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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효선 시인 / 굼부리의 날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2. 30.
김효선 시인 / 굼부리*의 날들

김효선 시인 / 굼부리*의 날들

 

 

마른꽃들이 지나갔다

 

절망이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올 때

송당리 아부오름으로 차를 몬다 거기,

나만큼 너를 모르는 사람이 있다

두 개의 심장이 척척한 공기에 둘러싸여

 

삼나무 아래를 지나는 꿈을 꾼다

잎으로만 살던 시절을 내려놓고

다시 네 생일이라고 잔뜩 미역을 불리고

 

수위를 넘긴 바다가 창문을 엿볼 때

젊어서 뼈를 묻은 억새들

가시를 기다리다 지쳐 오름이 되었겠지만

 

나만큼 나를 만지지 못하는 것도 없어서

한쪽 어깨가 무너지고 나면 다른 한쪽은

자꾸 나무가 자라는 기시감

 

영원히 나를 껴안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나고 돌아가는 길

 

마른 꽃들이 흔들렸다 신발 뒤축으로

 

*굼부리: 화산 분화구를 뜻하는 제주방언

 

 


 

 

김효선 시인 / 달세권

 

 

톡톡 손톱을 깎더니

구태의연을 달여 내보낸 이마

소금을 뿌려 바람의 한 끼 식사로 충분한

서쪽은

발효를 일삼아 발화를 타전합니다

 

혼자 그네를 밀다 넘어진 홍조라고 해 둡시다

깨금발의 미학을 보여주는 시소를

헛기침으로 눌러보려다 저녁은 목이 뻣뻣해지고

하품이 쏟아지는 동시에

 

대문 안쪽에선 고래고래 고함이 시작됐죠

바깥은 빗자루를 든 소녀들의 쓸어넘긴 머릿결

손가락 무덤이 담벼락 아래

수북이 쌓였구요, 두 손을 나란히 머리맡에 두면

 

허리를 탕탕 찍어대며 멀어지는 사람이 있었죠

꿈에서 짖어대는 새소리에 그만

 

달을 들고 가다 깨뜨렸지 뭡니까

우리가 그토록 사랑했던 징그러운 그림자였달까요

발목을 잃어버리고도 찾지 않는 새가

고개를 갸우뚱거릴 때마다

 

앞뒤가 없는 옷을 입고 앞뒤로 사라집니다

사라진 발자국만 쫓아가는 모래처럼요

 

넌 뭐가 되고 싶어 자꾸 벽을 기어오르는 거니

단정한 소매 끝 고전주의자의 목소리였나요

태양의 침실엔

사전을 베고 죽음의 목차를 달달 외우는 퀭한 눈의 별이 삽니다

 

추론을 하기엔 너무 이른 뒤통수였달까요

다크 서클을 주석처럼 달고 다니는

사춘기 소녀였달까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걸 믿을 때

 

아아,

흐드러진 달세권이라 해 둡시다

제 몸뚱이를 잘라 자신을 완성하는

 

 


 

 

김효선 시인 / 은행나무 도마

 

 

나무의 결을 쓰다듬으면

무덤은 희미하게 맥박이 뛸 것 같아

 

내 귀에 속삭이는 목소리를 주워

천 년 동안 나무로 살았다는 시를 쓰고 싶어

노란빛으로 스며드는 오래된 섬광

이번이 진짜 마지막이야

낡은 송전탑 부근에서 들려오는 을씨년스런 주파수

 

시작은 이렇게 간절하지만 돌아올 땐 늘 피 묻는 종아리인 걸 여기서 나는

 

버려진 장작에 모닥불을 붙이곤 하지

알코올을 달콤하게 빨아들인 뱅쇼는

주어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목적어처럼

깊어질수록 건너온 뒤를 잊어버려

돌아서 나갈 수 없는 전생처럼

 

사랑하면

불안은 어느 쪽으로 가든 만나는 나이테 같아

이윽고 도착한 은행나무 아래의 고백

어둠은 몰래 온 자객을 업고

가장 오래된 유적 앞에서 참회의 무릎을 꿇지만

 

목소리를 잃어버린 입은 몹시 단순해서

제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용서를 쑥 뽑아 들지

지독한 냄새가 주렁주렁 매달릴 때까지

 

자신의 체취를 잊으려고 내려치는 심장

무덤을 쓰다듬듯 결을 쓰다듬는 조용한

어떤 손들은

 

-시집 『시골시인 – J』 (걷는사람, 2022)에서

 

 


 

 

김효선 시인 / 문어

 

 

흰옷에 적당히 튀는 걸 즐기는 달빛이다

 

아무튼 질문만 던지는 여덟 개의 다리가

지리멸렬한 문장 하나 쑥 빼 가더니

문어의 심장은 세 개

 

머리카락 한 올 얼굴에 달라붙어

온몸의 지축이 흔들리며 심장이 요동칠 때

 

물을 움켜쥔

두 번째 심장이 절망과 뒤엉켜

거대한 축문祝文의 몸뚱어리가 탄생한다

 

생리처럼 번지는 수평선을 바라보면

여기는 오다는 끊겨 버린 미래 같아서

 

