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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오규원 시인 / 돌멩이와 편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29.
오규원 시인 / 돌멩이와 편지

오규원 시인 / 돌멩이와 편지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눈송이가 몇 날아온 뒤에 도착했습니다

편지지가 없는 편지입니다

편지 봉투가 없는 편지입니다

언제 보냈는지 모르는 편지입니다

발신자도 없는 편지입니다

수신자도 없는 편지입니다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 것을 알았습니다

돌멩이 하나 뜰에 있는 것을 본 순간

편지가 도착한 것을 알았습니다

 

 


 

 

오규원 시인 / 그 카페

-기형도 시인에게

 

 

태양의 집 건너편에

(태양의 집, 건너편? 지금은

건너편이

너무나 선명하게 와 닿는)

건너편에 있는

그 까페, 태양의 집을 두고

달의 집인가 별의 집인가로

그대가 가기 전에

보름인가 얼마인가 전에

각각으로 눈 감을 곳에 닿기 전에

그곳에 어쩌다 잠시 함께 닿아

머물렀던 그 까페, 지금은

나 혼자 지나가다 들른다

어느 새 이름도 바뀐

그 까페, 그대가 ‘잘 있거라’

라고 인사도 못한

등받이가 높은 의자와

정방형의 다탁과 칸막이 벽과

그대가 ‘잘 있거라’ 라고 역시

인사도 못한 그곳의 곰팡이 냄새와

지하를 오르내리는 낡은 층계와

층계를 덮어놓은 붉은 양탄자와

흐린 불빛에게 그대와는 다른 이유로

‘잘 있거라’ 라고 나는 인사를

못한다 못하고 나오며, 태양의 집

건너편에 그리고 지하에 있는

그 까페로 들어가는 더러운

양타자가 깔린 층계 입구에게도 나는

그대와 다른 이유로 ‘잘 있거라’ 라고

인사도 못한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기형도 추모문집』

 

 


 

 

오규원 시인 / 마음이 가난한 者

 

 

성경에 가라시대 마음이 가난한 者에게 福이 있다

하였으니

 

2백억 축재한 사람보다 1백9십9억 원을 축재한 사람은

마음이 가난 하였으므로 天國은 그의 것이요

 

1백9십9억 원 축재한 사람보다 1백9십8억을 축재한

사람 또한 그민큼 더 마음이 가난하였으므로

天國은 그의 것이요

 

그보다 훨씬적은 20억 원이니 30억 원이니 하는 규모로

축재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마음이

가난하였으므로 天國은 얻어놓은 堂上이라

 

돈 이야기로 詩라고 써놓고 있는 나는 어느 시대의 누구보다도

궁상맞은 시인이므로 天國은 얻어놓은 堂上이라​

 

 


 

 

오규원 시인 / 새와 집

 

 

딱새 한 마리가 잡목림의

산뽕나무 가지에 앉아 허공에서

무엇인가 찾고 있다 딱새의 그림자도

산뽕나무에서 내려오지 않고

가지에 그냥 붙어 있다.

박새 한 마리도 산뽕나무 뒤편

붉나무 가지들 두 발로 잡고 있다.

그러나 산뽕나무 저편 팥배나무에서

문득 날아오른 새 한 마리는

남쪽의 푸른 하늘에 몸을 숨기더니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새가 몸을 숨긴 그 하늘 아래는

집을 짓고 사람들이 산다

 

-2002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시

 

 


 

 

오규원 시인 / 프란츠 카프카

 

 

MENU

샤를르 브들레르(프랑스 시인) 800원

칼 샌드버그(미국 시인) 800원

프란츠 카프카(독일 소설가) 800원

 

이브 본느프와(프랑스 시인) 1,000원

엘리카 종(미국 소설가) 1,000원

 

가스통 바슐라르(프랑스 철학자) 1,200원

이하브 핫산(미국 비평가) 1,200원

제레미 리프킨(미국 문명 비평가)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독일 철학자)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오규원 시인 / 오디와 전화

 

 

바람이 불고 전화가 왔다

바람이 부는데도 수화기를 드는 순간

전화가 툭 끊어졌다

바람이 불고 전화가 오지 않았다

집이 혼자 서 있다

울타리 넘어 바람이 뽕나무에서 불고

오디가 까맣게 익는다

 

 


 

 

오규원 시인 / 작은 별에 고독의 잔을 마신다

 

 별을 낳는 것은 밤만이 아니다.

 우리의 가슴에도 별이 뜬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슴도 밤이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에 별이 뜨지 않는 날도 있다.

 별이 뜨지 않는 어두운 밤이 있듯

 우리가 우리의 가슴에 별을 띄우려면 조그마한 것이라도 꿈꾸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다른 것을 조용히 그리고 되도록 까맣게 지워야 한다.

 그래야 별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그러므로 별이 뜨는 가슴이란 떠오르는 별을 위하여 다른 것들을 잘 지워버린 세계이다.

 떠오르는 별을 별이라 부르면서 잘 반짝이게 닦는 마음 - 이게 사랑이다.

 그러므로 사랑이 많은 마음일수록 별을 닦고 또 닦아 그닦는 일과

 검정으로 까맣게 된 가슴이다.

 그러므로 그 가슴 앞에서는 조금이라도 광채를 가진 사람이면 별처럼 반짝반짝 빛난다.

 그러므로 사랑은 남을 반짝이게 하는 가슴이다.

 사랑으로 가득찬 곳에서는 언제나 별들이 떠있다.

 낮에는 태양이 떠오르고 밤에는 별들이 가득하다.

 그러므로 그곳에서는 누구나 반짝임을 꿈꾸고 또 꿈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으로 가득찬 가슴에 투망을 하면 언제나

 별들이 그물 가득 걸린다.

 

 


 

오규원(吳圭原) 시인 (1941~2007)

1941년 경남 삼랑진 출생. 본명: 오규옥(吳圭沃), 부산사범학교를 거쳐 동아대 법학과를 졸업. 1965년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되어  등단. 시집 『분명한 사건』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유고시집 『두두』.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 역임. 2007년 65세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