 까먹고 있니? 아이는 겁먹은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리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얼굴을 자세히 보니 아이 얼굴은 어릴 적 누구를 닮았다 조금 슬픈 얼굴이었다 순간 나는 그 아이에게로 다가가 와락 껴안았다 마지막으로 캔 밤까지 손에 쥐어주면서 아이는 그제야 환해져서 포말 속으로 사라졌다 칸나가 핀 수평선 쪽으로
여행 이틀 째 된 저물녘에는 문단에서 유명한 선배 한 분이 우리 텐트로 놀러 왔다 언니는 선배에게 커피를 타줬다 그대들 텐트 속에서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시니까 엄청 기분이 좋다며 작은 가방 옆에 있는 노트에 사인을 했다 아주 지저분한 노트에
왜 지저분한 노트 뒷장에 사인을 했냐고 물었더니 시를 더럽게 못 쓴다, 라고 말하면서 계속 웃었다 우리도 배꼽 잡고 따라 웃다가 어떤 거짓말까지 아름답게 노트에 기록한 날,
칸나가 핀다, 뜨거운 밤이 핀다.
계간 『시에』 2023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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