때로 신념은

너무 꽉 쥔 나머지 물컹한 어둠에 넘어지고

잘라낼수록 더 단단하게 자라는 슬픔

물은 어디까지 죽음을 끌고 갈 수 있을까

 

흑점을 품고 파도에 슥슥 마지막 심장을 갈면

검은 이마에 오소록한*별빛 돋아나

 

은밀한 촉수 하나 몰래 꺼내 물 밖에 걸어둘 때

우리는 그걸 달빛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꿈에서 바라본 바깥은

구겨지거나 쪼그라들거나

바다로 걸어갈수록 바다가 무너지고

파도는 여덟 개의 질문을 덮친다

 

허무적거리다가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불가촉 밤을 갖게 되면

 

세 개의 심장이 와르르 쏟아져

잘려나간 서사는 모두 달로 환원된다

 

너무 질겨서 씹지 못하고 뱉은 날씨였다

 

*조용하다,은밀하다,포근하다는 의미의 제주어

 

-시집 『시골시인- J』 (걷는사람, 2022)에서

 

 


 

 

김효선 시인 / 당신을 수거해 가세요

 

 

우린 곧 낡고 허물어질 테니

어제는 버리고 오늘은 수거해 가세요

 

삼 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은

평생 입을 일 없으니 버려야 한다고

모서리엔 늘 별들이 숨는 장소가 있고

 

모퉁이를 돌면 버릴 수 있는

모퉁이를 돌면 사라지는

모퉁이를 돌면 서 있는

 

수거함 밖으로 튀어나온 눈빛과 마주친다

사람을 너무 오래 입어서 사람의 허물로 태어난

 

무릎이 튀어나온 얼굴에

이미 길들인 장미의 우울을 섞어

울타리를 만든다

허물은 가시에 찔려도 허물인 것처럼

 

혼자 이죽이죽 웃는다.

옷에 배어있던 웃음이 실밥처럼 튀어나와

나도 그런 웃음을 입고 다니던 때가 있었다

 

왼쪽 가슴에 보풀이 인 채로

몇 해가 지나도

도로 개켜놓는 약속처럼

 

무심코 특,

허물을 걸치고 나갔다가

허풍만 잔뜩 들이마신 에어 풍선처럼

기억에 땀이 맺히도록 떠들다 돌아오면

간도 쓸개도 없이 적막만 부려놓는

 

당신은

당신을 수거해 가세요

 

나는

나를 아주 멀리 버리고 올 테니

 

-계간 『문예연구』 (2023년 가을호)

 

 


 

 

김효선 시인 / 하논*의 시간

 

 

넓은 이마를 가진 사람을 만났다

이마가 좁은 사람은 미끄러지기 좋은

 

기억은 통조림 같은 것

가라앉은 입술을 꺼내기 전에는

은밀한 둘레를 껴안는 의식을 치를 것

수많은 날들을 만나고 헤어졌지만

쉽게 물러지는 복숭아처럼

여전히 사랑은 경전에서 멀어진

이단

 

재미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고

누군가는 말했지만

거울은 재미없는 사람을 먼저 데려간다

웃는 나를 본다 울고 싶은데

 

사라졌던 계절이 이마 한가운데

자운영으로 그렇게 서로에게 몰려 있다

 

나는 좀 모자라서 발목을 빠뜨린다

입술을 꺼내어 기어이 덫을 놓는

 

죽어야 끝나는 관계는 어떤 목숨의 종교일까

 

물기를 훔친 꽃들은

마음이 없는 곳으로만 고개를 꺾는다

 

깻잎장아찌를 떼어 주거나 머리카락을 떼어 주는

사소함이 이마의 전부를 가릴 만큼

 

웅덩이에 고인 사랑, 하늘의 낯빛이 맑다

그래, 용서할게

 

*제주도 서귀포시 호근동에 위치한 한반도 최대의 마르형 분화구.

 

-제2회 서귀포 칠십리 문학상 수상작

 

 


 

 

김효선 시인 /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우리가 별이라고 믿었던 것은?

 

사거리엔 별다방이 있다 음침한, 삼거리엔 삼거리별이 오거리엔 오거리행성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우주는 늘 반짝거렸다 누워 있기 딱 좋은 방,

 

목요일이니까 네가 지나가지 않을 날씨를 알려줘 목성으로 해둘게 우린 어느 별인지도 모르고 천칭자리인지 전갈자리인지 너에게 행운이 있는 쪽을 선택해 주파수는 늘 흐린 쪽으로 흘러간다 점 하나로 이어진 어떤,

 

흐리거나 개인 목성이 연애의 전생이었다고 해도 빛을 내는 것들을 감출 수 없다 말할 수 없는 상처는 대체로 죄가 되어 밤마다 우박이 쏟아지면 맞았다 별들이었는지도. 우리가 눈물이라고 믿었던 그것은,

 

-시집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에서

 

 


 

김효선 시인

제주도 서귀포시 출생. 2004년 계간 《리토피아》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서른다섯 개의 삐걱거림』 『오늘의 연애 내일의 날씨』 『어느 악기의 고백』. 합동시집 『시골시인-J』. 2008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 시와 경제문학상, 서귀포문학작품상. 현재 제주대학교 강사. 다층문학동인, 빈터 동인.